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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74화 (74/472)

<천검지애 74화>

74화. 도주(1)

“소군!”

“예!”

“지금쯤 우리를 추적하는 자들도 마차가 없어진 것을 눈치챘을 거야. 빨리 악양성 안으로 들어가야 해.”

“백설이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 웬만한 고수보다 빠릅니다. 분명 그들의 추격보다 빨리 성 안으로 진입할 수 있을 겁니다.”

악불군의 말마따나 백설이 달리는 속도는 정말 바람 같았다. 더욱이 악양루에서 악양성까지 이어지는 길은 상당히 넓으면서도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마차가 달리기에는 아주 최적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악불군 일행은 마차의 앞을 막은 한 무리의 무림인과 마주할 수 있었다.

“멈춰라!”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들은 철무정의 명으로 악양루로 달려가던 철력신장 막중혁과 그 수하들이었다.

막중혁은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도 백설과 마차가 금잔화가 보내 온 정보와 일치한다는 것을 한 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아가씨, 철룡세가의 무인들이 앞을 막았습니다.]

악불군의 전음에 담수련 역시 얼굴이 하얘졌다.

죽림으로 백설이 나타나자, 그녀는 최대한 마차로 빨리 달리라고 했다.

그녀의 계산상 백설의 속도라면 마차까지 끌고 가더라도 빨리만 움직인다면 악양성으로 들어가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변수가 나타난 것이다. 그녀로서는 하나의 큰 경험을 한 셈이었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결정을 내렸다.

“소군, 그대로 돌진해. 만약 막는 자가 있다면 죽여!”

그녀의 성격과는 달리 그녀의 머리는 대단히 냉정했고, 그 상황에 가장 적합한 결론을 뽑아냈다.

지금 멈추라고 한다고 멈추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포위할 시간까지 줬다가는 일이 더욱 어려워질 수 있었다.

[알았습니다. 백설아, 걸리적거리는 자가 있으면 말발굽으로 그냥 쳐 버려라. 가자!]

잠시 속도를 늦췄던 백설은 악불군의 전음에,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땅을 강하게 차며 전속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막중혁은 멈출 듯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며 달려들자 급히 소리쳤다.

“놈들을 사로잡아야 한다. 말을 죽여라!”

막중혁의 명에 수하들은 급히 무기를 빼 들고는 달려오는 백설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전과 달리, 천륭검보에 대해 한 단계 더 발전한 악불군의 눈에 그들의 움직임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바로 직전의 사도비류와의 싸움을 통해 성장한 것이었다.

거기다 백설은 악불군과의 대화를 통해 거의 영물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더욱이 백설의 전신과 다리엔 무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천년잠사로 만들어진 방호천이 씌워져 있었다.

“으아악!”

“악!”

타타타탁!

백설의 몸에 무기를 휘둘렀던 자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악불군의 검이 그들의 목을 단숨에 잘라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 뒤에 서 있던 자들은 백설의 말발굽에 사정없이 밟히며 그대로 피떡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마차 옆으로 피했던 자들은 어디선가 날아온 암기에 맞아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푹푹 쓰러져 버렸다.

“이놈!”

가볍게 생각했던 막중혁은 어! 어! 하는 사이에 열 명이 넘는 수하들이 쓰러지자 대노하여 악불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나.

탕!

막중혁은 악불군의 검에 자신이 일 장이 넘게 튕겨 나가자 공중에서 회전하며 착지했다.

“쫓아라!”

막중혁은 자신은 보지도 않고 그대로 달려 나가는 마차의 뒤를 따르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들의 신법으로 평지에서 백설이 끄는 마차를 따라잡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으드득!”

결국 마차를 놓친 막중혁은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는 얼굴을 구기며 가슴을 손으로 잡았다. 고작 한 번의 부딪침에 작은 내상을 입은 것이다. 그런데 마차를 쫓기 위해 내상을 손보지도 않고 뒤를 쫓는 바람에 내상이 더욱 커진 듯했다.

‘단지 무기만 부딪쳤는데 내게 내상을 입혔다는 것은 저놈의 내공이 이 갑자를 상회한다는 말인데, 그게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자신들이 마차를 잡았다 해도 오히려 전멸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단주님, 그런데 마차가 간 방향이 좀 이상합니다.”

막중혁의 옆에 있던 두 대주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무슨 말이냐?”

“이쪽으로 달려가면 악양성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거긴 저들을 쫓는 자들이 여기보다 더 많습니다. 소가주님께서도 성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저 정도 행색이면 소가주님께서도 당장 눈치챌 텐데? 그렇다면 저놈은 도망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냐?”

“제가 보기에도 도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잠시 생각하던 막중혁은 잠시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견딜 만하자 소리쳤다.

“누 대주!”

“예!”

“저놈이 간 방향으로 보아 악양성으로 간 것이 분명하다. 아무래도 먼저 소가주님께 가 봐야겠다. 넌 부상자들과 시신을 처리하고 따라오너라!”

“알겠습니다.”

막중혁이 멀쩡한 몇몇 수하만 이끌고 사라지자, 대주는 부상자와 시신을 처리하기 위해 급히 오던 길을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시신과 부상자를 누군가 본다면 철룡세가로서는 치욕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이미 많은 무사들이 서 있었다.

악불군의 추격에 나선 태룡세가의 허설필과 그 수하들이었다.

“허설필! 여기서 뭐하는 거냐!”

대주는 허설필과 안면이 있는지 다짜고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쳤다.

“이게 누구야? 철마단의 누상추 아닌가?”

수하들이 그들을 막으려 하자 허설필은 손을 들어 막으며 말했다.

“여기 왜 있냐고 물었다!”

“왜 있긴 왜 있어? 마침 지나던 길이라네. 그런데 오룡세가의 일원인 철룡세가의 철마단원들이 이렇게 많이 죽고 부상당한 걸 보았으니, 당연히 도와줘야 하지 않겠나?”

누상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고 많은 자들 중 하필이면 같은 오룡세가에 이런 치욕적인 꼴을 들켰으니, 그로서는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자들이라면 제거해서 입을 막으면 간단했지만, 허설필이 이끄는 태룡무단은 절대 그들의 밑이 아니었다. 심지어 수까지 많았다.

“걱정 마라. 비밀은 지켜 주마.”

허설필은 누상추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한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너희들도 누군가를 쫓고 있던 중인 것 같은데, 가던 길이나 가라.”

“쫓긴 누굴 쫓아? 그냥 가는 길이다. 여하튼 괜히 몰려 있다가 장사성의 군사들이라도 보면 골치 아프니 이만 가 주마.”

‘흥! 이놈들도 지금 담수련이 탄 마차를 쫓고 있는 것이 분명해.’

누상추는 허설필과 수하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더니 비소를 살짝 지며 말했다.

“조심해서 쫓아라. 그래도 아는 처지라 조언해 주는 거다.”

“하하하! 난 누구처럼 수하들 죽이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야.”

허설필은 크게 웃으며 비꼬듯 말하고는 수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자, 시체 치울 사람들이 왔으니 우린 이만 가자!”

‘바보 같은 놈들 꼴을 보니 크게 당한 모양인데, 조언은 무슨 조언! 우리가 자기들 같은 줄 아나?’

허설필은 꼬시다는 듯 다시 미소를 살짝 그리더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네놈들도 가서 된통 당해 봐라! 아마 네놈들은 전멸할 게다.’

누상추는 사라지는 허설필을 살기 띤 눈으로 쳐다보더니 수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뭐하냐! 딴 놈들 또 나타나기 전에 빨리 치워!”

* * *

악양성에 들어선 악불군은 삼화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향했다.

이미 장사성의 반란군이 장악한 악양은 오룡세가와 대공의 수하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는 곳이었다.

“소군.”

“예.”

“저들이 이곳에 들어와 대놓고 행동은 못하겠지만, 변복한 채 암약하고 있을 거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님께 들었던 오룡세가의 관계는, 제룡회를 통한 대공의 지휘로 인해 큰 충돌은 없지만 본래 사이는 매우 안 좋다고 들었어. 마룡세가의 사도 소가주가 나섰고 철룡세가도 왔으니, 그들 간에 분명 우리를 잡기 위한 경쟁이 벌어질 거야.”

“그럼 어쩔까요?”

“아직은 몰라.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뭔가 방법이 떠오를 것 같긴 해.”

“그럼 생각이 나면 말씀 해 주십시오.”

악불군은 담수련이 창을 닫자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자 무공을 아는 거지 차림의 남자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남개방 분이십니까?”

악불군은 중년 거지의 옆으로 가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악양성에는 궁가방의 거지들도 혼재되어 있다고 했다.

남개방과 궁가방은 한 뿌리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서로를 원수 대하듯 하고 있어서, 실수하면 괜한 시비를 벌이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요?”

“남개방에 아는 분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좀 뵙고 싶어서 그럽니다.”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 말해 보시오.”

악불군의 눈이 그의 전신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육관에서 남개방과 궁가방을 구분하는 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그 구분이 너무 모호해서, 보통 사람은 분간이 어렵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 악불군의 눈엔 훤히 보였다.

“어떤 분이 이것을 제게 주시며, 도움이 필요하면 자신을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악불군의 그의 표정과 자세에서 남개방임을 확인하자, 품에서 죽패를 꺼내 보였다.

순간 중년 거지의 표정이 확 변했다.

[제게 동전 한 푼만 주십시오. 그리고 천천히 주위를 구경하시다가 제가 다시 보이면 그때 제 옆으로 슬쩍 지나가십시오. 그때 만나실 장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중년 거지는 급히 전음을 보내고는 머리를 조아리며 두 손을 내밀었다.

“한 푼만 주시면 행로(行路)에 큰 복이 올 것입니다.”

악불군은 그의 달라진 행동에 피식 웃더니, 품에서 동전 한 푼을 꺼내 그의 손에 놓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깊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한 중년 거지는 한쪽으로 걸어갔다.

악불군은 그의 말대로 천천히 마차를 몰면서 삼화와 만나기로 한 장소로 말을 몰았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시길 개방이 천하에서 가장 정보력이 좋다고는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악불군은 선천적으로 누구에게 사정하거나 부탁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더욱이 사해신개는 개인적으로 잘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 다만 그가 그에게 우호적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기에 그에게라도 매달려 볼 생각이었다.

삼화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악불군은 모른 척 주루 주위를 한 번 돌았다.

이미 그를 건드린 자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주시는 하고 있었지만 건드리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과 마차를 주시하는 자들의 기운을 느끼는 악불군의 표정은 상당히 무거웠다.

사도비류와의 결투는 그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컸다.

사도비류는 강하다고 소문은 나 있었지만 그래 봐야 무림에서는 후기지수에 불과했다. 그가 끌고 온 수하들도 마룡세가의 최고 정예는 아닐 것이 분명했다.

비록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철포삼을 익히지 않았다면 죽는 것은 자신이 되었을 확률이 다분했다. 그 생각이 계속 그를 의기소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이 죽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순간 담수련은 모든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만다. 악불군은 그것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검보에 적혀 있는 글자들……. 그것을 익혀 검이 일으키는 변화를 내가 조종할 수 있어야 해. 그것만 되면 웬만한 자들은 모두 막아 낼 수 있을 거야.’

소면음마를 제거했고 사도비류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문제는 검이 일으킨 변화를 그가 주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검보가 가리키는 자세와 글자가 만들어 내는 오묘한 수법을 자신의 뜻대로 언제 어디서라도 펼칠 수 있게 된다면…….

그땐 스스로의 적수가 천하에 많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악불군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주위 주루의 창을 통해 그들을 살피던 자들이 급히 눈을 돌리는 장면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다.

‘큰일이군. 시간이 갈수록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 이대로는 빙설화를 찾는 것은 불가능해…….’

악불군의 얼굴에 갈등의 표정이 짙어지고 있었다.

이제 그도 자신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무공이 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발전 속도라면 담수련의 말대로 정면 돌파도 가능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그를 따라다니는 자들의 수가 점점 많아진다면, 싸움의 승패를 떠나 계속 손에 피를 묻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담수련을 치료하는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고민하던 그때, 누군가의 전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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