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77화>
77화. 마수(2)
방금 전까지도 악양을 수복할 계획을 의논하던 철무정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지서웅은 의아했지만 더 이상 토를 달 수는 없었다.
“가자!”
지서웅은 보고하던 수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철무정은 그제야 막중혁을 자세히 보았다.
“막중혁.”
“예!”
“지금 내상을 입었느냐?”
“내상이라기보다는 내기가 살짝 흔들렸을 뿐입니다.”
“그게 그거지. 누구냐? 네게 내상을 입힌 놈이?”
“그 마차를 모는 마부 놈과 일 합을 겨뤘습니다. 그때 조금…….”
순간 철무정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마부가 무공만이 아니라 내공까지 너를 능가했다는 것이냐?”
“저도 그것이 좀 이해가 안 갑니다. 제가 그놈을 공격했을 때, 저보다 내공이 높다는 느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부딪치자 강력한 압력이 무기를 통해 전해졌습니다.”
“담수련의 성인식 때 사도비류의 일 초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던 놈이 일 년 만에 마차를 몰며 빠르게 달려가는 와중에 본가의 정예 십여 명을 사상(死傷)시키고, 너와 단 일 합을 격돌했는데 내상까지 입혔다? 그게 말이 되나?”
모르는 사람들은 기연을 얻으면 순식간에 절정 고수가 된다는 시중에 떠도는 헛소리를 진짜로 믿었다.
하지만 철무정이야말로 남들이 말하는 기연을 어렸을 때부터 열 번 이상은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아버지인 철장표가 무공에 도움이 된다는 귀물(貴物)과 영약이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구해 그에게 먹였기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철무정은 어떤 기연도 건강한 신체와 노력이 없다면 강자로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일 년이라는 시간은 평범한 일류급 고수를 절정 고수로 만들기에는 너무 부족한 시간이었다.
검미를 잔뜩 찌푸리며 생각을 하던 철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금령군주가 갑자기 수배 전단까지 뿌리면서 그놈까지 산 채로 잡아야 한다고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니, 어쩌면 그놈의 무공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런데 그놈은 대공이 쫓고 있다는 것을 모르나?’
의문이 풀리는 듯했지만 또 다른 의문이 이어지고 있었다.
악불군이 너무 눈에 띄게 움직이고 있어서였다.
“소가주님, 그놈의 무공을 미루어 수하들만 보내서 생포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직접 가지 않는 것이 의아하냐?”
“사도 소가주나 태 소가주까지 이곳에 있습니다. 그들이라면 이곳에 따로 정보망이 없다고 해도 담수련이 악양성 안으로 들어왔단 사실을 아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갑자기 담수련이 왜 나왔는지, 그리고 왜 이렇게 사람 눈에 띄는 행동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금령군주가 수배 전단을 뿌린 것도 이상하고……. 그래서 잠시 두고 볼 생각이다. 어차피 내가 안 이상, 그 둘은 아무리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사실 철무정이 계획을 바꾼 것은 금잔화가 악불군과 담수련의 수배 전단을 뿌린 것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들도 모르는 아주 중대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고, 그것을 알 때까지 잠시 두고 보기로 한 것이다.
* * *
대물개가 남긴 비문을 천천히 따라가던 악불군은 주위에 무림인들이 점점 많아지자 흑란에게 전음을 보냈다.
[흑란, 주위에 무림인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따르기에 문제는 없느냐?]
[아직까지는 양민들이 많아서 괜찮습니다. 하지만 계속 이 방향으로 가시면 저희가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하늘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흑란과 추국은 악불군이 말이 없자 괜한 불안감에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교대 시간을 앞당겨야겠다. 내가 저들을 쫓아내면 즉시 아가씨와 교대한다.]
무슨 고심을 했는지 한참 만에 답한 악불군은 말의 속도를 올렸다.
개방의 암호는 정확히 십 장마다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암호가 점점 북망산에 가까워지자 양민들의 통행 역시 점점 줄어들었다.
악불군은 양민들이 거의 사라지자 마차를 멈추었다.
“아가씨,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왜?”
“이대로 움직이면 계획을 시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리하게? 너무 심하게 하지 마.”
담수련은 즉각 악불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는지, 목소리에 염려를 담아 말했다.
“경고를 두 번까지는 하겠습니다.”
경고를 두 번 하겠다는 그의 말은 사실 대단히 무서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세 번까지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수련의 말을 들은 악불군은 마부석에서 내리더니 검을 꺼냈다. 그리고 무거운 목소리로 주위를 향해 소리쳤다.
“그동안 당신들의 무도함을 최대한 참으며 용인해 왔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미행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우리를 일백 장 안까지 추적을 하다 제게 걸리면 죽일 것입니다. 당장 백 장 밖으로 물러서십시오. 일각 후에도 백 장 안에 있는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죽입니다.”
악불군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하지만 누구도 물러나는 자들은 없었다. 명색이 포상금까지 노리고 쫓고 있는 무림인이 목표물의 협박 한마디에 꼬리를 말고 물러선다면, 그것은 스스로 무림인임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일각은 금방 지나갔다.
그동안 악불군은 숨어 있는 자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파악을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경고합니다. 빨리 물러서지 않는다면 이곳이 지옥이 될 것입니다.”
“…….”
두 번째 경고가 떨어졌다. 하지만 어떤 소리도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악불군은 마차의 창을 슬쩍 쳐다보았다. 문을 쪼금 열고 밖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담수련은, 악불군과 눈이 마주치자 안타까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악불군이 커다랗게 외쳤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 물러나십시오. 제 말이 끝나는 순간 더 이상의 자비는 없습니다!”
악불군의 말이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주위는 조용했다.
잠시 더 기다렸던 악불군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천륭검보의 자세를 취하며 검을 손에서 놓았다.
한 번 시전한 적이 있는 비(飛)였다.
비를 시전한 이후, 악불군은 천륭검보에 적혀 있는 글자들과 그림의 자세간의 연관 관계를 계속적으로 연구를 했었다.
그리고 다행히 몇 가지 깨달음도 얻을 수 있었다. 지금 펼치는 것이 그 깨달음 중 하나였다.
휘이잉!
악불군의 손에서 벗어난 검은 한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아악!”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자가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떨어졌다. 한 명의 몸을 단번에 관통한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듯 방향을 바꾸며 나무 사이를 날아다녔다.
그리고 그때마다 비명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몇 명은 검을 쳐 내려고 했고 다른 몇 명은 숨어 있던 곳에서 튀어나오며 피하려고 했지만, 일류급을 거의 벗어난 정도의 무공으로 악불군의 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열 명이 넘는 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땅에 떨어지자 악불군은 자세를 바꿨다. 그러자 검은 빠르게 그에게 날아왔다.
악불군의 주위에 숨어 있는 자들은 아직도 열 명이 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용했다. 아까는 악불군의 경고를 무시한 조용함이었다면, 지금은 눈앞에서 일어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대한 경악의 침묵이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누군가의 공포에 찬 외침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이, 이기어검(以氣馭劍)이다! 도망쳐라!”
그의 외침은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하고 있던 자들에게 신호탄이 되었다.
사방에서 몸을 날려 도망치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진짜 이기어검이라면 그들로서는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망치는 자들을 보는 악불군의 눈에는 갈등의 빛이 잠깐 스쳐 갔다.
그들을 쫓아내는 것에서 끝내느냐, 아니면 경고의 약속을 지키느냐의 갈등이었다. 그리고 그는 약속을 지키기로 결정하고는 다시 검을 날렸다.
휘잉!
‘미안하지만, 내가 무서워지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계속 우리를 노릴 거요.’
악불군은 날카로운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는 검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경고를 지킨다는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면, 다음에 또다시 경고를 한다 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었다.
악불군은 도망치는 자들을 죽이는 것이 마음에 편치는 않았다.
하나 자신의 경고가 허세가 아니라 언제나 사실임을 그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더 많은 살생을 피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악불군의 몸 움직임에 따라 사방을 날아다니며 도망가는 자들을 제거하던 검은, 다섯 명 정도를 죽이고는 다시 돌아왔다.
도망치던 자들은 검이 쫓아오며 그들을 죽이려 하는 모습에, 꼬리에 불이 붙은 말처럼 전력을 다해 달려 오십 장 밖으로 간신히 도망치면서 목숨만은 산 것이다.
그런데 검을 회수한 악불군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얼굴은 창백해졌고, 땀을 전혀 흘리지 않던 그의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검을 날리면서 악불군 역시 대단히 힘이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한 것이 이기어검이라고?’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친 악불군은, 도망치던 자의 외침을 생각하며 검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이기어검에 대해 들어 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펼친 것이 이기어검이라고 전혀 생각도 못했다.
이기어검은 어검술, 심검과 함께 모든 검사들이 목표로 삼는 검의 궁극지도(窮極之道)였다.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그는 그럴 만한 능력도 안 되었고, 그만큼 오랜 수련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검을 검집에 넣은 악불군은 급히 전음을 날렸다.
[추국과 흑란은 빨리 시작해라.]
악불군의 무공을 보고는 자신들이 해야 할 일도 잊은 듯 멍하니 있던 추국과 흑란은, 전음을 듣자 정신이 든 듯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란과 잠봉단은 바쁘게 백설의 고삐를 풀고 자신들이 끌고 온 말을 마차에 달았다.
그동안 추국은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열심히 준비를 하는 동안, 악불군은 눈을 감고는 주위의 기를 탐지하고 있었다.
[악 무사님, 끝났습니다.]
흑란의 전음을 들은 악불군은 눈을 떴다. 마부석에는 체격이 남자같이 큰 잠봉단원이 앉았고, 담수련의 면사를 쓴 추국과 하녀로 변장한 흑란은 마차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백설의 등에는 학사모를 쓰고 얼굴에 수염을 여러 가닥 붙인 담수련이 타고 있었다.
‘남장을 하고 수염까지 붙였는데 여전히 아름답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를 모르겠군.’
악불군은 담수련의 모습을 보자 살짝 미소를 지며 말에 올라타더니 추국에게 말했다.
“추국, 미행하는 자들을 내가 쫓아냈지만 그들은 명을 받고 감시하는 하수들이었다. 만약 진짜 고수들이 나타난다면 너희들의 신변에 큰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나나 아가씨께서는 너희들이 다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이곳을 벗어나는 즉시 어떤 시비도 벌이지 말고 약속 장소까지 그대로 달려라.”
“악 무사님께서는 언제쯤 오십니까?”
“아직 모른다. 만약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너희들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그리고 너희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오히려 안전할 수도 있으니, 위험하면 정체를 드러내는 것도 괜찮다. 그리고 기다리는 동안 종리 단주님께서 비문을 남길 수도 있으니 계속 주시하도록 해라.”
“예! 아가씨와 악 무사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너희들도 무사해야 해.”
마음이 아픈 듯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담수련은, 악불군이 가려고 하자 안타까운 눈빛으로 흑란과 추국을 보며 울먹이는 듯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걱정 마세요.”
추국과 흑란도 안쓰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 시간이 없습니다.”
“알았어.”
악불군과 담수련은 말머리를 돌려 개방의 신호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겠지?”
악불군과 담수련이 사라지자 흑란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했다
“너도 아까 봤잖아? 악 무사님의 무공은 우리와는 차원이 달라. 아가씨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솔직히 난 우리가 더 걱정된다.”
추국의 너스레에 흑란도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의아한 듯 다시 말했다.
“그런데 악 무사님 무공이 너무 빨리 느는 것 같지 않아? 천목산에서 보았을 때도 정말 놀랐는데, 오늘은 그때보다 두 배는 더 강해진 것 같아. 저 나이에 이기어검이라니…….”
감탄성을 터뜨리는 흑란의 말에 추국도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맞아. 거의 가주님과 맞먹는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내보내시면서 우리와 악 무사님만 함께한 이유를 알 것 같아. 솔직히 난 이 정도로 나가면, 나가는 즉시 죽는 거 아닌가 걱정했거든.”
“그럼 가주님께서는 이미 악 무사님의 무공 실력을 알고 계셨다는 거네?”
“아마도……. 우리도 빨리 가자.”
대화를 마친 추국과 흑란은 마차를 타고는 잠봉대원에게 말했다.
“악양성 중심부에 있는 성주부로 가자.”
“예!”
떠나는 그녀들의 뒷모습은 밝았으나,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