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75화>
75화. 도주(2)
[악 무사님!]
생각에 잠겨 있던 악불군은 추국의 전음에 급히 어지러운 생각을 털며 말했다.
[너희들을 미행하는 자들은 없었느냐?]
[현재까지는 저희를 미행하는 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다행이다. 그래 발견한 것은 있고?]
[악 무사님께서 말씀하신 기호나 비문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단주님께서 우리가 나왔음을 아직 모르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가주님께서 걱정하시더니, 정말 최악이 되었구나…….’
이미 악불군도 한 번 훑어본 터였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다시 조사하도록 한 것이었는데, 역시나였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가……?’
악불군은 이제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가주님께서 걱정하시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 이미 악양루 쪽에서는 큰 싸움이 두 번이나 겪었다.]
[큰 싸움이요? 아가씨는 무사하시고요?]
[무사하시다. 생각지도 않은 마룡세가와 철룡세가 모두를 만났다. 이대로는 도저히 그들의 추적을 끊어 낼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삼 호 계획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악불군에게서 삼 호 계획이라는 말을 듣자, 추국은 놀란 듯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듣고 있던 흑란이 대신 물었다.
[악 무사님, 삼 호 계획을 시작하면 아가씨께서 많이 불편하실 텐데요?]
[불편이 생명의 위협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
악불군의 단호한 말에 흑란은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던 같습니다.]
[괜찮다. 그럼 계획대로 흑란은 백설 대신 마차를 끌 말과 내가 탈 말 두 필을 끌고 우리 뒤를 은밀히 따라오고, 추국은 아가씨와 교대할 수 있도록 변복을 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이번 작전으로 추국과 흑란의 위험이 크게 증가할 것이다. 매향이 모든 잠봉단을 이끌고, 그들에게 위험이 생기면 돕도록 한다.]
[예!]
삼화와의 대화를 끝낸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멀리 그가 기다리던 남개방의 거지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 * *
백천학과 태극검자에게 차를 따르고 있던 양지운에게 쪽지 하나가 전해졌다.
“양 단주, 바쁜 일이라도 있나?”
태극검자가 찻잔을 집어 들며 물었다.
“바쁜 일은 아닌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순간 백천학의 표정이 살짝 움직였다. 이상하게 귀가 번뜩한 것이다.
“심상치 않은 일이 뭡니까?”
“마룡세가, 태룡세가 그리고 철룡세가가 모두 악양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세 곳이 모두 말입니까?”
“예!”
“근래 그런 적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악양이 철룡세가의 세력권이었습니다. 다른 세가들이 전혀 간섭하지 않던 곳이지요.”
백천학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태극검자를 보며 물었다.
“어르신, 오룡세가가 각자의 세력권을 넘본 적이 있습니까?”
“빈도가 알기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일 때문에……?”
말하던 백천학의 목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 생각하더니 양지운을 보며 다시 물었다.
“양 단주.”
“예!”
“제가 듣기로 오룡세가와 그들에게 부역하던 자들에게 현상 수배 전단이 뿌려졌다고 하던데, 본 적이 있습니까?”
“증양회에도 그 전단이 있더군요. 그래서 제가 보관해 둔 것이 있습니다.”
양지운은 자신의 책상으로 가더니 곱게 접어놓은 종이 하나를 가지고 왔다.
“공자님, 지금 너무나도 중요한 일들이 사방에 널려 있습니다. 이런 사소한 일에 엮이는 것은 현명한 처사는 아닙니다.”
백천학이 종이를 펼치려고 하자 태극검자가 뭔가 느끼는 것이 있는 듯,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이 일이 어르신 말대로 사소한 일인지 아닌지 정도는 파악해야 한다고 봅니다.”
부드럽고 태연하게 답을 한 후 종이를 펼친 백천학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일견하기에도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담수련의 눈동자. 그에 더해, 그녀의 면사 속에 감춰져 있던 얼굴이 종이에 그려져 있었다.
실물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는 용모파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었다.
“그자는 마차를 몰던 마부 아닙니까?”
태극검자도 용모파기의 남자가 그도 본 악불군이라는 것을 알아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그가 보기에 악불군의 무공은 일류 고수의 중간 정도밖에 안 되는 흔한 호위 무인으로, 이런 현상금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인물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개 마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고받은 것에 의하면 그자가 악양에 오자마자 죽은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닙니다. 특히 소면음마까지 그에게 죽었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아무래도 곧 명호까지 생길 것 같았습니다.”
양지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백천학이 태극검자를 보며 말했다.
“어르신. 금자 일만 냥의 포상금은 너무 거액입니다. 거기다 여기에 적힌 조건을 보면 생포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 둘에게서 뭔가 알아낼 것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아마도 공자님의 추론이 맞을 것입니다.”
“우선 이 둘의 정체를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 이들이 정파인지 사파인지 정도는 알아야, 왜 그들이 쫓기는지를 추측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알아보려면 남개방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사해신개가 필요합니다.”
“사해 어르신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얼만 전까지 호북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노부도 모르고 있습니다. 원체 신출귀몰한 도우라서…… 죄송합니다. 원시천존!”
백천학을 보좌하기 따라 나온 태극검자로서는 도움이 못 되는 것이 정말 미안한지 도호까지 외웠다. 그때 둘의 대화를 듣던 양지운이 다시 끼어들었다.
“사해신개 선배님, 지금 악양에 계십니다.”
* * *
“호법 어르신, 저희가 감시하던 마차의 마부가 호법패를 보이며 어르신을 만나고 싶다고 해서, 우선 취선정으로 데리고 오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악불군의 감시를 맡기고 악양 분타에 돌아와 있던 사해신개는 대물개의 보고에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연락을 했구나.”
사해신개는 악불군이 자신에게 연락을 취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그자를 쫓고 있는 자들이 거의 삼, 사백 명에 달합니다. 도움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면음마를 죽일 정도면 지금 따라 다니는 자들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떼어 놓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렇게 특이한 말과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오히려 광고하듯 행동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한 손으로 두 손을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정도는 알 정도의 머리가 있는 아이였다. 아무래도 다른 이유가 있는 듯싶구나. 그런데 취선정으로 오라고 했다고?”
“예, 취선정은 저희 분타와 가까워서, 본 방의 제자들이 많이 보인다 해도 의심을 받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기에도 가장 용이한 장소라서 그렇게 정했습니다.”
“잘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모습을 보인다면 나를 노리는 궁가방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게다.”
“저도 요 며칠 새 악양에 궁가방의 제자들이 상당수 몰려왔다는 보고를 듣고, 제자들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만약 호법 어르신께서 직접 가시는 것은 껄끄러우시다면, 제가 가서 무슨 일인지 우선 알아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물개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사해신개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 아이의 경계심이 아주 대단하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분타주가 가면 절대 말할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취선정에서 내가 직접 만나는 것 또한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럼 어떻게 할까요?”
“대물개.”
“예.”
“마차가 나타나면 북망산 귀문곡으로 안내해라.”
북망산은 낙양에 위치한 산이었다. 낙양이 수도였던 시절에는 왕가와 귀족들만 시신을 매장하는 곳이었지만, 낙양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시신을 처리할 곳이 없자 북망산에 버리면서 공동묘지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후 북망산은 공동묘지의 대명사가 되어 천하 곳곳에 북망산이 생겼다.
“호법님, 귀문곡은 본 방의 중요한 호남 교두보입니다. 그를 그쪽으로 안내하면 본 방의 비밀 구역이 그대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비밀 구역이야 다시 만들면 된다. 내 말대로 해라.”
“안가까지 포기할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나도 아직은 모르겠다. 다만 무공만으로도 그 아이가 우리 쪽으로 들어온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그 정도입니까?”
“내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그 정도 이상일 게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 먼저 가 있겠다.”
고개를 든 대물개는 사해신개가 이미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감탄한 듯 다시 허리를 숙였다.
바로 앞에 있었는데 사라진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 무공을 지니고 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분이 안 계셨다면 남개방이 궁가방의 압박을 견딜 수 있었을까?’
대물개의 얼굴에는 사해신개에 대한 존경이 가득했다.
* * *
마차의 창문을 살짝 열고 밖을 보는 담수련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가득했다.
비록 가난하지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저 중에는 힘이 없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생활에 짓눌려 살아가는 자체가 지옥인 사람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 그들과 비교하면 그녀는 분명 선택된 사람이었고 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녀는 그들이 부러웠다.
‘스스로 노력해서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들……. 그럼 난 뭘까? 잘 박제된 인형? 아버님이 원하면 세가를 위해 정략결혼을 해야 하고, 지금은 자신이 살기 위해 사람을 죽이라는 명을 너무 쉽게 내리고 있는 못된 여자?’
담수련은 떠올리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나는 지금 자신의 상황이 너무 싫었다.
특히 악불군에게 죽이라는 명을 내리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때, 꼭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가씨.”
그때 악불군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녀는 급히 앞창을 열었다. 언제나 그녀를 안정시켜 주는 사람은 악불군뿐이었다.
“응.”
“아가씨께 건의를 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건의? 뭔데?”
담수련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아가씨께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나 불편한 것은 상관없어.”
“종리 단주님 만나는 것을 얼마간 미루려고 합니다.”
“왜?”
“이유는 지금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담수련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각성한 이후로, 궁금한 게 생기면 곧장 분석에 들어가는 그녀의 뇌였다.
그리고 그녀의 결론은, 악불군의 말을 따르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었다.
악불군을 믿는 마음이 그 어떤 계산보다 컸기 때문이었다.
“그럼 작전 삼 호를 시작할 생각인 거야?”
“예.”
“알았어. 그럼 마차도 사용 못하는 거지?”
담수련은 약간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사실 여인인 그녀가 긴 시간을 움직일 때 생리적인 현상까지 쉽게 처리하려면 마차는 어쩌면 필수였다.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불편하지 않으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악불군은 잠룡세가를 나올 때 몇 가지 가정을 했다.
위험이 없다면 다 같이 움직이는 것이 가장 편하고 안전했다.
하지만 보보(步步)가 위험이라는 것을 아는 데는 시간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사화 중 한 명이 교대로 담수련을 보위하고 나머지 셋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을 쓰려면, 몸은 편하지만 행동에 제약을 주는 마차를 계속 이용해야 했다. 그렇기에 완벽하게 미행을 따돌리기는 불가능했다.
우선 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어야 한다는 단점이 가장 문제였다.
천목산을 넘어올 때도 악불군이 마차를 직접 들고 옮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담수련이 변장을 하고 백설을 타고 움직이는 것이었다.
우선 백설의 속도 때문에 어떤 위험에서도 도망치기가 수월했고, 움직임의 제약이 줄어들기 때문에 동선도 쉽게 고를 수 있고, 급할 때는 숨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여인이기 때문에 가지는 여러 불편함이었는데, 악불군은 최대한 그녀가 불편해지는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았지만 더 이상 버티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 불편한 것은 아무 상관없어. 다만 나 때문에 사화하고 잠봉단이 다칠까 봐, 그게 더 걱정이야.”
“사화 역시 무림인입니다. 다치지 않는다면 더 좋겠지만, 자신이 모시는 분을 위해 죽는다면 그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소군, 사화와 나는 자매처럼 자랐어. 그리고 그 아이들과 나는 어디 하나 다를 것 없는 똑같은 사람이야. 그런데 어찌 나를 위해 그 아이들이 죽는 것이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말할 수 있어?”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사람은 평등하나 지위는 평등하지 않다고요. 지금 저희들의 임무는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이고, 지금 그 임무에 충실한 것뿐입니다.”
악불군의 냉정한 답에 담수련의 표정이 침울해 졌다.
그리고 지금 모두가 힘든 이유가 바로 자신 때문임이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