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7화>
67화. 행로(1)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뜬금없는 악불군의 질문에, 처음 말한 자가 나섰다.
“그러니까 너는 사람이고 우리는 짐승이라는 것이냐? 하하하! 어흥! 그래, 우린 짐승 같은 분들이지. 그러니까 물리기 전에 순순히 내려 와서 무릎을 꿇어라!”
“아가씨, 혹시 모르니 마차의 방어 장치를 준비해 두십시오.”
“알았어.”
탁! 타탁! 탁!
담수련의 대답과 함께 마차에서는 뭔가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백설아, 너도 잠시 편하게 쉬거라.”
악불군은 백설의 목에 걸린 고삐를 풀고는 마부석에서 내렸다.
“네놈이 아직 우리가 누군 줄 모르는 모양인데…… 큭!”
“이익- 쳐라!”
말하던 자가 목이 떨어진 것은 정말 찰나였다. 담무룡은 어차피 피하지 못할 싸움이라면 필히 선수를 치라고 가르쳤다. 특히 상대가 수가 많을 때일수록 기습 공격이 유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악불군은 담무룡의 가르침을 언제나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그와 시비가 붙는 자들이 말을 하다가 순식간에 당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물론 악불군의 검에 상대가 손도 못 쓰고 어이없이 당하는 것은 기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악불군은 지금 자신이 얼마나 빠른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의 발검부터 공격까지는 검의 최고수들이 보아도 감탄할 정도로 쾌검이었다.
“죽이면 안 돼!”
동료가 단숨에 목이 잘리자, 흥분한 동료들이 그대로 악불군을 향해 무기를 내려쳤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자가 크게 소리쳤다. 그 와중에도 생포해야 금자 일만 냥이라는 욕심이 우선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말았다.
악불군에게 달려든 여섯 명이 순식간에 불귀의 객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무공은 절대 약한 편은 아니었다. 거기다 협공에 경험이 많은 듯, 당황한 와중에도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공격목표를 향해 정확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실로 교묘하다고 할 정도로 그들의 무기 사이를 간발의 차이로 피하면서 모조리 제거한 것이다.
몇 초식을 사용했는지 가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외친 자를 비롯해 살아남은 네 명의 장한은, 그제야 왜 고작 두 명을 생포하는 데 그런 엄청난 거금을 준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동료가 죽는 순간에도 돈을 먼저 생각했던 그들이었지만, 막상 자신들이 죽을 것 같자 돈 생각은 멀리 사라져 버렸다.
“도망치자!”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경직된 자세로 멍하니 서 있던 그들은, 악불군이 자신들을 쳐다보자 급히 몸을 돌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악불군은 도망을 치는 자들까지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죽고 싶은 자들은 언제든지 나서십시오. 하나 목숨은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경고는 이게 마지막입니다!”
악불군은 주위에 최소한 이십 명 이상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소리쳤다.
짝! 짝! 짝!
그때 한쪽에서 누군가 손뼉을 치며 나타났다.
“그냥 가시기를 바랐는데 결국 나타나셨군요.”
그는 주루에서 보았던,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를 짓던 노인이었다.
“나도 그냥 가려고 했는데, 평생 찾아 헤매던 계집을 보았으니 도저히 그냥 갈 수가 없더구나.”
“지금 아가씨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 내가 이래봬도 지금까지 건드린 여자가 백 명 가까이 된다. 거기에는 별의별 여자가 다 있었지. 하지만 내 가슴을 진탕하게 만든 계집은 없었지. 그런데 네 아가씨가, 이 나이에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더구나. 그런데 이 소면음마가 그냥 간다면 말이 되겠느냐?”
악불군은 그의 명호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음마라면 절대 좋은 자가 아니란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자신을 스스로 음마라고 하는 것을 보니, 당신도 사람은 아닌 것 같구려.”
악불군은 소면음마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감을 잡자 살기가 몸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꽤 많은 사람을 죽이기는 했지만, 죽이고 싶어서 죽인 자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소면음마만은 죽여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악불군의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소면음마가 더했다. 그의 명호를 듣는 사람의 반응은 딱 두 가지였다.
무서워서 도망을 치거나 무림의 공적인 자신을 죽이기 위해 덤벼드는 것이었다.
“이제 보니 무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초짜로구나!”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던 소면음마는 악불군의 검이 자신의 목 가까이 다가오자 급히 무기를 들어 막았다.
챙!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볼 때는 몰랐는데 진짜 대단한 쾌검이구나. 하지만 오로지 빠른 것만으로는 나를 당할 수는 없다.”
소면음마는 악불군의 선제공격을 가볍게 받아 내고는 곧장 반격에 들어갔다.
‘연 호법보다 강하다.’
악불군은 소면음마의 무공이 연성문보다 강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더욱이 연성문은 악불군을 상당히 얕보며 싸웠지만, 이미 악불군이 싸우는 것을 본 소면음마는 조금도 방심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강호에 나와, 자신의 공격을 이십 초 이상 받아 낸 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물론 놀라기는 소면음마가 더 놀라고 있었다.
그가 자신 있게 모습을 나타낸 것은 악불군의 수법을 완벽하게 파악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초수가 길어지면서 그는 자신이 생각을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악불군이 실전 경험이 대단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빈틈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적은 내공을 빠른 속도로 보완하여 상대가 손을 쓸 새도 없이 공격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또한 음마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직까지 살아 있을 정도로 무공이 강했다.
특히 그의 보법은 실로 신묘해서, 지금까지 그가 살아 있는 이유가 바로 보법 때문이라고 스스로 말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는 자신의 보법이라면 악불군의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빠른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내공이 높은 그에게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의 판단은 상당 부분 맞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악불군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아무리 많이 쳐 줘도 내력이 일 갑자도 안 되는 놈이 어떻게 내 도를 받아칠 수 있는 거지?’
소면음마는 악불군이 작은 검으로 훨씬 무거운 자신의 도를 전혀 밀리지 않고 받아 내자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거기다 그저 빠를 뿐 단순한 검식이라고 생각했던 악불군의 검이 갈수록 현란해지자 점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 그럼 이것도 받아 봐라!”
소면음마는 노기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의 절기인 소리장도삼식을 펼쳤다.
탕탕탕……!
강력한 타격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크윽!”
다시 이십 초쯤 지났을까……
소면음마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의 가슴 부위에서는 급격하게 피가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소면음마는 자신의 도를 들어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도는 명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단단한 무기였다.
그런 그의 도가 악불군의 검에 의해 잘려 나간 것이었다.
검이 도에 잘리는 경우는 꽤 빈번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도가 검에 잘리는 경우는 무림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확실하게 막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도를 잘라내고서 자신의 가슴까지 베고 지나간 상처는 꽤 깊었다.
소면음마는 천천히 다가오는 악불군을 보고서, 더 이상 싸우는 것은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백대고수라는 명예보다는 생명이 더 중요한 자였다. 가차 없이 몸을 돌리며 그대로 땅을 발로 찼다.
“노부는 한번 원한을 맺으면 반드시 갚는다. 내 곧 돌아와, 감히 내 몸에 상처를 낸 네놈을 갈가리 찢어 주겠다.”
공중으로 몸을 날린 소면음마는 도망에 성공했다고 생각했는지 악불군에게 커다랗게 협박을 했다. 하지만 됐다라고 생각한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 수도 있음을 그는 몰랐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수법.
악불군이 천륭검보의 삼십이장의 자세를 펼치며 검을 그를 향해 뻗었다. 그러자 검이 그대로 날아가 소면음마의 가슴을 관통해 버렸다.
공중에서 툭 떨어지는 소면음마를 본 악불군은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검을 뽑아 검집에 넣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백설을 불러 고삐를 맸다.
“아가씨, 이제 출발하겠습니다.”
악불군의 마차가 출발하고 일각쯤 지나 소면음마의 시체 앞에 한 명의 노인과 여인이 나타났다.
동정어옹과 손녀였다.
“할아버지, 저 사람 뭐예요?”
여인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는지 멍한 눈으로 마차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청년인데, 소면음마를 그렇게 제거하다니…….”
동정어옹은 소면음마의 시신을 자세히 살피더니 부러진 도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도가 잘려진 면을 손가락으로 만지던 동정어옹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소면음마의 도는 보통 도보다 더 굵고 넓었다. 절세보검이라 해도 자를 수 있는 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로 깨끗하게 자르려면 최소한 삼 갑자의 내공은 있어야 하는데……?’
악불군이 싸우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동정어옹은, 소면음마가 나타나자 도와 줘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그 역시 소면음마와 같은 분석을 했기 때문에, 소면음마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움을 주려던 그는 다시 손을 내려놓고 말았다. 분명 특별히 신묘하다 할 정도로 대단한 무공을 펼치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자신과 자웅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강한 소면음마가 밀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면음마의 숨통을 끊은 마지막 수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비슷하긴 하지만, 저 나이에 펼친다는 것이 가능할까……?’
“할아버지.”
여인은 동정어옹이 넋이 나간 듯 생각에 잠겨 있자 급히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저기…….”
여인이 가리킨 곳에서는 다섯 명의 무인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죽어 있는 십여 명의 무사들을 보자 서로를 한 번 보더니 동정어옹에게 물었다.
“노인장! 이들이 왜 죽었는지 봤소?”
동정어옹은 그들의 말투가 몹시 무례하자 아무 말 없이 챙이 넓은 낚시 모자를 쓰고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쳤다.
“소령아, 가자.”
“어디로요?”
“집으로 가야지.”
“저 남자는 더 안 쫓아요?”
“더 쫓다가는 우리까지 죽을 수 있겠다.”
“피!”
동정어옹의 손녀인 동방소령은 입술을 내밀었다. 그녀에게 동정어옹은 천하무적이었다. 그런 그가 죽을 수 있다고 하니 믿기 힘들 정도였다.
“이 늙은이가 미쳤나? 지금 내 말이 말 같지 않냐?”
“당신 지금 할아버지에게 욕한 거예요!”
장한의 거친 외침에 동방소령은 몸을 획 돌리더니 쏘아붙였다.
“어린 계집이 감히…….”
“뒤로 물러서라.”
“예, 대형!”
당장 손을 쓸 듯하던 장한은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으며 말하자 급히 뒤로 물러섰다.
대형이란 자는 동정어옹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 아우가 동정어옹 선배님을 몰라 뵙고 큰 결례를 했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네 명은 동정어옹이라는 말을 듣자 얼굴이 변했다. 그들이 함부로 대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과를 하려면 저분이 해야지, 왜 당신이 해요?”
“저희는 일격오살이라고 합니다. 내가 대형이고 지휘자이니, 아우의 실수를 책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격오살이면 자네가 한원영이겠군.”
“말학 후배의 이름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자네도 마차를 쫓는 것인가?”
“보셨습니까?”
“그를 쫓는 이유가 뭔가?”
“개인적인 일입니다.”
한원영은 동정어옹이 모르는 것 같자 슬쩍 답을 돌렸다. 굳이 알려 줘서 경쟁자를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 길을 따라가 보게. 그럼 만날 게야.”
한원영은 다시 포권을 하더니 아우들을 보며 소리쳤다.
“가자!”
“할아버지 일격오살이면 별로 좋은 자들은 아니잖아요?”
“예전 같으면 사파라고 불렸을 자들이지.”
“그런데 그 사람이 간 곳을 알려 주면 어떡해요?”
동방소령이 악불군을 그 사람이라고 칭하자 동정어옹은 약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차피 길은 여기밖에 없다. 그리고 저자들은 그 아이의 적수가 안 된다. 이제 우리도 가자.”
“그래도 위험해지면 어떡해요?”
동방소령은 악불군이 진짜 걱정되는 듯했다.
“걱정 말라니까. 그리고 그 아이와 우리는 또 만날 게다.”
“할아버지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동정어옹은 악불군이 길지 않은 시간에 이름이 천하를 울릴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만약 못 만나면 내가 데려다 주마. 됐지?”
동방소령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뭔가 아쉬운지, 악불군이 사라진 방향을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