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70화 (70/472)

<천검지애 70화>

70화. 결정(1)

사실 악불군은 요 며칠 동안 그 문제로 계속 고심해 왔었다. 담수련이 죽으면 그도 살아 있을 목적을 잃게 된다.

그래서 악불군은 큰 결단을 내려 계획을 바꾸기로 마음을 먹었다.

담무룡이 원하는 대로 종리화에게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담수련의 소원대로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게 해 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담수련이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도망다니거나 숨어다니는 방식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정면 돌파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담무룡의 당부와 아직 각성을 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기대가 합쳐져 그 실행은 느려지고 있는 와중이었다.

하나…….

“아가씨! 어떤 상황, 어떤 험난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아가씨는 제가 지킵니다. 그자들이 어떤 수작을 벌이던 제게는 안 통할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정말 멋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을 듣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악불군의 머리 주위에 후광이 비치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것은 창가를 비추던 하늘의 해가 우연히 악불군의 머리와 겹쳐지며 생긴 착시 효과였지만, 담수련에게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악불군 역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는 담수련을 보며 그녀의 몸 전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역시 악불군의 뒤에 있는 해가 그녀를 비추며 생긴 착시였다. 물론 악불군에게도 그것은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정말 아름다우시구나…….’

뭔가 홀린 듯 서로를 바라보던 둘은, 문득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담수련은 급히 고개를 숙였고, 악불군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쳐다보았다.

‘너무 빤히 봤나 봐……. 소군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악불군! 감히 아가씨를 그런 눈으로 보다니……. 아가씨께서 얼마나 기분이 나쁘시겠냐, 휴우~’

두 명의 남녀는 분명 중요한 대화 도중이었음에도, 또 쓸데없다면 쓸데없는 걱정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 *

악양루의 삼 층에 오른 구 호는 악불군과 담수련이 멀리 보이는 동정호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뭐야? 자신들이 현상 수배된 것을 알면서도 버젓이 몸을 드러내면서 식사까지 하고, 지금은 아예 관광하는 듯한 저런 행동의 의미가 뭐야?’

구 호는 뒷모습을 보며 둘의 움직임에 대한 의미를 찾으려 노력했다.

“소군, 자연은 참 아름다운 것 같지 않아?”

“예, 정말 아름답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아름다운데 사람들의 생활은 왜 그렇게 힘들까?”

“그래서 인간이겠지요.”

악불군의 답에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이 조심스럽게 다시 말했다.

“나 각성한 거 맞지?”

“예?”

“나 많이 아는 거 알지?”

담수련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모두 알려고 했고, 담무룡은 그녀가 원하는 책은 뭐든 구해다 주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턴 천하지자로 불리는 문창현조차 의문이 생기면 그녀에게 와서 물을 정도였다.

“알고 있습니다.”

“오음절맥에 대해서도 내가 소군보다 더 많이 알아. 지금 내 증상은 뇌가 각성한 거 맞아.”

“아가씨께서 성인식을 하신 지 벌써 일 년이 지났습니다. 보시다시피 신체가 많이 발달하셨으니 뇌 또한 발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냥 발전한 것과는 달라. 지금 내가 원하지 않아도 눈은 주위를 샅샅이 훑어보고 있고,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머리에서 판단을 해. 지금 우리 주위에도 수상한 자들이 여섯 명이나 돼.”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가 성루에 올라 집중해서 감지한 수상한 기운이 네 명이었다. 그런데 무공도 약한 담수련은 단지 주위를 유심히 본 것만으로 자신보다 두 명이나 더 수상한 자를 특정한 것이다.

“…….”

악불군이 답을 못하자 담수련이 처연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의서에 적혀 있기를, 각성을 하면 길어야 삼 년 안에 죽는다고 했어. 그 말은 삼 년 안에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말이야.”

“아가씨! 왜 그렇게 약한 말을 하세요? 제가 있는 이상 아가씨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제가 저승사자라도 죽일 수 있는 무공을 완성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담긴, 그 철저함을 느꼈지만 오히려 담수련은 웃음 지었다.

“미안, 저승사자까지 죽인다고 하니까 갑자기 웃음이 났어. 그리고 나 약하지 않아. 저승사자까지 막을 수 있는 소군이 옆에 있잖아.”

“맞습니다. 전 아가씨가 죽으면 저도 죽습니다. 그러니 절대 그런 생각은 다시 하시면 안 됩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악불군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소군이야말로 그런 생각하지 마! 내가 뭐라고 소군이 죽어!”

‘아가씨는 제 운명이니까요…….’

악불군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일 갑자 이하의 내공이야. 저런 내공으로 그런 강력한 위력을 펼칠 수 있는 무공이 무엇이 있을까?’

둘의 대화하는 모습을 보며 악불군을 자세히 살핀 구 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특급 살수의 조건 중 하나가 상대의 무공을 누구보다 빠르게 간파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판단을 잘못 내리는 살수였다면 이미 특급 살수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악불군의 무공은 소면음마를 죽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자 그는 악불군의 무공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공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천고의 무공.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악불군의 무공을 알아낼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순간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실로 잠깐 딴생각을 했을 뿐인데 악불군과 담수련의 모습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후다닥 성루를 살핀 그는, 그들을 발견할 수 없자 급히 성루 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나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는 말이군. 휴우~ 특급 살수라는 놈이 이 정도의 수법에 넘어가다니…….’

구 호는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 * *

“소가주님! 우리가 쫓는 놈이 악양루 쪽으로 갔다는 보고입니다.”

보고를 들은 자는 눈을 번쩍 뜨며 물었다.

“확실하냐?”

“예, 이미 포상금을 노리는 놈들 여럿이 그쪽으로 갔다고 합니다.”

“금령군주 그 계집은 미친 것도 아니고, 우리에게 연락을 했으면 기다려야지 왜 수배 전단은 만들어가지고 일을 귀찮게 만드는 거야!”

감히 금령군주에게 계집애라고 부르는 그자.

표독해 보이는 인상에 얼굴을 가로지른 자상까지 더 하여 보기만 해도 가슴이 섬뜩할 정도도 살벌하게 보이는 그는 바로 사도비류였다.

수하들도 그 얘기를 듣는 것조차 어려운지 고개를 숙였다.

“당장 쫓는다.”

“단주님께서 지금 악양성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오시면 같이 가시지요?”

“독갈적수가 오려면 아직 한 시진은 더 있어야 한다. 그러다 다른 놈들에게 빼앗길 수 있다. 당장 간다. 한 명은 남아 독갈적수가 오면 우리가 악양루로 갔다고 알려라.”

말을 마친 사도비류는, 가지고 싶은 담수련의 얼굴과 찢어 죽이고 싶은 악불군의 얼굴을 생각하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 * *

“호호호! 여기 오니까, 참 좋다.”

미행자들을 모두 따돌린 악불군과 담수련이 온 곳은 악양루와 동정호 사이에 넓게 형성된 대나무 밭이었다.

높고 긴 대나무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사이를 악불군과 단둘이 산책하면서, 담수련은 조금 전의 심각함은 잊은 듯 행복하게 웃었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악불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행복하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와, 이 대나무는 굵기가 내 몸만 하네?”

담수련은 이렇게 울창한 대나무밭은 처음인지 신기한 듯 커다란 대나무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너무 마르신 겁니다. 이제부터 식사량을 좀 더 늘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늘리면 금방 뚱뚱해질 텐데? 소군은, 내가 뚱뚱한 게 좋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전 아가씨께서 건강하신 것이 좋습니다.”

“어린 시절, 꿈을 꿨어. 하늘에서 내려온 잘생긴 천인이 나를 안아 주며 말했어. 영원히 나를 보호해 줄 거라고. 그 꿈을 꾼 날,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알아?”

“누구를 만나셨습니까?”

“얼굴이 너무 더러워 눈만 보이는 한 소년. 하지만 꿈속에서 본 천인의 눈을 쏙 빼닮은 소년. 그런데 그 소년이 점점 크더니 얼굴까지 그 천인과 똑같아지는 거야. 그래서 난 그 소년이 나를 살려 줄 거라고 믿었어.”

그녀의 말을 듣던 악불군은 그 소년이 누구를 말하는지 즉각 알았다.

“지금은 안 믿으십니까?”

“아니, 믿어. 그 소년을 본 후 지금까지, 난 그 소년을 믿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리고 아마 죽을 때까지 믿을 거야.”

“그 소년도 분명 그 믿음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악불군의 답을 들은 담수련은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는 물었다.

“정말이지?”

“예, 그 소년에게 그 소녀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존재니까요.”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을 듣자 와락 그의 품에 안겼다.

악불군은 당황한 듯 말까지 더듬으며 말했다.

“아, 아가씨…….”

“알아. 그냥 잠시만 이대로 있어. 잠시만…….”

악불군의 허리를 안은 그녀는 얼굴을 악불군의 가슴에 대고는 눈을 감았다.

‘아~ 편하다.’

악불군은 그녀의 몸에 손이 닿을까 봐 양손을 어정쩡하게 들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일각이 지나고 이각이 지났다. 하지만 담수련에게 잠시는 영원과 같았다.

* * *

백천학이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중양회의 총단이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양지운은 백천학과 노인이 들어서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고생이야 양 단주님께서 하셨지요. 저희가 무슨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래, 수고했다.”

노인의 말에, 양지운이 고개를 한 번 더 숙이며 말했다.

“태극검자 어르신께서 같이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만큼 악양을 회주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고 계시다네. 이번에는 반드시 새외 이민족을 몰아내고 중원 무림을 수복하여 정기를 세워야 한다고 할 게야.”

양지운의 입에서 나온 명호를 다른 무림인들이 들었다면 경악했을 것이었다.

지하로 숨으면서 유명무실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정파의 구파일방은 무림인들에게는 상징과도 같았다.

태극검자는 그중 무당파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백대 고수 중 최상위에 있는 열 명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면…….

무림의 최고 배분을 가진 원로 중 한 명에 초절정 고수인 그가 공손히 대하는 백천학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선 안으로 드십시오.”

양지운의 안내를 받아 백천학과 태극검자가 안으로 들어가자, 주위에 허리를 숙이고 있던 무인들은 급히 장원을 둘러싸며 경호에 들어갔다.

악양의 정세가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지고 있었다.

* * *

담수련은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춤을 추듯 돌아가며 대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를, 평소와 달리 악불군은 뒷짐을 진 자세로 천천히 따르고 있었다.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는 미소를 계속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악불군도 상당히 기분이 좋은 듯했다.

편안했지만 감옥 같았던 잠룡세가를 벗어나 처음으로 아름다운 자유를 만끽하는 그들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난은 큰 걱정이 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서로가 함께라면 어떤 고난이든 헤쳐나갈 수 있을 거 같았다.

“소군.”

“예!”

“우리, 유모 만나러 가지 말고 우리 둘이만 어디 숨어서 같이 살까?”

“…….”

앞서 가던 담수련이 갑자기 몸을 돌리며 뜬금없는 말을 하자 악불군은 당황해서 답을 못했다.

“왜, 싫어?”

“싫은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입니다.”

“불가능한 이유가 뭔데?”

“가주님께서는 거지에 불과한 저를 무림인으로 키워 주셨습니다. 더욱이 저를 믿고 아가씨를 보호하라는 임무까지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제가 가주님을 배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이유야? 소군은 아버지보다 내 명령을 먼저 따른다고 했잖아?”

“물론입니다. 제겐 누구의 명보다 아가씨의 명이 일순위입니다. 하지만 아가씨께서 제게 가주님을 배신하라는 명을 내리실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도 알아. 나도 그냥 장난으로 해 본 거야.”

담수련은 실망한 듯 말했지만, 이런 악불군이 더욱 믿음직스러운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막상 담수련의 장난이었다는 말을 들은 악불군의 얼굴에 실망의 기가 보인 것은 눈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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