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4화>
64화. 변화하는 사람들(2)
“소군, 미안해.”
선방으로 향하던 담수련은 방으로 들어가기 전,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미안하다니요?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소군이 살인을 무척 싫어한다는 거 알아. 근데 나 때문에 계속해서 이런 일이 생길 걸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
악불군은 담수련의 눈에서 깊은 슬픔을 느끼자 다시 마음이 아려 왔다.
“아가씨야말로 곤충 한 마리, 꽃 한 송이까지 생명을 소중히 여기던 분이십니다. 마음이 아프다면 저보다는 아가씨께서 더 하실 것입니다. 제 능력이 부족해 살인이 아니고선 그 상황을 헤쳐 나가지 못하니, 더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 말에 담수련은 악불군의 품에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다시 가슴이 쿵쾅거리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악불군의 눈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나, 그럼 들어가서 잘게.”
“예, 편히 쉬십시오.”
심장 뛰는 소리가 밖까지 들릴 것 같자 담수련은 손으로 가슴을 꽉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악불군은 언제나처럼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며 가볍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 마음이 도대체 뭐지…….’
근래 악불군은 이유 모를 갈등에 고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이제 이유 모를 갈증으로 변해 있었다.
담수련과 가장 가깝게 있으면서도 계속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신이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음에도 계속 걱정이 되었다.
담수련이 눈물을 보이면 가슴이 뭉클했고, 큰 눈망울을 보면 그냥 안타까웠다.
“후우!”
악불군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고개를 들었다.
‘이따위 쓸데없는 생각에 골몰할 시간이 없어.’
악불군은 억지로 오늘 일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뭔가를 잊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오늘 그는 상당히 많은 살인을 했다. 하지만 그는 살인에 대해 더 이상의 고민은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은 터였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니, 그 문제로 더 이상의 자책이나 죄책감을 느껴 봐야 담수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정한 원칙에서 한 가지를 오늘 더해야 했다. 그 전까지 그가 정한 원칙은, 담수련을 해하려는 자들이나 살아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자들만 죽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더하기로 한 원칙은, 담수련이 명을 내리면 죽인다는 것이었다.
‘그래, 아가씨를 위해 내가 지옥에 가야 한다면 가면 돼.’
* * *
위사묵은 어젯밤 있었던 일이 여전히 꿈만 같았다.
물론 교룡방에도 곽두권을 비롯한 오송방의 수하들을 혼자서 처치할 정도의 상당한 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처럼 빠르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가 본 악불군의 무공은 정말 대단하게 느껴졌다.
‘도대체 그놈의 정체가 뭘까?’
“소방주님, 어떻게 할까요?”
위사묵이 갑판 난간에 서서 계속 생각에 잠겨 있자, 수하 한 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악양포구에 도착했습니다. 저희도 여기서 내려야 하는데 계속 가만히 계시니까…….”
“네가 귀도방에 청부할 수 있다고 했지?”
“예, 하지만 현상 수배 전단이 귀도방에도 갔을 텐데 우리 청부를 받기나 하겠습니까?”
“최소한 저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 줄 수 있지.”
위사묵은 악불군을 이용해 귀도방에 피해를 준다는 계획을 그대로 사장시키고 싶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리가 그랬다는 것을 절대 안 들키고 그들에게 전할 방법이 뭐가 있을까?”
중양회와 연합을 한 교룡방은 지금 흑교장과 합세한 귀도방에게 계속 밀리고 있었다. 그가 본 악불군의 무공이면 코에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식으로 귀도방을 제거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악불군이 자신이 그런 계책을 꾸민 것을 알아낸다면 교룡방까지 멸문의 화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뒤는 생각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하던 위사묵이었지만, 이미 악불군에게는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귀도방의 총단에 화살을 쏘면 어떨까요?”
“화살?”
“예, 그럼 우리 짓이라는 것은 누구도 알아내지 못할 것입니다.”
위사묵이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수하 한 명이 급히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마차가 내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늠름한 백설이 끄는 커다란 마차가 배에서 하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런 고수가 마부를 하다니, 저 계집의 정체가 도대체 뭐야?’
위사묵은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처음 말을 건 수하를 보며 말했다.
“네가 가서 수배 전단에 있는 남녀가 지금 악양으로 향하고 있음을 적어, 귀도방에 화살을 쏴라.”
“알겠습니다.”
위사묵은 수하가 사라지자 모두를 보며 말했다.
“우리도 내리자.”
아직까지 담수련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한 그는 결국 일을 벌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잘한 일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배를 내리는 그의 얼굴에는 불안함이 가득했다.
* * *
악양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악양포구는 황강포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컸다.
수많은 배에서 내리는 상인들을 맞으려는 듯 포구의 양옆으로는 이십 개가 넘는 주루가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서는 수백 명은 됨직한 상인들이 좌판을 깔아 놓고 손님들을 부르고 있었다.
[저거 아니야?]
이 층 주루의 창가에 앉아 밖을 유심히 살피던 상인 차림의 노인은 뭔가를 발견한 듯 앞자리에 앉은 노인에게 전음을 날렸다.
[벌써 찾았다고?]
앞에 앉은 노인은 의아한 눈으로 창밖을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다시 말했다.
[맞긴 맞는 것 같은데…… 저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나?]
[뭐가?]
[우리에게 보내 준 정보와 너무 일치하잖아? 도망치는 놈들이라면 수시로 모습을 바꾸는 것이 정상인데, 저렇게 눈에 띄는 모습을 그대로 보인다는 것이 말이 돼?]
[좀 이상하긴 하군. 그러나 자기들이 지금 대공의 추적을 받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저럴 수도 있겠지?]
[아니야. 이렇게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까지 청부가 올 리가 없어. 너무 쉬워.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다. 수하들에게 우선 철수하라고 하자.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부 놈의 무공은 잘해야 일류급이고 주위에 따로 호위하는 놈들도 없는데, 너무 조심하는 거 아냐?]
[십삼 호, 막주님께서는 조심해서 나빠질 일은 절대 없다고 하셨다.]
[그럼 어떡하자고?]
[며칠 따라다니다 보면 기회가 오겠지. 그리고 지금은 저놈들을 감시하는 눈이 너무 많다.]
구 호는 술잔에 담긴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들은 살수들의 전설이라는 백인막의 구 호와 십삼 호였다.
그런데 그의 말마따나, 악불군이 모는 마차를 예의 주시하고 있는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악불군의 등장이 악양에 어떤 바람으로 불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
* * *
“소군.”
“예!”
“추국이 잘 찾아갔을까?”
앞창이 열리며 담수련이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추국은 배가 서자마자 사화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먼저 떠났다.
만약을 대비해 주위를 잘 살펴보라고 악불군이 먼저 보낸 것이다. 추국도 사화에 대한 걱정이 큰 터라,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 나갔다.
“추국은 무공도 무공이지만 상황 판단이 아주 빠릅니다. 무리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그렇겠지?”
악불군의 말에 안심이라도 된 듯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닫았다.
‘사화가 안전하게 돌아와야 하는데…….’
걱정이 되기는 악불군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지금 그를 주시하는 많은 시선을 그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래 계획은 절강을 넘으면 마차는 삼화가 관도를 통해 악양으로 가고, 담수련은 악불군과 추국의 호위하에 은밀하게 황산을 통해 악양으로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요청으로 계획이 전부 변경되면서 그대로 마차를 타고 움직이기로 한 것이다.
‘아무래도 사화를 만나면 마차는 다른 곳으로 움직이게 해야 할 것 같구나…….’
최대한 담수련을 편하게 모시고 싶었지만, 현상 수배까지 된 이상 계속 이렇게 다니는 것은 너무 위험함을 악불군도 느끼고 있었다.
* * *
악양포구에서 악양성으로 들어가는 관도는 악양 시내의 시장과 더불어 가장 바쁜 거리였다.
관도의 좌우로는 좌판을 펼쳐 놓고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물건을 사라며 소리치는 장사꾼 목소리로 귀가 따가울 정도였고 그 사이를 오가는 수많은 봇짐 장사꾼과 행인들로 길은 인산인해였다.
당연히 마차와 우차들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하지만 악불군이나 담수련은 급할 일은 없었다.
사화 걱정에 좌불안석이던 담수련도 오랜만에 보는 사람 사는 광경에 잠시 시름에서 벗어난 듯 창문을 살짝 열고는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그때 마차의 앞을 걷던 행인들이 급히 좌우로 몸을 피하기 시작했다.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앞쪽에서 온몸에 자상이 가득한 십여 명의 장한들이 손에 대감도를 들고는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상인들이 파는 과일을 돈도 안 내고 집어 먹기도 하고, 상인들에게 대감도를 내려칠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다 그들의 눈에 백설의 모습이 보이자, 봉 잡았다는 표정으로 악불군을 향해 다가왔다.
‘쯧! 조용히 지나가기는 어려울 것 같군…….’
조용히 가고 싶었던 악불군은 그들이 다가오자 혀를 찼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불행히도 맞았다.
장한들은 백설의 앞에 도착하자 백설의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눈이 살짝 커졌다. 가까이 보니 백설이 생각보다 더 비싼 명마임이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백설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감싸고 있는 천 역시 대단한 값어치를 가진 물건이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말이 사나우니 함부로 손을 대면 위험합니다.”
장한 중 한 명이 백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악불군이 주의를 주었다.
“하하하! 마부 놈이라 그런지 눈썰미가 형편없구나! 본 영웅께서 이런 말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느냐?”
말을 마친 장한은 그대로 백설의 목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나.
“아이쿠!”
장한은 백설의 머리에 가슴을 정통으로 얻어맞고는 뒤로 데굴데굴 몇 바퀴를 돌았다.
“이놈 봐라. 고작 말새끼가 사람을 치네!”
장한 중 한 명은 동료가 쓰러진 것보다는 시빗거리가 생긴 것이 더 잘됐는지 크게 소리쳤다.
“분명 조심하라고 내가 경고했습니다. 제 말을 무시한 것은 그쪽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다치게 해 놓고 보상도 안 하겠다 이거냐? 이 자식 아주 도둑놈 심보일세?”
장한 중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에 든 대감도로 당장 백설의 목을 자를 듯 위협을 하며 소리쳤다.
“전 조용히 지나가고 싶습니다. 괜한 짓하지 마시고 그냥 가시지요. 더 이상의 경고는 없습니다.”
장한들은 악불군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서로를 쳐다보더니 크게 웃었다.
“경고? 이 자식이 우리가 누군 줄 알고! 네놈이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우리는 악양을 지배하는 흑교장 소속…….”
말하던 장한은 말을 멈추고 눈을 껌뻑껌뻑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을 보더니 곧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어느새 그의 팔이 잘려 있었던 것이었다.
땅에 떨어져 펄떡펄떡 뛰는 팔과 그의 잘려진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수 같은 피는 순식간에 주위를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주위의 물러났던 상인들과 행인들은 다급하게 사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다가 죄 없이 칼침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더 이상의 경고는 없다고 했다. 내가 확실히 주지시켜 주지! 나를 건들지 마라. 건들지만 않으면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건드리면 반드시 죽인다.”
악불군의 눈은 여전히 앞을 막고 있는 장한들을 향했지만, 외침은 주위로 넓게 퍼져 나갔다.
그의 외침은 장한들에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주위를 따르고 있는 자들에게 전한 경고였기 때문이었다.
“흑교장에서 절대 네놈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남은 장한들은 팔을 잘린 자를 부축하더니, 그래도 그냥 도망치기는 그런지 한마디 소리치고는 왔던 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들의 협박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다시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의 눈엔 담수련을 위한 철혈의 의지가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