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8화>
68화. 행로(2)
“왜 이렇게 늦었어?”
매향을 만난 추국은 너무 걱정을 했는지 눈이 휑해져 있었다.
“미안해, 오다가 산적을 좀 만났어. 아가씨는?”
“아가씨께서는 지금 악 무사님과 천천히 오시고 계실 거야. 흑란은 우리 약속한 주루에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다 온 거네?”
매향의 말에 추국은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연화가 안 왔어.”
“연화가? 그럴 리가 없는데?”
매향은 깜짝 놀라 물었다.
무공은 그들 중에 가장 약한 편이었지만 눈치가 빠르고 상황 판단을 잘해 가장 먼저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둘의 얼굴에는 동시에 불안한 표정이 그려졌다.
“우선 흑란한테 가자.”
추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매향은 자연스럽게 머리를 세 번 긁고는 추국과 함께 약속된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주위에 숨어 있던 잠봉단원들이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 * *
마차를 모는 악불군은 뭔가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소면음마에게 펼친 마지막 수.
특히 검이 스스로 날아가 소면음마의 심장을 뚫어 버린 것은 그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각 장마다 적혀 있는 그 글귀들……. 그거야. 그 글자들이 의미하는 바가 있었어.’
그가 사용한 초식의 그림에 있던 글귀는 비(飛)였다.
그리고 그것은 소면음마를 죽일 때 나타난 검의 행적과 정확히 일치했다.
문제는 어떻게 그런 현상을 만들었는지 스스로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때 그의 머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뜩 지나갔다.
‘기회가 나면 한번 수련을 해 보자. 만약 내 짐작이 맞다면 그 비급의 무공은 정말 엄청난 것이야.’
악불군은 대단한 발견을 했다는 생각에 비급이 들어 있는 품에 손을 한 번 댔다.
그때 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악불군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담수련은 창 안쪽으로 얼굴이 정확히 보이게 앉아 있었다.
“그냥 답답해서 바깥공기 좀 쐬려고.”
“쉴 만한 곳이 나타나면 잠깐 휴식을 취할까요?”
“괜찮아. 그냥 가.”
“예.”
악불군은 하지 않던 행동을 하는 담수련이 약간 의아했지만, 정말 답답해서 그런가 하고는 별생각 없이 다시 무공에 대한 정리를 하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는 뒤통수가 근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길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시지?’
악불군은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이 이렇게 자신을 긴장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이상한 것은, 예전이라면 분명 서슴없이 고개를 돌려 무슨 일이냐고 물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물을 수가 없었다. 아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볼 수가 없었다.
거기다 뜻하지 않게 가슴까지 두근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덕분에 무공에 대한 정리도, 자신을 뒤쫓는 자들에 대한 경계도 쉽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집중력을 상당히 저하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담수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군.”
담수련의 목소리를 들은 악불군은 급히 답했다.
“예, 아가씨.”
“심심하면 내가 옆에 앉아서 얘기라도 해 줄까?”
“예? 그게 무슨?”
“혼자 마부석에 앉아서 오랜 시간 보내야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옆에서 대화라고 해 주겠다는 거야.”
“아닙니다. 마부석은 너무 불편합니다. 아가씨께서 앉을 자리가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거야,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야?’
악불군이 단칼에 거절하자 담수련은 서운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고는 창문을 닫았다.
악불군과 같이 있고 싶어 한참을 머뭇대다 간신히 말을 꺼냈던 담수련으로서는, 단숨에 잘라 버리는 그의 말에 살짝 마음의 상처를 받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위치를 특정하지 못할 정도의 고수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던 악불군은, 그냥 주시만 하고 있어도 집중력이 떨어지게 만드는 담수련이 옆에 앉겠다는 말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화 나셨나?’
악불군은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해 거절을 했건만, 막상 그녀가 즉각 문을 닫아 버리자 오히려 더 집중이 안 되고 있었다.
‘나와서 같이 가자고 해 볼까? 아니야……. 아가씨께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무례야. 휴우~’
마차 안에서 담수련의 움직임이 없자 악불군은 애가 타는지 조그맣게 한숨을 쉬웠다.
* * *
[구 호, 쫓던 놈들이 많이 빠졌는데?]
악불군의 마차를 쫓던 구 호와 십삼 호는, 소면음마가 악불군에게 당한 후 쫓던 자들 상당수가 포기하고 떠난 것을 느끼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라면 쫓아가겠냐? 솔직히 난 이번 임무는 생각을 더 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의문이 들 정도다.]
[조심성이 많은 것까지는 알겠지만, 그렇게 겁을 먹을 정도는 아닌데 너무 노파심이 큰 거 아니냐?]
[저놈, 마지막 수법 봤지?]
[보긴 봤지. 검을 던졌잖아?]
[그래 검을 던졌지……. 그런데 말이다, 난 그게 단순히 검을 던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어. 오히려 어떤 수법으로 보였지.]
[무슨 수법?]
[이기어검(以氣馭劍)!]
[장난하냐? 저 나이에 무슨 이기어검술이야? 거기다 검이 가슴에 박히기는 했지만, 직접 가서 뽑았잖아?]
[그래, 조금 다르기는 하지. 근데 난 분명 검이 날아가는 그 순간을 자세히 봤다. 분명 검을 던진 것이 아니라 손에서 그냥 날아갔다.]
[설마……? 아니야, 네가 잘못 봤을 거야. 이기어검을 하려면 삼 갑자 이상의 내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정설인데, 저 나이에 어떻게 삼 갑자의 내공을 갖냐?]
구 호는 눈썰미가 좋고 직관력이 뛰어나 막주도 상당히 신임하는 자였다. 십삼 호는 부정하듯 말했지만 그의 추측을 무조건 배격할 수도 없었다.
[삼 갑자의 내공은커녕 일 갑자의 내공도 안 되는 것 같아. 그런데 소면음마를 죽였다. 그것도 한 번도 보지 못한 수법으로.]
[그럼 어떡하지?]
[십삼 호, 너는 수하들을 데리고 사 호와 오 호를 기다려라. 나 혼자 추적하면서 저놈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마.]
[혼자 괜찮겠냐?]
[수하들과 같이 다니는 것은 오히려 걸릴 위험이 크다. 그리고 저놈이 그랬잖아. 건드리지 않으면 자기도 건드리지 않는다고. 그냥 추적만 하면 아무 일 없을 게다.]
* * *
“흑교장까지 제거했다고요?”
“예. 이제 교룡방만 남았는데, 그들은 총단이 장강에 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위치를 아직 발견 못해서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말을 몰며 대화는 두 남자.
악양루에서 대화를 하던 청년과 노인이었다.
청년은 고삐도 잡지 않고 느긋한 자세로 섭선을 부쳤지만, 말은 정확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둘의 관계가 무엇이지는 모르지만 노인은 여전히 청년에게 공손했다.
“악양은 잠룡세가부터 철룡세가, 태룡세가 그리고 마룡세가를 몰아내기 위한 전초기지가 될 것입니다. 빨리 악양을 정리하고 무한을 도모해야 합니다. 힘들겠지만 좀 빨리 처리하라고 재촉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드러운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청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커다란 말이 끄는 큰 마차.
“어르신, 저거 설총마 아닙니까?”
청년은 마차를 끄는 말을 보자 눈이 동그랗게 변하며 물었다. 그가 이렇게 놀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저도 본 적이 없어서 확신은 못하겠습니다.”
청년은 말을 멈춘 채, 다가오는 마차를 유심히 살폈다.
악불군은 청년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말을 세우고 말았다.
분명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어 보였다. 그러나 악불군은 그에게서 어떠한 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아니, 그가 앞에 있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이지, 눈을 감고 있다면 그가 있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 같았다.
“소형제, 혹시 이 말이 설총마 아니요?”
청년은 악불군이 자신을 주시하자 미소를 지며 다가가 물었다.
“묻는 이유가 뭡니까?”
악불군은 경계하는 눈으로 짧게 말했다.
“그렇게 경계하지 마시오. 내가 말에 대해 흥미를 가지고 있는데 아직까지 설총마는 본 적이 없었소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설총마와 비슷한 말을 보니 얼마나 반갑겠소이까?”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먼저 밝히고 묻는 것이 예의 아니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청년은 자신의 이마를 살짝 치더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제가 설총마를 보고 너무 흥분해서 큰 결례를 저지른 것 같소이다. 저는 백천학이라 하오. 무명소졸이라 들어 본 적은 없을게요.”
“전 이 마차의 마부인 악불군입니다. 이 말은 설총마 맞습니다.”
“역시! 명마는 확실히 다르구려. 그런데 설총마는 자의식이 강해서 보통 사람은 길들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던데, 마차를 끌게 하다니 대단하시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서로 친구 사이이니 도와주는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백천학은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맞소이다. 비록 동물이라 해도 친구로 대해 줘야 마음을 여는 법이지요. 한번 만져 봐도 되겠소?”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만지시는 것은 상관없지만, 제 말이 성질이 있어서 외인의 손을 무척 싫어합니다.”
백천학은 들어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도 들어 알고 있소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설총마를 만났는데 한번 쓰다듬어 주지도 못하고 간다면 너무 서운할 것 같아서 말이외다.”
백천학은 말에서 내리더니 백설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백설이 백천학의 손을 허용한 것이다.
그때 창문 틈으로 살짝 보고 있던 담수련이 그 소리를 듣다 창문을 열었다.
분명 사단이 나도 사단이 났을 텐데 아무런 소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백설이 처음 본 사람에게 몸을 맡긴 것이 그녀에게는 대단히 놀랄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백설을 보며 흡족한 듯 미소를 짓던 백천학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담수련은 그의 눈을 보자 흠칫했지만 곧 창문을 닫아 버렸다.
‘누구지?’
백천학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인에게 궁금증을 느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을 용기는 없었다.
“정말 훌륭한 말이오. 솔직히 이런 말을 마차를 끄는 데 사용한다는 것이 좀 불만이긴 하지만, 친구끼리 돕는 중이라니 뭐라 하지는 못하겠구려.”
백천학이 말에 올라타며 말하자 악불군이 간결하게 말했다.
“이제 길을 비켜 주시겠습니까?”
“이거 자꾸 결례를 하는구려. 지나가시오.”
백천학은 급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악불군은 목례를 하고는 그의 앞을 지나갔다.
“왜 그러십니까?”
노인은 백천학이 계속 마차를 쳐다보고 있자 의아한 듯 다가가 물었다.
“아! 죄송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가시지요.”
백천학과 악불군 그리고 담수련의 만남.
그들의 첫 만남은 전혀 극적이지도 않았고 특별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그들의 거리는 멀어졌다.
* * *
백천학과 헤어진 후 악불군의 표정은 편치 않았다.
‘세상에 숨은 기인이사가 부지기수라는 말을 들었으면서 자만하다니……. 그래, 아직 많이 부족해. 더 강해져야 해.’
그가 느낀 백천학은 대단히 강했다. 그가 아는 최고의 고수인 담무룡과 싸워도 밀릴 것 같지 않았다.
몇 번의 싸움을 쉽게 처리하면서 이 정도면 담수련을 보호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소군.”
“예, 아가씨!”
백천학을 만난 후 상당히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몰고 있던 악불군은 담수련의 부름을 듣자 급히 답했다.
그녀가 화난 것 같자 마음이 무척 불편했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별로 화난 것 같지 않아서였다.
“백설이 외인의 손길을 허용한 적이 있었나?”
“제가 알기로는 없었습니다.”
“그렇지?”
백설은 잠룡세가에 온 후에도 까칠함을 그대로 보여 줬었다.
매일 사료를 주던 마노나 담수련과 언제나 붙어 지내는 사화조차도 손을 대려고 하면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즉각 나타내곤 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백설은 세가에 들어온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악불군에게 엄청난 훈련을 받았었다.
담수련을 태워야 하기 때문에 적들의 공격이 백설에게 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래서 악불군은 누군가의 공격을 피하고 비상시에는 공격하는 방법까지 가르쳤다. 당연히 처음 본 백천학이기에, 무조건 경각심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그의 손이 몸에 닿는 것을 허용한 것이다. 그것은 백설의 성격을 떠나 악불군의 훈련까지 망각한 행동이었다.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때 아가씨께서 보시던 문헌에서, 설총마는 천하의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습니다. 백천학이란 자가 천하의 영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