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3화>
63화. 변화하는 사람들(1)
담수련의 눈은 달빛에도 반짝거렸다.
‘저 눈만 봐도 아름다운데, 용모파기에 그려진 얼굴이 사실이라면……?’
경국지색이라는 달기와 서시가 얼마나 아름다울지 모르겠지만, 담수련도 못지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위사묵은 면사를 벗은 담수련의 얼굴을 상상하며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혀로 핥았다.
순간 악불군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몸에서 일어난 기의 변화를 본 것이다.
‘저자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의 변화가 뜻하는 의미는 뭘까?’
위사묵은 악불군이 자신을 묘한 눈빛으로 주시하자 급히 눈을 돌렸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이곳에 모여 있는 이유가, 저희를 잡아서 금자 만 냥을 타기 위해서인가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담수련의 모습에, 위사묵이 급히 답했다.
“저희는 아닙니다. 저는 저들이 소저에게 해를 끼칠 것 같아 막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위사묵의 말에 담수련은 미소를 살짝 짓더니, 이번에는 곽두권에게 물었다.
“그럼 그쪽에서 저를 잡으러 왔나 보네요?”
곽두권은 너무 부드럽게 말하는 담수련을 보며 어떻게 대답을 할지 감을 못 잡았는지,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담수련의 입에서 짤막한 한마디가 터져 나왔다.
“소군.”
“예!”
“우리를 쫓는 자들은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줘.”
“예!”
동시에 악불군의 손에 검이 잡혔다.
* * *
항주에서 혈랑사자를 비롯한 대공의 수하들을 몰아낸 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당연히 대공의 반격이 있을 것으로 짐작했던 잠룡세가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자 오히려 당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보름 동안 교대로 밤을 새며 경계를 서던 수하들의 피로도 역시 증가하고 있었다.
“가주님,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제풀에 지쳐 버릴 거 같습니다.”
문창현의 말에 담무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대공답군.”
“공격이 없을 것을 예상하셨다는 뜻이십니까?”
“내가 그렇게 예상했다면 아마 공격을 했겠지.”
모여 있던 간부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담무룡의 말은 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것을 넘어 대공이란 존재에 대해 공포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대공을 아는 자들은 담무룡의 말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대공이 공언한 일 년이 되는 날이 공격 시점이라는 것입니까?”
국대광의 질문에 담무룡은 문창현을 보며 물었다.
“문 군사의 생각은 어떤가?”
“저 역시 그때 공격은 없을 것으로 봅니다.”
“이유는?”
“지금까지 공격을 하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전 그 이유를 현 천하정세에서 찾고 있습니다.”
“천하정세라……. 계속 말해라.”
“지금 중원 남부에서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는 지역은 절강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잠룡세가 덕이라는 것을 대공도 알고 있을 겁니다. 만약 대공의 공격으로 본가가 무너진다면 절강까지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것은 원나라에서 바라는 일이 아닐 것입니다.”
“군사의 말이 맞다면 한 가닥 희망이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기대 어린 투로 나선 호법 방조위는, 담무룡이 자신을 지그시 주시하자 급히 고개를 숙였다.
“방 호법.”
“예!”
“죽는 것이 두렵나?”
“아, 아닙니다. 제가 순간적으로 실언을 했습니다.”
“우리는 무림인이다. 죽음은 우리의 숙명이다. 난 치욕적으로 사느니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문 군사.”
“예!”
“군사의 분석은 아주 정확하다. 지금 본가를 없애는 건, 원나라 황실에서는 원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대공은 황제의 명까지 우습게 여기는 자다. 그는 천하정세나 명분으로 분석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다. 애초에 자신의 권위를 거역하거나 도전한 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는 자이니까.”
“그렇다면 그가 보름 후 본가를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하십니까?”
“아직은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말을 마친 담무룡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수하들이 수고했다는 사실도 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해라. 그리고 국 당주.”
“예!”
“수하들에게 은자 열 냥씩을 하사해라. 수고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국대광이 허리를 숙이자 담무룡은 그대로 회의장을 나갔다.
그러자 모두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문창현을 쳐다보았다.
“문 군사.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하셨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고숭무가 담무룡이 아무 설명 없이 나가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나 문창현은 답 없이 곤혹스런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간부들이 자신의 말에 설왕설래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밖으로 나온 담무룡은 하늘을 쳐다보았다.
거기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휘영청 달려 있었다.
‘오늘 따라 달이 더 커 보이는군. 수련이가 안전하게 종리화를 만났을까? 악불군, 너만 믿는다.’
중얼거리는 담무룡의 얼굴에는 그답지 않은 외로움이 묻어 있었다.
* * *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을 보는 위사묵의 손은 눈에 띄게 흔들리고 있었다. 떨고 있는 것이다.
곽두권의 무공은 분명 그보다 높았다. 거기다 오송방의 방도들 역시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전멸하는 데 걸린 시간이 겨우 일 각이었다.
‘이,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물론 혈수련이 전멸당한 시간도 대충 일각이었다. 하지만 혈수련이 비록 수적으로 이름을 날린다 해도 오송방의 무인들과 비할 바는 아니었다.
거기다 오송방에는 초일류 고수인 곽두권이 있었고 방도들의 수도 더 많았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전멸시키는 데 걸린 시간이 똑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가 만약 악불군이 익힌 무공이 무황 독고황의 천륜검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해가 됐을 수도 있었다.
“위 공자님.”
사색으로 변해 멍하니 있던 위사묵은, 담수련의 부름에 정신이 든 듯 급히 고개를 돌렸다.
“무, 무슨 일이신지요?”
위사묵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공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희 내리면 소문 좀 내 주세요.”
“뭐라고 내면 될까요?”
“금자 만 냥에 눈이 멀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는 미련한 짓을 하지 말라고요. 보셔서 알겠지만, 저희는 귀찮게 하는 자들을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아요.”
“배에서 내리는 즉시 그렇게 소문내겠습니다.”
“그리고 위 공자님도 괜한 짓하지 마세요.”
“저는 현상금 따위에 흔들리는 놈이 아닙니다. 그 전단을 버린 것을 보면 아시지 않겠습니까?”
“알겠어요, 대신 여기 시체들은 알아서 처리해 주세요.”
“예! 제가 싹 처리해 놓겠습니다.”
귀도방을 이용해 악불군을 제거하고 담수련을 납치할 계획까지 세웠던 자답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바짝 기합이 든 모습을 보이는 위사묵의 행동에 담수련은 고개를 살래살래 젓더니 악불군에게 말했다.
“소군, 들어가자.”
* * *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모두 준비 다 됐겠지?]
장사성의 장호대 대주인 양지운의 전음을 들은 각 조장들은 수하들을 이끌고 중양회라는 커다란 현판이 달린 한 장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미 삼경이 지나가고 있는 시각임에도 장원 안은 대낮처럼 밝았다.
“저거 뭐지?”
“사람 아냐?”
“저기 손에 든 거, 무기잖아?”
중양회의 정문을 지키던 십여 명의 무인들은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를 보자 의아한 듯 살피더니 얼굴이 확 변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두 커다랗게 소리쳤다.
“적이다!”
하지만 양지운의 수하들은 어느새 정문 입구에 도달해 있었다. 그들이 이렇게 대놓고 정문 쪽으로 공격을 한 것은, 다른 조에서 담을 넘어 지휘부를 공격하는 것에 대한 엄호였다.
“회주님, 기습입니다!”
중양회의 내당당주인 왕치성은 급히 회주인 후동욱을 깨웠다.
“기습이라니? 감히 어떤 놈들이 본 회를 기습했다는 것이냐!”
잠시 후 커다란 도를 들고 나타난 후동욱은 사방이 들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웅장한 소리만 들어도 그의 내공이 일갑자에 가깝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범인이 누구인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수하들이 밀린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밀려?”
“예!”
“귀도방이냐, 흑교장이냐?”
귀도방과 흑교장은 지금 악양의 주도권을 놓고 중양회와 교룡방 동맹을 압박 중인 두 세력이었다.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둘 다 아니야? 설마 교룡방은 아니겠지?”
“거기도 아닙니다. 처음 보는 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명, 한 명의 무공이 본회의 무사들보다 강합니다. 더욱이 그중 한 명은 저희로는 도저히 상대가 안 돼 보였습니다.”
“지금 악양에 그런 세력이 어디 있어? 가 보자!”
질책하듯 말한 후동욱은 전투 소리가 난무하는 연무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탕!
하지만 그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뭔가를 느끼고는 급히 도를 내치며 뒤로 물러났다.
“웬 놈이냐!”
후동욱은 자신을 기습한 자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양지운은 날카로운 창끝을 후동욱을 향해 겨누더니 그대로 후동욱을 향해 날아갔다.
탕! 챙! 타타탕!
후동욱은 뜻밖의 강한 위력에 깜짝 놀라 도를 휘둘렀다. 순식간에 오 초를 부딪친 둘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양가창법? 양가의 후예냐?”
“알 것 없다. 네놈은 중원인으로서 원나라의 주구가 되어 일 갑자 가까이 백성들을 괴롭히며 부귀영화를 누려 왔다. 오늘이 네놈들의 악행에 대한 벌을 받는 날이 될 것이다.”
“건방진 놈! 내가 악양의 독두백근도 후동욱이다. 너야말로 오늘 살아서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마라!”
후동욱은 여느 사람들은 들기도 힘든 백 근이나 되는 도를 사용하는 완력으로 인해, 악양을 넘어 호남 전체에서 알아주는 고수였다.
교룡방이나 귀도방보다 세력이 떨어짐에도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그의 무공 덕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해도 더 강한 사람 앞에서는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양지운은 대꾸도 없이 창끝을 다시 후동욱의 얼굴로 향하더니 돌리기 시작했다. 휘어지는 창끝의 소용돌이는 강한 바람을 만들며 후동욱을 향해 날아갔다.
타타타탕!
도와 창이 부딪치는 타격음이 순식간에 이십 번 가까이 터져 나왔다.
무거운 도는 강력한 공격이 장점이었지만 방어에는 취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 탓에 후동욱은 조금 전의 큰소리와는 달리, 현란한 양지운의 창술에 공격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방어하기에 급급하고 있었다.
“윽!”
그때, 후동욱의 입에서 침음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양지운의 창에 어깨를 찔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밀리던 상황에서 어깨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이만 끝내자.”
창을 비틀며 뽑아낸 양지운은 그대로 후동욱의 복부를 향해 창을 찔렀다.
“크윽! 광풍비룡창! 양지운 네가 왜?”
후동욱은 자신의 배에 꽂힌 창이 회전을 하며 자신의 장기를 갈기갈기 찢어 내자 그제야 양지운의 정체를 알아챈 듯 중얼거렸다.
양지운은 무림 백대고수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 고수로서 후동욱은 애초에 그를 이길 수 없었다.
“네놈들의 배신으로 우리 양가장은 멸문을 당했지. 하지만 이제 중원의 복수가 시작될 것이다.”
“나, 나는 양가장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
이미 내장이 다 잘려 회생할 길이 없다는 것을 알 만하건만, 후동욱은 여전히 살고 싶은 듯 변명을 했다.
“이얍!”
그때 옆에 서 있던 왕치성이 양지운이 빈틈을 보였다고 판단하고는 그의 등을 향해 도를 내리쳤다.
“컥!”
하지만 후동욱의 내장을 작살낸 양지운의 창이 어느새 방향을 돌려, 달려드는 왕치성의 심장에 박혀 버렸다.
왕치성을 보지도 않고 제거한 양지운은 후동욱을 보며 말했다.
“철룡세가의 개로 그들의 발바닥을 핥으며 던져 주는 먹이를 넙죽넙죽 받아먹은 것만으로도 죽을 이유는 넘친다.”
“내,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런 식으로 죽을 수는 없…….”
후동욱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처절하게 말을 이어 갔지만 끝을 내지는 못했다.
양지운의 창끝이 후동욱의 목을 그어 버린 것이다.
툭!
양지운은 바닥에 떨어진 후동욱의 머리에 창을 찔렀다.
“이제 첫 발일 뿐이다. 중원인으로서 중원을 배신하고 원나라에 빌붙어 부귀영화를 누리던 자들은 이제 영웅회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것이다.”
양지운은 후동욱의 머리가 달린 창을 공중으로 높게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