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81화 (81/472)

<천검지애 81화>

81화. 담무룡(2)

서쪽 담을 넘은 담무룡은 문창현이 알려 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시체가 최소한 서른 구……. 이곳에서 싸움이 있었다는 말인데?’

달리던 그가 우뚝 멈춰 섰다. 오십 명이 넘는 무인들이 그의 앞을 막은 것이다.

“가등우?”

[가주님, 적들이 아직 사방에 있습니다. 전음으로 말하셔야 합니다.]

그에게 전음을 날린 자는 가등우였다.

[네가 지금 왜 여기 있어?]

가등우는 그의 명에 따라 모종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항주 시내로 나갔었기 때문이었다.

[가주님의 명대로 항주의 비밀 세력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가주님 말씀과는 달리 백 명 정도밖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백 명?]

[이미 누군가에 의해 상당수가 당한 듯합니다.]

[내가 너무 자만했어.]

담무룡은 한탄을 하듯 중얼거렸다.

대공이 그와 연락을 끊은 지 이십 년. 그동안 나름 자신의 조직을 완벽하게 장악해 나가며 대공의 그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대공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급히 가주님께 보고를 드리러 오는데, 군사님께서 어떻게 알았는지 저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문창현이 너를 기다렸다고?]

[예.]

[그렇다면 더욱 빨리 들어와 내게 보고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담무룡의 목소리에는 질책이 가득했다.

[저도 그러고 싶었지만 군사님께서 이미 늦었다고 하시면서, 가주님을 피신시킬 마지막 방법이라며 이곳에서 세가 밖으로 나갈 길을 만들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오면서 보인 시체들은 네 작품이냐?]

[군사님께서 이쪽 배치는 제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로 해 놓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송합니다. 벌은 우선 이곳을 피한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네게는 어디로 가라고 하더냐?]

[부명산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그곳에 고 호법님께서 가주님을 배신하지 않은 수하들을 이끌고 기다리실 거라고 했습니다.]

고숭무는 대공의 직계 출신으로, 누구라도 배신을 한다면 가장 먼저 배신할 것으로 생각했을 자였다.

그런 탓에 담무룡에게 대단한 신임을 받고 있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담무룡을 돕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고숭무가 대공이 아닌 나를 선택했다고? 이걸 믿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숭무, 그 이름에 담무룡은 갈등이 되는지 쉽게 결정을 하지 못했다.

“욱!”

“악!”

그때 뒤에 있는 수하들의 비명이 들리자 가등우는 급히 몸을 돌리며 소리쳤다.

[모두는 죽을 각오로 가주님을 보호해야 한다. 주위를 잘 살펴라.]

[예!]

수하들에게 명을 내린 가등우는 다시 담무룡을 보며 말했다.

[가주님, 또 다른 적들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여긴 제가 맡을 것이니, 최대한 빨리 부명산으로 가십시오.]

비장하게 말한 가등우가 몸을 돌리며 수하들에게 전음을 보냈다.

[적들이 나타난 것 같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우리가 살아남을 확률이 뚝뚝 떨어진다. 어떤 놈이건 나타나면 무조건 제거해라.]

가등우의 명에 모두는 무기를 고쳐 잡으며 주위 경계에 들어갔다.

하나 이미 늦은 듯, 가장 외곽을 맡고 있던 서너 명의 수하들이 비명도 없이 그대로 엎어지고 있었다.

“무영대?”

쓰러지는 수하들을 본 담무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공의 친위대인 혈랑무에서 키운 살수 집단이 무영대였다.

그때 한 중년인이 홀로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담무룡은 그의 주위에 최소 삼십 명은 되는 살수들이 은잠술로 숨어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중년인은 담무룡에게 미묘한 미소를 보이며 반갑다는 듯 인사를 했다.

“오랜만입니다. 담 가주님.”

“호류목?”

“하하하! 맞습니다. 혈랑무의 무영대주 호류목입니다. 담 가주님께서 아직까지 저를 기억해 주실지는 몰랐습니다.”

“나야말로, 나를 잡기 위해 무영대까지 출동할 줄은 몰랐군.”

“대공 전하께서 오늘을 넘기지 말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혈랑무가 전부 출동했는데, 제가 운이 좋으려니 가주님을 이렇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군요.”

혈랑무가 전부 출동했다는 말에 담무룡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배신이 없었다 해도 어차피 그가 이기지 못할 싸움이었기 때문이었다.

‘내 생각을 다 읽고 있었다는 말인가……? 결국 난 대공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것이군.’

잠시 망연자실했던 담무룡의 눈에 살기가 나타났다.

“너 따위가 지금 나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말이냐?”

분명 호류목은 대단한 고수였다. 거기다 지금 그를 보좌하기 위해 따라온 무영대원이 삼십 명이었다.

호류목은 아무리 담무룡이지만 그 정도면 최소한 이곳에 원군들이 달려올 때까지 묶어 둘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재수가 좋아 죽이거나 생포한다면 그 또한 대단한 공적이 될 것이었다.

[가주님! 지금 혈랑무가 세가는 물론 항주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이곳은 제게 맡기시고 빨리 부명산으로 가십시오. 곧 적이 몰려 올 것입니다.]

가등우는 담무룡이 싸울 생각이란 것을 느끼자 다급히 전음을 보냈다.

[뒤를 기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위해 이렇게 대단한 부하까지 보내 날 마중했으니 인사 정도는 해 줘야 예의가 아니겠느냐?]

말을 마친 담무룡은 호류목을 향해 자신의 쌍월검을 날렸다.

호류목은 대공이 초원의 전사 출신인 자신보다 중원인인 담무룡을 더 아끼는 것에 대해 상당히 기분이 안 좋았다. 더욱이 담무룡은 건방져서 더욱 싫었다.

그가 담무룡을 제거한다는 말에 신이 나서 달려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름 죽일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물론 그럴 만한 근거는 있었다.

무영대의 말단으로 들어가 대주가 될 때까지 수십 년 동안 그는 이백 명이 넘는 절정 고수와 십여 명이 넘는 초절정 고수들을 죽였다.

하지만 숨어서 상대를 죽이는 살행과 정면으로 붙어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생사결은 차원이 달랐다.

그가 담무룡을 죽이거나 막으려 했다면 처음부터 무영대의 특기를 살리는 방식을 취해야 했다.

담무룡의 손에 잡혀 있던 쌍월검이 맹렬하게 회전하며 자신을 향해 날아오자, 호류목은 깜짝 놀라 보법을 밟았다.

그는 담무룡 같이 자존심이 강한 자가 먼저 공격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담무룡이 무공을 숨기고 있었던 것 같다더니, 이 정도였단 말인가……?’

호류목은 담무룡의 쌍월검을 맞받아치기 어렵다는 것을 느끼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때라도 그는 자신의 특기인 살수 무공으로 싸웠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자존심이 마지막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챙! 채채챙!

방향을 바꿔 다시 날아오는 쌍월검을 피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결국 자신의 무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쌍월검에 깃든 힘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쳐라!”

뒤로 계속 밀리던 호류목은 커다랗게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주위에 숨어 있던 무영대가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며 담무룡을 공격해 들어갔다.

독침과 암기가 선공으로 뿌려졌고, 뒤를 이어 십여 명의 무영대원들이 담무룡의 급소를 겨냥하며 찔러 왔다.

하지만 백전노장인 담무룡에게 살수 무공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으아악!”

“아악!”

독침과 암기는 담무룡의 반탄강기에 가루로 변해 버렸고, 그 뒤를 이은 무영대원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호류목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경악했다. 그가 담무룡을 처음 보았을 때 둘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수십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수련을 했다.

한데…….

‘너와 내가 이렇게 큰 차이가 있었기에 대공 전하께서 차별을 하신 것이었던가?’

호류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디어 그 거만한 얼굴에 공포를 심어 준 후 머리를 잘라 버릴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당하게 생긴 것이었다.

“호류목! 네놈이 나를 무척이나 부러워하고 질투했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아느냐? 네놈은 그래 봐야 일개 살수에 불과하다는 거다. 감히 살수 따위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가 실수다.”

“이놈! 죽어라!”

담무룡의 비아냥에 분노를 참지 못한 호류목은 전력을 끌어올리며 담무룡에게 달려들었다. 그를 노리는 쌍월검에 대한 수비조차 포기하고, 오로지 담무룡을 죽이기 위한 그의 최후의 절초였다.

하지만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실수였다.

동귀어진은 비슷하거나 약간 모자란 정도의 실력에게는 통하지만, 두 수 이상 차이가 나는 고수에게는 오히려 방어의 허술함으로 인하여 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뿐이니까.

“크아악-”

“미련한 놈! 그 정도의 격장지계도 견디지 못하는 놈이 무슨 동귀어진을 한다고?”

호류목의 검을 옆구리 사이로 흘린 담무룡은 자신의 비혈조를 호류목의 복부에 박아 넣었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마지막까지 호류목의 자존심을 짓뭉개더니, 비혈조를 위로 들어 올렸다.

호류목을 완전히 갈라 버린 담무룡은 쌍월검을 회수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살아남은 무영대원 십여 명이 가등우가 끌고 온 수하들과 싸우고 있었다.

[가주님, 빨리 가셔야 합니다.]

그들이 떠나면 지금 싸우고 있는 수하들은 그냥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담무룡과 가등우는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국대광과 방조위가 수하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동쪽으로 달려간 그들은 계속 외침만 들리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제야 속은 것을 알고는 급히 사방을 뒤지다 호류목의 비명을 듣고는 달려온 것이다.

무영대와 싸우고 있던 가등우의 수하들은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듯, 가등우와 담무룡이 사라진 방향 쪽으로 죽 서더니 방어태세를 갖췄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서였다.

“저놈들은 또 뭐야?”

검미를 찌푸리고는 호류목의 시체를 슬쩍 주시했던 국대광은 그들의 앞을 막고 있는 자들을 보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몇 명은 그도 알고 있는 항주성에서 제법 힘깨나 쓴다는 왈패들이었다.

자주 소란을 핀다는 말은 들었지만 삼류급의 무공을 지니고 있을 뿐이었다. 담무룡도 치안을 어지럽히는 놈들이 있어야 잠룡세가에 고마움을 느낀다며 그냥 놔두라고 했기에 신경도 안 썼는데, 이제야 그런 이유를 안 것이다.

“삼류가 아니라 모두 일류급의 무공을 지니고 있었군. 국 당주.”

“예.”

“역시 가주님이야. 이미 이런 상황까지 염두에 두었던 모양이군.”

“대공만 아니었다면 정말 적으로 삼기에는 너무 무서운 분이시지요. 모두 죽여라!”

대답한 국대광이, 그대로 수하들에게 공격 명령을 내렸다.

* * *

개방의 암호를 따라 북망산까지 들어선 악불군은 도착한 곳이 절벽이자 의아한 듯 주위를 살폈다.

[좌로 다섯 걸음을 가셨다가 오른쪽으로 열 걸음을 오십시오.]

그때, 그의 귀에 전음이 들려왔다.

“아가씨, 전음이 들려왔습니다. 저를 바짝 따라오십시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음이 시킨 대로 움직인 그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무것도 안 보이던 절벽 사이로 말 한 마리가 지날 정도로 좁은 길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 길은 지금 악불군이 서 있는 장소에서만 볼 수 있도록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모르고 왔다면 누구나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은 곳인데요?”

“그러게, 책에서나 읽었던 천연진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

“천연진이요?”

“진법책에 적혀 있기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진을 천연진이라고 한대. 당연히 자연이 만든 주위 전체가 진을 이루기 때문에, 인간이 만든 진은 위력 면에서 상대가 안 된다고 했어.”

“그래요? 제가 보기에는 아가씨께서 펼치시는 그 안 보이게 하는 진이 더 신묘한 것 같은데?”

“그 진은 몽환진도진(夢幻顚倒陣)의 일부분을 조금 변형해서 만든 거로, 잠시 눈을 속이는 것에 불과해. 천연진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거야.”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계곡의 입구만 조금 안 보인다는 것 빼면 크게 위험해 보이지는 않아서 말입니다.”

“자연이 만든 진이 사람에게 위험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하지만 인위적인 변경이 들어가면 대단히 위험한 진을 만들 수 있어.”

“그랬군요? 역시 아가씨는 대단하십니다. 제가 배우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담수련과의 대화는 어떤 주제나 모두 악불군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담수련 역시 악불군과의 대화가 언제나 좋았다.

아무리 가벼운 주제라도 서로가 진심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대화를 나누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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