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78화>
78화. 사해신개(1)
홀로 태사의에 앉아 있는 담무룡의 얼굴에는 뭔가 일이 안 풀린다는 당황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어디서 잘못된 거지……?’
담무룡은 대공과 사이가 틀어질 경우를 생각해서 많은 준비를 해 놓았다. 잠룡밀과 잠봉밀을 비밀리에 조직해 둔 것은 그의 계획 중 하나일 뿐, 전부가 아니었다.
그런데 계획이 어긋나고 있었다.
담수련의 생일은 며칠 전 지났다. 그가 그동안 보아 온 대공은 한번 기간을 준 이상 그것을 넘길 자가 아니었다.
지난번에 급습을 시도하면서도 대공이 당장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바로 대공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연락망이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포위된 상황에서 정보는 너무 중요했다.
하지만 종리화와의 연결도 끊어졌고, 양호철의 연락도 끊긴 지 육 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중간에 배신자가 있었어……. 내가 만든 정보망을 마치 자신의 손바닥을 보듯 꿰뚫고 있는 자라……. 누굴까?’
의심이 가는 자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적었다. 성질 같아서는 의심 가는 놈들은 다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조직을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의심이 가도 의심할 수 없고,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만약 잠룡세가의 핵심인 그들을 의심만으로 다 제거한다면, 그 자체로 잠룡세가는 반쯤 무너진 것과 다름없었다.
‘이대로 내가 도망을 친다면 잠룡세가에는 희망이 없다.’
담무룡의 손에 잡힌 태사의의 손잡이에서 연기가 올라왔다. 지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갈등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담무룡은 십 년이 넘게 자신과 잠룡세가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만약 대공이 영원히 모르고 지나간다면 그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패가 많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상황을 결국 맞이하게 된 지금, 남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가 담수련과 담수운만 데리고 숨겨 놓은 조직으로 몸을 피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공이 계속 존재한다면 그들은 평생 숨어 지내야 했고, 당연히 잠룡세가의 부활은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지금 우후죽순처럼 퍼지는 반란군에 의해 원나라가 망하고 대공이 물러난다 해도 담무룡은 중원 무림의 원수로 그들의 추적을 받을 것이며, 그 경우 또한 잠룡세가의 부활은 물 건너 간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는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잠룡세가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 대공과 맞붙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원나라의 개로 살 수가 없어 죽음으로 그들과 싸웠다는 명분을 만든 후, 중원 무림과 연계하는 것이었다.
그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중원 무림은 지금 자금과 세력에서 대공에게 많이 밀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꺼려하겠지만, 잠룡세가 전체를 봤을 땐 그를 받아들일 공산이 컸다.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 해도 계속 원나라를 공격하고 대공과 대적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지금 같이 원수로 대하는 것은 누그러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종리화와의 연계는 아주 중요했다. 그녀가 바로 중원 무림의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성모궁의 제자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정보망은 모두 사라졌고 연락망은 깨졌다. 거기다 자신이 강력한 진신 무공을 보이면서 억지로 눌렀던 수하들의 불만이 다시 꿈틀대고 있었다.
“가등우!”
“예!”
담무룡의 부름에 가등우가 나타났다.
“최고 간부 회의를 연다. 모두 불러라.”
“지금 말입니까?”
“그래 지금.”
“존명!”
“오늘 결정을 낸다!”
담무룡은 더 이상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잠룡세가의 실질적인 실세인 일곱 명의 간부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군사 문창현, 내당당주 국대광, 외당당주 역귀혼, 총관 유영필, 그리고 수석호법인 방조위였다.
담무룡이 부른 이유를 짐작이라도 하는 듯, 안으로 들어선 그들의 표정은 상당히 굳어 있었다.
“앉아라.”
담무룡의 말에 모두는 자리에 앉았다.
“항주를 떠날 것이다.”
순간 모두의 시선이 담무룡에게 향했다.
“그게 무슨……?”
문창현이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어떻게든 잠룡세가를 지켜보려고 했다. 하지만 제자도 없이 세가만 보존해 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 안에 그대로 있는 것은 앉아서 자멸하는 지름길이다.”
“가주님, 지금 저들이 항주에서 밀려난 후 항주성 밖의 경계가 엄청 삼엄해졌습니다. 지금 나간다는 뜻은 호구(虎口)로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먼저 문창현이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자 방조위가 말을 이었다.
“제가 가주님과 천하를 횡행한 지도 어느덧 삼십 년이 되어 갑니다. 그리고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싸움까지 이겨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그때는 우리가 밀린다 해도 대공이 뒤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공이 우리의 적입니다. 예전과는 다릅니다.”
담무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방조위, 지금 네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알고 하는 얘기냐?”
“국 당주와 역 당주 빼면 나머지는 모두 대공을 알고 있습니다. 그분과 척을 지는 것은 자살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본좌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냐?”
“가주님, 대공이 아직 이곳을 쳐들어오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는 하나의 기회입니다. 지금이라도 대공에게 사죄하고 그분의 용서를 받으십시오.”
말하던 방조위의 얼굴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담무룡의 몸에서 엄청난 거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네게 이런 배짱은 없지. 누가 너와 동조를 하고 있느냐?”
“가주님, 이것은 동조가 아닙니다. 저는 가주님께서 수십 년에 걸려 이룬 모든 것을 한순간의 판단 실수로 다 잃는 것을 원치 않기에 드리는 고언일 뿐입니다.”
“문창현, 너도 같은 생각이냐?”
“가주님, 전 대공과 가주님을 같이 모셨습니다. 그러나 대공을 모신 것은 겨우 삼 년이었고, 가주님을 모신 것은 삼십 년입니다. 제게 주군은 오로지 가주님뿐입니다. 그런 제가 가주님께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도저히 그들을 이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패배주의를 가지고는 어떤 전쟁도 이기지 못한다고 한 것은 너였다.”
“조금이라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한 것도 저였습니다.”
담무룡은 유영필을 보며 물었다.
“너도 같은 생각이냐?”
“전 가주님의 판단이 맞다고 봅니다. 요 며칠 새에 도망간 수하들이 이십 명이 넘습니다. 그동안 돈도 내려 주는 등,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여러 방법을 썼지만 이제 모두 겁을 먹고 있습니다. 우선 포위망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담무룡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국대광과 역귀혼을 보며 물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저희에게는 아직 삼백 명이 넘는 수하들이 있습니다. 대공이 아니라 원나라 십만 군대가 포위하고 있다 해도 뚫을 수 있습니다.”
역귀혼의 패기가 결연한 목소리에 담무룡은 만족한 듯 명을 내렸다.
“국 당주와 역 당주는 수하들에게 출동 준비시켜라.”
“예!”
국대광과 역귀혼이 나가자 문창현이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담무룡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무슨 의미냐?”
“소신은 가주님을 주군이라고 칭해 왔습니다.”
“알고 있다.”
“여러 사람에게 충성을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주군이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 주군은 제게 그런 분이셨습니다.”
담무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곧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네게 주군이긴 했다는 말이냐?”
“당연합니다.”
“그런데 넌 계속 내 뜻을 거역해 왔다. 주군이라는 의미를 네가 잘 모르는 것 같구나!”
“주군의 명을 죽음으로 그냥 따르는 충성스러운 수하들도 있습니다. 제가 죽어서 주군께 이익이 된다면 저도 당주들하고 같이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다치실 것이 뻔한데, 어찌 명이라고 그대로 따르겠습니까?”
담무룡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문창현을 죽일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주먹을 풀고 말았다.
“그런 놈이 일 년이 넘도록 본가가 이 위기를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에 대해 아무런 방책도 만들지 않았다는 거냐?”
“제 나름대로 방책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주군께서는 제 방책을 모두 배제하셨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주군께서 무슨 복안을 가지고 계신가 많이 고심했습니다.”
“그래서 알아냈느냐?”
“어느 정도 알아냈습니다. 주군! 대공에 대해 저보다 잘 아시지 않으십니까? 주군의 계획대로 될 확률은 이 할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목을 내밀라는 것이냐?”
“지금이라도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화해를 구하십시오. 얼마 전까지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군의 생각이 맞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천하의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용서해 주실 확률이 오 할 가까이 됩니다.”
“살아날 확률이 더 높아졌으니 무장 해제하고 대공의 은혜만 바라라고? 하하하하! 문창현, 넌 내가 그런 치욕적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난 평생을 승부사로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 그 마지막 도박을 할 것이다. 날 따르지 않을 생각이라면 물러서라. 배신만 하지 않는다면 따르지 않는 것은 그냥 넘어가 주겠다.”
말을 마친 담무룡은 문창현의 옆을 스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문창현은 담무룡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큰절을 했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담겨 있었다.
* * *
“소군, 지금 누구 만나러 가는 거야?”
“제게 죽패를 주신 개방의 어르신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개방? 그분을 갑자기 만날 일이 있나?”
담수련의 머리가 순식간에 분석을 했지만, 개방의 제자를 만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개방은 잠룡세가를 싫어하는 무림의 정파였기 때문이었다.
“제가 도움을 청할 일이 좀 있습니다.”
“무슨 도움?”
“개방이 무림에서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정보를 하나 얻으려고 합니다.”
“그들도 지하에 숨어 어찰단을 피하는 상태인데, 지금 상황에서 도움이 될 정보가 있을까?”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마음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고운 아미가 살짝 좁아졌다. 지푸라기를 잡을 정도로 절실한 정보가 무엇인지 감이 안 잡혀서였다.
“나 때문이야?”
“아가씨 때문이라기보다 언젠가 필요하신 것입니다.”
“소군이 다 이유가 있겠지 뭐, 그런데 나 이상해 보이지 않아?”
담수련은 수염이 좀 불편한지 이리저리 만지며 물었다.
이 와중에도 악불군에게 자신의 모습이 못나 보일까 봐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가씨께서 어떤 모습이 되건 제겐 누구보다 아름다운 선녀님이십니다.”
“수염까지 있는 선녀가 어디 있어?”
악불군의 말에 핏! 하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는 뭔지 모를 만족한 미소가 살짝 그려졌다.
“아가씨, 좀 빨리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또 다른 추적자를 느낀 듯 뒤쪽을 한 번 보더니 말했다.
“알았어. 백설아, 가자!”
담수련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백설은 앞발을 공중으로 한 번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튀어 나갔다.
악불군이 탄 말은 백설의 속도를 따를 수 없었다. 하지만 백설은 알맞게 속도를 조절하며 악불군이 따라올 수 있게 해 줬다.
그들이 사라지고 곧이어 삼십여 명의 무인들이 떨어져 내렸다.
“먼지가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을 지난 지 반각도 채 안 된 것 같습니다. 급히 쫓으면 일각 안에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수하 중 한 명이 말발굽이 이어진 길을 잠시 살피고는 말했다.
하지만 지휘자는 쫓으라는 명을 금방 내리지 않고 있었다.
그는 태룡무단의 허설필이었다.
그가 이끄는 태룡무단은 장사성의 감시를 피해 악불군의 동선을 추적하느라 약간 시간을 지체했다. 그리고 늦은 것이 결과적으로 그들에게는 행운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가 문제였다.
그는 달려오는 도중, 도망치는 자들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차를 모는 마부가 이기어검을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하지만 잡아 묻는 자들마다 똑같은 말을 하자 이제 긴가민가하는 생각마저 가지게 되었다.
‘이기어검을 쓴다고 했단 말이야……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간다 해도 그자를 상대할 수가 없을 텐데?’
생각에 잠긴 허설필의 표정은, 악불군의 무위에 어두워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