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66화 (66/472)

<천검지애 66화>

66화. 변화하는 사람들(4)

노인의 말에 여인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보기에는 그냥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은데……?”

여인은 고개를 돌려 다시 한번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얘기하는지 자세히 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악불군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우와~ 날 봤어. 그런데 무슨 남자의 눈이 저래…….’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심장에 손바닥을 댔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두근거림이 그녀의 몸 전체를 붕 뜨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마음에 드냐?”

노인은 여인의 행동이 귀여운지 미소를 지며 물었다.

“전 한 번도 마음에 드는 사람 없었거든요!”

“내가 아는 남자 놈들만도 다섯 명은 넘는데?”

“걔들은 다 친구거든요.”

* * *

“소군.”

“예, 아가씨.”

“뭘 그렇게 경계를 해?”

“대단한 고수가 있습니다. 특히 아가씨 뒤에 있는 노인과 여인은 전음을 사용하지도 않는데 둘의 대화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음파를 막고 있다는 거야?”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음파를 막아 대화가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여간한 고수도 하기 힘든 수법이었다.

“다행이네. 그런데 추국이 나머지 삼화를 만났을까?”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에 즉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에게 거짓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추측으로 얘기해서 그녀가 마음 아파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대답을 하지 않자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최소한 한 명은 돌아오지 못할 거야.”

“아가씨, 아직은 모르는 일입니다.”

“아니야. 요즘 이상하게 머리가 너무 맑아. 그냥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그냥 머릿속에서 스스로 만들어 주고 있는 것 같을 정도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얼굴이 굳었다.

천하 명의 소리를 듣던 잠룡세가의 가의(家醫)인 정환후는 담수련이 각성을 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고 했었다.

오음절맥의 각성이란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뇌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상황을 말했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천재가 된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과도한 뇌의 사용으로 그녀의 음기가 급속도로 고갈된다는 점이었다.

음기 때문에 위험한 오음절맥이었지만, 막상 음기가 적어진다면 더욱 위험해지는 모순된 현상.

‘이 년 안에는 각성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벌써 각성을 한 것인가? 생각보다 시간이 없어. 빙설초건 만년설삼이건 빨리 찾아야겠다.’

정환후는 담수련에게서 각성의 징조가 점점 나타면 약은 단 두 가지밖에 없다고 했었다.

극음의 영초인 빙설초나 극양의 영물인 만년설삼이었다.

빙설초는 병을 고치지는 못하지만 각성한 오음절맥의 부족해진 음기를 보충하여 생명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완치를 하려면 결국 만년설삼이 필요했다.

“아마 아가씨의 짐작이 맞을 것입니다. 다만 전 제 생각이 틀렸기를 바랄 뿐입니다.”

“소군. 만약 누구든 사화를 해친 자가 있다면 난 반드시 복수를 해 줄 거야. 소군이 도와줄 거지?”

“전 아가씨가 원하시는 것은 뭐든지 다 합니다. 아가씨께서 그러시라고 하면 누구든 제가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눈에는 눈물이 살짝 어렸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매우 모진 담무룡은 담수련에게만은 큰 사랑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타고난 효녀였다.

하지만 담무룡과 그녀 사이에는 뭔가 모를 벽이 존재했다. 그녀의 착한 심성과 담무룡의 강한 성정 사이의 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담무룡에게만은 속마음을 터놓지 못했다.

오빠인 담수운은 그녀와 비슷한 생각과 심성을 지니긴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담수운과의 추억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철이 들기 전 담무룡에 의해 태산 종가로 보내졌기 때문이었다.

몇 년에 한 번 보기는 했다. 그 탓에 오라버니에 대한 애틋함은 있었지만, 그녀가 온전히 자신의 고민을 의논할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달랐다. 그는 오빠였고 친구였고 그녀의 보호자였다.

악불군의 눈을 보던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운명……. 그래, 소군은 나의 운명이야.’

그때 악불군이 담수련의 등 뒤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느꼈던 두 명의 고수 중 한 명이 그들을 향해 걸어온 것이다.

담수련 근처 삼 장까지 다가오면 막는다는 그의 철칙은 강호에 나오면서 깨질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거리에서는 몸끼리 부딪칠 정도로 가깝게 걷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주루의 탁자 간격도 반장이 안 되는 상태였다. 그래서 악불군은 담수련에 마차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는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다가오던 중년인은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니, 얼굴 자체가 웃는 얼굴이었다.

‘얼굴이 아주 특이하게 기분이 나쁘군…….’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웃는 얼굴은 상대에게 기분 좋은 감정을 주는 무기였다. 그런데 그 중년인의 웃는 얼굴은 소름이 끼쳤다.

만면에 웃음을 띤 중년인은 악불군이 앉은 탁자를 지나치며 슬쩍 음식을 먹고 있는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음흉한 광채가 살짝 나타났다 사라졌다.

순간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껴진 것이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인가?’

악불군은 계단을 내려가는 중년인을 보며, 그가 이대로 끝내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

중년인이 나가자 노인과 대화를 나누던 여인이 목소리를 죽여 물었다.

“지금 나간 자, 할아버지 때문에 나간 거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웃는 얼굴이 영 기분 나빴는데 계속 우리 쪽을 힐긋 보더라고요. 할아버지께서 동정어옹(洞庭漁翁)이란 것을 아는 것 같았어요.”

주루에 있는 무림인들이 여인의 말을 들었다면 모두 깜짝 놀랐을 것이었다.

동정어옹은 호남 북부에 몇 없는 정파의 원로였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정파인들이 어찰단의 마수에 걸려 죽거나 숨는 암흑의 무림에서 동정어옹은 여전히 자신의 명호를 내걸고 활약할 수 있었다. 협을 위하는 대쪽 같은 성정에 대해 양민들조차 신망을 보낸 데다, 동정어옹이 정치에는 전혀 끼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동정호 주변에서 백 리 이상 벗어난 적이 없었다.

“나를 알기는 하지. 하지만 나를 두려워해서 피하거나 할 자가 아니다. 그리고 혼자 저자를 보게 되면 무조건 피하거라.”

“왜요?”

“저자가 바로 소면음마다.”

여인은 소면음마란 말에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죽여야지요! 천하에 나쁜 놈인데?”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동정어옹의 방음파의 벽은 깨지고 말았다. 그녀가 앉아 있는 정도만 벽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벌한 그녀의 음성에 모두의 시선은 그녀에게 향했다.

동정어옹은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흥분하지 말고 빨리 앉아라.”

여인도 자신의 실수를 알아챈 듯 얼굴을 붉히며 급히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그맣게 물었다.

“할아버지, 그자가 소면음마라는 것을 알면서 그냥 보내시면 어떡해요?”

정의를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정파인에게 음마는 공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내가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리고 저자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도 아직 모르지 않느냐? 내가 만약 너처럼 생각하는 대로 행동했다면 예전에 이미 죽었을 게다.”

노인의 말에 여인은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반박은 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가 어떻게 죽었는지 동정어옹에게 여러 차례 들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도 가자.”

“벌써요? 조금만 더 있다 가요.”

동정호 깊숙한 곳에서 낚시와 무공 수련만으로 시간을 보내는 그녀로서는, 오랜만의 도시 외출을 끝내는 것이 아쉽기만 한 것 같았다.

“곧장 집으로 가지는 않을 거다.”

동정어옹의 말에 여인은 좋은지 발딱 일어섰다. 그러고는 슬쩍 악불군 쪽을 보더니 뭐가 좋은지 미소를 지었다.

악불군과 담수련도 일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 * *

‘종리 단주님께서 우리가 나온 것을 아직 모르고 계셔. 어떡하지?’

만약 악양에서 종리화를 만나지 못할 경우, 삼 일을 기다리다 두 번째 장소로 옮기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마차의 주위를 따르는 자들을 보건대 삼 일이나 악양에서 머무는 것이 올바른 결정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소군.”

“예.”

“악양 근처에 아름다운 곳이 꽤 많다고 들었어. 그래서 꼭 보고 싶었거든. 삼 일을 구경해도 다 못 본다고 했는데, 이번 기회에 다 보고 가자.”

악불군이 고심하는 것을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알맞게 말하는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살짝 놀랐다. 진짜 각성을 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읽히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악양루 쪽으로 천천히 가겠습니다.”

“알았어.”

담수련의 대답을 들은 악불군은 천천히 말을 몰기 시작했다.

악양성의 동문에 도착한 악불군은 검문을 하는 군사들을 보자 혀를 찼다.

장사성이 이끄는 반군들이었다.

“멈춰라.”

악불군의 마차가 도착하자 장수 차림의 군인이 앞을 막으며 소리쳤다.

악불군이 말을 멈추자 가까이 다가온 그는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것이냐?”

“악양루에 갑니다.”

“거긴 왜 가느냐?”

“악양루가 절경이라는 것은 천하에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당연히 구경을 하러 가는 중입니다.”

“마차 안에는 누가 타고 있느냐?”

“제가 모시는 아가씨께서 타고 계십니다.”

“나와 보라고 해라.”

순간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찌푸려졌다.

“아가씨께서는 함부로 외인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악불군의 말에 장수의 눈이 찢어졌다. 빈정이 상한 것이다. 소리를 치려고 하는 그때, 그의 옆으로 경장을 한 젊은 무인이 다가오더니 귓속말을 속삭였다.

말을 듣던 장수는 악불군을 아래위로 한 번 훑어보더니 몸을 비키며 말했다.

“통과!”

악불군이 의아한 표정으로 젊은 무인을 보았지만 전혀 안면이 없는 자였다.

“소군.”

성문을 벗어나자 담수련이 악불군을 불렀다.

“예.”

“그 무인이 무슨 말을 했기에 우리를 그냥 통과시켰을까?”

“저도 그것을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 무사의 행동이 우리를 돕기 위해 한 행동일까? 아니면 우리에게 해를 끼치기 위한 것일까?”

“아가씨 생각은 이유가 뭐일 것 같으십니까?”

“소군이나 나나 천하에 나와서 친분을 가진 사람은 호북사걸밖에 없어. 하지만 악양을 지배하는 장사성의 장수를 설득한 것을 보아 그분들은 아니야. 소군.”

“예.”

“나 모르게 만난 사람이 있어?”

“아가씨 모르게요?”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갑자기 한 명이 생각났다.

“사실은…….”

악불군은 배에서 만났던 사해신개에 대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죄송합니다. 중요한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보고를 안 드렸습니다.”

담수련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소군이 일부러 숨긴 것도 아닌데 뭐. 어쨌든 우리를 돕는 분이 또 생겼다는 의미니까 나쁠 것은 없겠다.”

담수련은 나쁠 것이 없다고 판단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하고는 창문을 닫았다.

‘진 대협 말대로 요즘 사람들이 성 밖은 통행이 거의 없다고 하더니, 여기도 그렇군.’

치안이 무너진 천하는 외진 곳을 홀로 가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도박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위험하게 변해 있었다.

그때 악불군의 검미가 좁아졌다.

십여 명의 무림인들이 길게 늘어서서는 길을 막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내심 태연한 척 그들의 앞으로 말을 몰아갔다.

그때 중앙에 서 있던 자가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만 말하겠다. 순순히 혈도를 짚인다면 고통 없이 일을 끝내 주마. 하지만 저항을 한다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받으며 끌려갈 것이고, 저 마차에 탄 계집도 성한 몸으로 가지 못할 것이다.”

수적으로나 무공으로 우세한 자신들이 강하게 압박한다면 악불군이 쉽게 투항할 것이라고 믿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절대 용서 받지 못할 악불군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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