<천검지애 62화>
62화. 수배(2)
악불군이 마도의 수련관을 본떠 만든 잠룡세가의 잔혹한 육 관 수련을 거치면서도 자신의 심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지와 부모의 영향이 컸다.
할아버지는 잠시 관직 생활을 했었다. 단순히 세월만 보낸 것이 아니라, 대원제국과 중원인이 다르다는 민족주의보다는 백성을 진정으로 아끼는 정부만이 진정한 지도자라는 진보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원나라 역시 송나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권력을 쥔 자들은 자신들의 치부와 안위만을 생각했고, 백성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결국 그는 일 년을 견디지 못하고 관직을 떠나 절강에 자리 잡고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노후를 보냈다.
그는 어린 시절 악불군의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는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말하곤 했다. 악불군이 이해하고 못하고는 상관없었다.
그러나 어린 악불군은 놀랍게도 할아버지의 말을 전부 머리에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약자들의 안위는 생각도 하지 않는 자들. 그런 자들은 반드시 징치해야 한다.’
악불군은 배를 타고 움직이는 삼 일간, 잠룡세가를 벗어난 이후 자신의 손에 이루어진 수많은 살생에 대해 많은 갈등과 생각을 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인이 되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미 죽고 죽이는 무림인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오성방의 행동은 기준을 벗어났다.
그때 안에서 담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군!”
“예!”
악불군이 안으로 들어서자 담수련이 옷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어디 가시려고요?”
“지금 이 배에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탄 것 같아.”
“그걸 아가씨께서 어떻게 아십니까?”
“추국이 아까 낮에 무한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무인들이 탔다고 했어.”
“죄송합니다.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마음 편히 쉬라고 그런 거잖아? 소군 마음은 다 아니까 죄송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다음부터는 뭐든 내게 알려 줘. 소군이 나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계속 그러면 나 스스로가 약해질 거 같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실은 무한에서 탄 자들이 이곳을 공격할 것 같다는 추국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역시 그랬구나…….”
담수련이 자신의 짐작이 맞았단 사실에 고무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악불군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아가씨께서는 그들이 아가씨를 노릴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무한은 장강 유역의 도시 중 원나라가 여전히 장악하고 있는 곳이야. 그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무인들이 동시에 배를 탈 리가 없어.”
무한에 있는 무인들은 대부분 원나라에 부역하던 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세력권을 벗어나 원나라를 타도하려는 반군 지역으로 갈 리가 없다는 것이 담수련의 판단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움직임이 그들에게 걸린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움직임을 좀 더 은밀하게 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아냐, 소군의 말을 따랐다면 그들이 우리를 쉽게 찾지는 못했을 거야. 내가 무리한 부탁을 해서 그런 거지.”
원래 악불군은 황산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호남으로 직접 이동할 계획을 짜고 있었다.
“아닙니다. 적의 적을 이용해 동선을 숨긴다는 아가씨의 계획도 훌륭했습니다. 다만 우리의 위치를 알려 주는 자가 있어서 이렇게 된 것뿐입니다. 그런데 옷은 왜 차려입으셨습니까?”
“오늘 소군의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어.”
“무엇이신지?”
소군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추국의 말이, 소군의 무공이 무림 백대고수의 상위에 속할 정도의 실력이라고 했어.”
“그건 추국이 너무 높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야, 백대고수 중 한 명인 연 호법을 소군이 이겼잖아?”
“그건 운이 따랐을 뿐입니다.”
“소군이 강해야 내가 안심을 하는데, 그렇게 자꾸 겸손하면 내가 불안해지잖아.”
“하하! 솔직히 말하면 제가 상당히 많이 강해지기는 했습니다. 연 호법도 진짜 쉽게 이겼거든요.”
순식간에 겸손에서 잘난 체하며 태세 전환을 하는 악불군의 모습에,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호호호~ 소군이 이렇게 재미있는 데가 있는 줄은 정말 몰랐네?”
‘아가씨께서 이렇게 웃으시는 것을 보니, 다음부터는 종종 잘난 체를 해야겠구나.’
담수련의 불안해진다는 말 한마디에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말은 했지만, 그녀의 맑은 미소 한 번에 기분이 좋아지는 악불군이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소군의 명성이 높아져야 할 것 같아.”
“제 명성이요? 아가씨, 전 제 명성 따위는 그다지 관심 없습니다.”
“소군은 그러겠지만 난 필요해. 소군이 강하다고 소문이 나면 지금 배에 탄 자들 같이 약한 자들은 더 이상 우리를 추격할 생각을 못할 거야.”
그녀의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다.
악불군의 무공이 강하다고 소문이 나면 어중이떠중이들이 그들을 건드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녀가 실제로 기대하는 것은 자신이 안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악불군의 명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강호에 나온 이상 자신의 생명이 몇 년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음절맥은 햇볕을 지속적으로 쏘이는 것도 안 좋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이 눈에 잘 띄는 것도 감수하면서 마차를 버리지 않고 그녀를 태우고 다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잠룡세가 내에서 보호받을 때와 비교한다면 여건이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배에 탄 자들이 약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소군은 간단히 이길 수 있잖아?”
“간단히 이긴다…….”
이기기야 하겠지만 간단히는 아니라고 말하려던 악불군은, 자신을 보고 있는 담수련의 기대에 찬 눈을 보자 다음 말을 꿀떡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당연히 간단히 이길 수 있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나를 위해서 자신 있게 말해 줘서. 그럼 나가자.”
* * *
“오랜만입니다. 위 소방주.”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선실 쪽으로 향하던 곽두권은, 위사묵이 십여 명의 수하들과 난간에 등을 대고 자신을 보고 있자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어딜 가시는 중이시오?”
“아까 양해를 부탁한 대로 본 방에 죄를 지은 자를 잡으러 갑니다. 금방 끝날 것이니 위 소방주님께 불편을 없을 것입니다.”
“하하하! 곽 당주, 남의 구역 안에 와서 이러면 곤란하지요.”
위사묵의 말을 들은 곽두권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신지요? 이미 두 대주를 통해 오늘 저희들이 움직일 거라고 양해를 부탁했고, 허락을 한 사안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곽두권은 기분이 상한 듯 이미 다 끝난 이야기를 왜 비트냐는 식으로 말했다.
위사묵의 무공 수위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있는 수하 열 명 정도는 지금 그들의 전력으로 가볍게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락을 하긴 했지. 그런데 내가 허락한 것은 오송방에 죄를 지은 자를 잡는 거였지, 현상 수배범을 잡는 것은 아니니 어찌하지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조금 전에 내게 이런 게 날아왔는데, 한번 보시겠소?”
곽두권이 시치미를 떼며 말하자 위사묵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더니 그를 향해 던졌다. 하지만 조심성이 많은 곽두권은 그 종이를 받지 않고 살짝 피했다.
곽두권은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힐끗 보더니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것은 그도 가지고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에 대한 현수배 전단이었다.
위사묵은 비소를 흘리며 다시 말했다.
“곽 당주께서는 제게 현상금 금자 일만 냥짜리를 숨기셨더군요.”
“우리가 본 방에 죄를 지은 자들을 쫓아온 것은 분명합니다. 우린 그 전단에 있는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쫓는 자들이 그들이라 해도, 이미 추적은 우리가 먼저 했습니다. 소방주께서도 아시겠지만, 우리 사이에는 예전부터 수배 전단이 오면 먼저 추적한 자들에게는 양보하는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을 말하니 나도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요. 자신의 세력권이 아닌 곳은 들어가지 마라. 강은 본 방의 세력권이고 저들은 지금 장강 위에 있소이다. 그럼 우리가 아니라 오송방에서 양보해야 할 사안 아니오?”
‘저놈이 알아채기 전에 빨리 잡았어야 했는데, 일이 복잡하게 됐군…….’
중얼거린 곽두권은 슬쩍 두광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두광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교룡방이 방해할 경우 그들까지 제거하기로 이미 계획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하들에게 준비를 명한 그는 언제라도 공격할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장강이 모두 교룡방의 세력이 됐는지 모르지만, 지금 이곳은 아직 무한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본 방의 세력권이 맞소이다! 위 소방주께서 말도 안 되는 억지로 우리 일을 방해한다면, 그동안 우리가 이어 온 우의를 깨뜨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곽두권의 말투가 슬쩍 바뀌자 위사묵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나타났다.
곽두권의 속셈을 눈치챈 것이다.
“곽 당주가 그렇게 말하니, 내가 오늘 장강이 왜 교룡방의 세력인지 확실히 알려 줘야겠군.”
말을 마친 위사묵이 손을 들자 이곳저곳에 누워 있던 자들이 몸을 일으키더니 무기를 뽑아 들었다.
어느 배나 선실조차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자들은 선상에 누워서 강바람과 이슬을 맞으며 자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절반가량이, 사실은 신분을 숨기고 있던 교룡방의 수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수는 오송방의 수를 가볍게 넘길 정도로 많았다.
‘이놈 그냥 여행이 아니었구나?’
여행을 다니며 이렇게 많은 수하를 데리고 다니는 경우는 없었다. 거기다 하나같이 피워 내는 기세가 심상치 않은 게, 교룡방의 정예들이라는 말이었다.
곽두권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수에서 너무 차이가 났기 때문이었다.
“위 소방주께서 이렇게까지 막는다면 물러는 나겠소. 하지만 방주님께서 오늘 일을 아시면 대단히 진노하실 겁니다.”
“그러시든가~”
위사묵의 비웃는 듯한 말에 곽두권은 주먹을 꽉 쥐었지만, 죽을 것을 알면서 불길에 뛰어들 정도의 사명감이나 충성심은 그에게 없었다.
“비켜 주시겠습니까?”
그때 선실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
짜증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던 위사묵은, 악불군과 정통으로 눈을 마주치자 당황한 듯 말을 멈췄다.
그러더니 아주 예의있는 자세로 순순히 옆으로 비켰다.
‘누구기에 이 자식이 이러는 거지?’
곽두권은 위사묵이 순순히 비키자 의아한 듯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그가 아는 위사묵은 자신의 아버지를 믿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강약약강(强弱弱强)의 전형적인 전형인 자였다.
그리고 곧 그의 눈이 커졌다.
‘이놈은……?’
그의 눈에 들어온 악불군의 모습. 그것은 분명 현상 수배 전단에 그려진 용모파기의 모습이었다.
“계속 앞을 막으실 겁니까?”
악불군은 옆으로 비킨 위사묵과 그 수하들 사이를 지나더니 곽두권에게 물었다.
곽두권은 잠시 갈등에 빠졌다.
악불군과 그 뒤에 서 있는 담수련은 그들이 이곳에 온 목적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생포하고 싶었지만, 위사묵이 왜 순순히 옆으로 피했는지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안 비키실 겁니까?”
다시 재촉하는 악불군의 말에 곽두권은 결국 옆으로 비키고 말았다. 위사묵을 강약약강이라며 비웃었지만, 그 역시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게는 강한 비슷한 부류였던 것이다.
악불군의 뒤를 따르던 담수련의 눈이 한곳을 향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현상 수배 전단이었다.
“소군, 저것 좀 주워 봐.”
순간 위사묵과 곽두권의 표정이 아뿔싸! 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미 악불군이 전단을 주운 뒤였다.
주위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하지만 악불군은 전단의 내용을 슬쩍 훑어보더니 그대로 담수련에게 전단을 전했다.
“우리가 이렇게 비쌀 줄은 몰랐네?”
“우리가 아니라 아가씨입니다. 저야 비쌀 이유가 없지요.”
“전단의 내용을 보면 나보다 소군을 더 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담수련도 약간은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전단을 다시 악불군에게 건네며 말했다.
“잘 가지고 있어.”
의연하게 말을 마친 담수련은 자신을 쳐다보는 모두를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