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69화>
69화. 백천학
순간 담수련의 얼굴이 확 변했다.
그녀는 대성마장에서 백설을 보고 온 후, 설총마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백설을 최대한 잘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믿기지 않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의 하나가, 설총마는 천하의 영웅이나 경국지색의 미인만을 주인으로 삼는다는 글귀였다.
물론 담수련은 그 얘기를 설총마를 미화하기 위해 살을 붙인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악불군의 말을 듣자 담무룡이 남긴 서찰의 한 구절이 머리에 떠오른 것이었다.
‘아버지께서 악불군이 천하제일의 영웅을 골라 줄 것이라면서, 악불군의 조언을 따라 혼인하라고 적어 놓으셨는데…….’
그런데 생각 없이 말을 꺼냈던 악불군도 당황하고 있었다. 그 역시 담무룡이 그에게 남긴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가주님께서 책임지고 천하제일 영웅과 아가씨가 혼인을 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담수련은 뭔가 심통이 난 듯 입술을 쭉 빼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물었다.
“소군은 그런 거짓말을 믿어?”
“솔직히 저도 안 믿습니다.”
순간 기다렸다는 듯, 악불군이 맞장구를 쳤다.
“내 앞에서는 누구를 보건 천하영웅 같다는 소리는 하지 마, 명령이야. 알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럼, 빨리 가.”
담수련이 악불군에게 스스로 명령이라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너무 억지 같자, 담수련은 창피한 듯 창을 닫아 버렸다.
담수련의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했지만, 역시 다른 남자를 천하영웅이라고 담수련에게 소개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악불군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백설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 *
‘그 여인…… 누굴까?’
악불군과 헤어진 백천학은 이상하게 담수련의 맑은 눈이 잊히지 않았다.
조금만 신경 썼다면 면사를 뚫고 담수련의 얼굴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마차 안이 좀 어두웠고 너무 빨리 문을 닫아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그녀의 얼굴의 윤곽은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백천악의 옆을 따르던 노인은 그가 계속 뭔가를 생각하는 모습을 보았지만, 묻지도 않은 채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그때 백천학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다섯 명의 무인이 빠르게 그들 앞으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다란 말이 몰고 있는 마차를 보았느냐?”
백천학의 앞에 도착한 장한 중 한 명이 커다랗게 물었다.
“그것은 왜 물으시는 겁니까?”
“내가 묻는 말에 답이나 해라!”
그들은 악불군의 현상금을 노린 일격오살이었다.
백천학은 씨익 미소를 지며 섭선을 들어 살짝 부치며 물었다.
“그들과 원한이라도 있습니까?”
“너 귀가 멀었냐?”
“무례가 생활화가 되어 있는 분들이군요? 이 험한 세상에서 다섯 분께서 아직까지 살아 계신 것이 참 용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백천학의 말에 일격오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놈이 정녕 미쳤구나!”
오살 중 한 명이 백천학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백천학이 살짝 살랑인 섭선의 바람에 달려들던 자가 마치 낙엽처럼 그대로 일 장이나 날아간 것이다.
보고 있던 한원영은 고수라는 것을 직감하자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저는 일격오살의 한원영이라고 합니다. 제 아우가 고인을 몰라 뵙고 큰 무례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무례를 저지른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대단히 무례했습니다. 아시겠지만 이런 강호에서는 상대를 잘못 건드리면 거기에 상응한 벌을 받는 법이지요.”
말을 마친 백천학은 섭선을 휙 던졌다. 그러자 섭선은 뱅글뱅글 돌면서 일격오살을 향해 날아갔다.
섭선은 놀랍게도 쇠로 만든 륜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일격오살의 사이를 휙 돌더니 백천학의 손으로 다시 돌아왔다.
백천학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르신, 주위에 이상한 자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우리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까 숨어서 우리를 지나쳐 간 자들도 대여섯 명은 됩니다.”
노인 역시 대단한 고수인지, 오는 동안 악불군을 추격하는 자들에 대해 느끼고 있었던 듯했다.
백천학은 생각에 잠겼다. 이들이 찾는 자가 악불군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왜 그들을 추적하지? 대단한 잠행술을 지닌 자도 있는 것 같았는데…….’
자신과 마주치자 놀란 듯 커다래졌던 호수처럼 맑은 담수련의 눈과 백설을 생각하며, 백천학은 갈등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가서 보호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이만 가셔야지요?”
노인은 백천학의 마음을 아는지 조심스럽게 재촉을 했다.
“예, 가지요.”
고개를 끄덕인 그는 금방 마음을 정리했는지 싹싹하게 답하고는 말을 움직여 앞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일 장 정도 지났을까…….
그제야 오살들의 몸 곳곳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며 그대로 엎어졌다.
* * *
호남성의 지도를 펼쳐 놓고 담수련을 어떻게 빼 낼지를 연구하고 있던 종리화는 천화궁주가 들어오는 모습에 급히 물었다.
“후속 보고 들어온 거 있어?”
“예, 기루에 술 마시러 온 놈들이 수배 전단을 보며 그들을 잡을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을 보았다는 아이가 연락을 보냈어요.”
“수배 전단?”
“현상 수배 전단인데, 포상금이 무려 금자 일만 냥이랍니다.”
“대공, 그자가 아가씨와 소군을 현상 수배까지 했다는 것이냐?”
“확실치는 않은데 용모파기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이 희대의 절색미녀이고 남자 역시 대단한 미남이라고 했어요. 아가씨와 소군이 맞겠죠.”
“그 수배 전단을 구할 수는 없을까?”
“원나라에 부역하던 문파와 무림인들에게만 전해졌다고 하네요. 문제는 그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무림인들까지 들썩이고 있다는 거예요.”
“지금 시기에 금자 일만 냥이라면 세력 판도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큰돈인데 당연하겠지. 하지만 대공이 아가씨를 잡으려고 그 거액까지 포상금을 걸 이유가 없는데?”
지금 원나라 황실 역시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비밀도 아니었다. 그런데 담수련을 잡기 위해 그런 거대 액수를 사용한다는 것도 이해가 안 됐고, 사안 자체가 이렇게 천하에 떠벌릴 일은 더욱 아니었다.
원나라와 잠룡세가가 적대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지면, 대공이나 원나라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돈을 들여서라도 아가씨를 꼭 찾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거 아닐까요?”
“동생, 아가씨를 어떻게든 무사히 이곳으로 모셔 와야 해. 방법을 찾아 봐.”
“우리는 무력이 약해서 들어가서 빼 오고 할 능력은 안 돼요. 그러지 말고 소가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어요?”
“그것은 가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야.”
“그러다 아가씨께서 그놈들에게 잡히거나 안 좋은 일을 당하시면 어쩌시려고요?”
“만약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땐 어쩔 수 없이 도움을 청해야겠지. 동생, 그럼 소군에게 약속 장소를 형산으로 바꾼다는 말이라도 전할 수 없을까?”
“말 한마디 전하는 거라면 어떻게든 한번 해 볼게요. 하지만 장소를 옮긴다 해도 결국 형산까지는 직접 와야 하는데, 만약 수배 전단의 인물이 아가씨와 소군이라면 누구의 도움 없이 거기까지 올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네요.”
천화궁주의 말에 종리화는 다시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직접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경거망동으로 담무룡의 마지막 계획이 무너지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종리화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악불군의 강인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밖에 없었다.
* * *
이유를 알 수 없는 무거운 마음을 달래 가며 말을 몰던 악불군은,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가씨, 오른쪽에 악양루가 보입니다.”
마차 안에서 아무 말 없이 있던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을 듣자 창문을 열었다.
천하인들이 죽기 전에 꼭 가 봐야 하는 열 곳의 장소 중 하나인 악양루를 본 그녀의 표정은 생각 외로 밝지 않았다.
천하제일 영웅이라는 말을 들은 후, 계속 뭔가가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아름답지 않습니까?”
악불군은 그녀의 마음이 편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는 마음을 풀어 주기 위해 흰소리를 했다.
“소군.”
“예.”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말고 가.”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악불군은 그녀가 괜찮지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저러시지? 내가 잘못한 것이라도 있나?’
악불군은 그녀의 행동에 애가 탔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군도 그 서찰을 읽어 봤을 텐데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나를 여자로 안 보는 건가?’
그러나 담수련 역시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예쁘다고 하는데, 악불군만은 자신을 보호하는 상전 이상 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너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거의 매일같이 붙어 있고 서로의 눈만 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자부하는 둘이었지만, 마음의 감정만은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가씨다!]
흑란과 매향은 추국의 전음을 듣자 슬쩍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눈에 익은 백설과 마차를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루의 이 층에서는 이십 명 남짓한 상인 차림의 남자들과 행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매향과 흑란은 서로 모른 사이인 것처럼 따로 앉아 다른 상인들처럼 상품에 대한 얘기를 하며 식사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악불군과 담수련이 이 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주루 안을 한 번 둘러보더니 추국의 자리로 가 앉았다.
“연화가 안 보이는데?”
자리에 앉자 악불군이 물었다. 완벽하게 변장을 하고 있지만 그의 눈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어디에서도 연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해서 매향과 흑란도 많이 걱정하고 있어요.”
추국의 말에 담수련의 눈이 흔들렸다.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진짜 그녀가 나타나지 않자 가슴이 덜컥한 것이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사화나 악불군 같이 가족 같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좀 늦게 올 수도 있겠지 하며 한 가닥 희망의 끝을 놓지 놓으려 했으나, 이미 각성한 그녀의 머리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전부 다 그려지고 있었다.
“지금부터 아가씨와 내가 연화를 기다리겠다. 그리고 연화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가 이곳에서 기다려 줄 수 있는 시간은 삼 일뿐이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작은 그림을 그린 종이를 꺼내 추국에게 보여 주었다.
“이게 뭡니까?”
“누군가 우리를 찾는다면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을 것이다. 추국은 흑란과 매향, 그리고 잠봉단원들을 데리고 대성로에 있는 환희루 근처 백 장 안의 모든 곳을 살펴, 이런 그림이 발견되면 내게 곧장 연락해라. 그림은 모두 숙지한 후에 없애 버려라.”
“알았습니다.”
추국은 그림을 품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각, 이각의 시간 차를 두고 매향과 흑란도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소군, 연화와 잠봉단이 죽었을까?”
“전 그들이 그녀들을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큰 고초를 겪고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그들은 연화에게 우리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우리와 만나기로 한 곳이 어디인지 말하라고 고문할 거야.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삼 일이나 기다리는 것은 미련한 짓이 될 거야.”
고문이란 사람을 피폐하게 만든다. 심지가 굳은 사람이라면 하루는 버틸 수 있어도 삼 일 이상 지나면 견디기 어렵다. 거기다 어찰단의 고문은 그 강도(强度)가 눈 뜨고 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잔인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이곳은 대공의 수하들이 함부로 운신하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차라리 연화가 너무 버티지 말고 이곳을 알려 줬으면 합니다.”
그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에 슬픔이 떠올랐다.
악불군 역시 연화가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만약 연화가 이곳을 말했다면 기회는 있어.”
“말했다 하여 살려 줄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잡기 위한 미끼로 쓸 수 있다고 봐. 잠봉단에 간세가 있다면 내가 연화를 얼마나 아끼는지 잘 알아. 그렇다면 그냥 죽이는 것보다는 나를 유인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할 거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눈이 살짝 커졌다. 그냥 기대감을 담아 말한 것이었지만 대단히 예리한 추측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분명 각성하셨어…….’
중얼거리는 악불군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나타났다.
담수련이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부정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지키고자 하는 악불군의 의지를 한 번 더 담금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