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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82화 (82/472)

<천검지애 82화>

82화. 남개방

절벽 사이로 이어진 길은 무려 삼십 장이나 이어졌다. 그리고 상당히 커다란 분지가 나타났다.

“어서 오십시오. 말에서 내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따라오십시오. 호법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분지 안에 들어서자 대물개가 나타나더니 그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주위를 본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의 비밀 요새인지, 최소 백 명은 넘어 보이는 청년들이 웃통을 벗고 무공 수련을 하고 있었다.

청년들은 상당히 혹독한 교육을 받은 듯, 외인이 들어왔음에도 눈길 하나 보내지 않고 수련에만 열중이었다.

“안에 계십니다.”

대물개가 안내한 곳에는 거적으로 사방을 감싼 말 그대로 거지집 앞이었다.

“저희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죄송하지만 어르신께 나와 주십사 청한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대물개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까마득한 후배가 선배에게 나오라는 것은 무림인들에게는 대단한 무례이기 때문이었다.

“소협께서는 강호의 예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모양입니다. 무림에서는 배분을 아주 중요시하며, 후배가 존장에게 나오라고 하는 것은 커다란 결례에 해당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겐 예의보다 아가씨의 안전이 더 중요합니다. 어르신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밀폐된 공간에 아가씨를 모시고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거적때기로 두른 곳이 뭐가 밀폐된 공간이겠소이까?”

“대협께서는 무림의 음모와 함정에 대해 당해 보시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어떤 분이 제게 그러셨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진짜는 아니다.’라고 말입니다.”

“됐다! 네게 예의 바라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배 안에서 알았다.”

이미 둘의 대화를 다 들었는지 사해신개가 투덜거리며 나왔다.

“귀찮게 해서 죄송합니다. 어르신.”

“넌 가 봐라.”

사해신개는 악불군의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하고는 대물개를 보며 말했다.

“호법님!”

대물개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반문했지만 사해신개는 손사래를 치며 다시 말했다.

“가 보라고 했다.”

“……예!”

사해신개의 명에 대물개는 불안한 표정으로 악불군을 슬쩍 보고는 뒤로 삼십여 장 물러났다.

“헤어진 지 며칠도 안 됐는데 벌써 도움을 청하러 올 줄은 몰랐구나. 그래 무슨 도움이 필요하냐?”

사해신개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 전음으로 대화를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악불군은 그녀에게 절대 비밀을 만들지 않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으면 안 되는 말이야?”

“들으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잠시 몰랐으면 합니다.”

담수련은 입술을 살짝 내밀고는 뭔가 생각하더니 반문했다.

“좀이 얼만데?”

“제가 아가씨께서 아셔도 되겠다 싶을 때입니다.”

“뭐야, 그게? 그럼 영원히 모를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언제든지 아가씨께서 궁금하시면 제게 말해 달라고 하십시오. 그럼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하면 언제든지 알려 주겠다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그녀는 악불군이 스스로 알려 주기 전에 자신이 먼저 말해 달라고 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악불군은 수하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둘의 대화를 듣던 사해신개는 담수련의 얼굴을 자세히 주시했다.

얼굴과 턱에 수염을 붙여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었지만, 눈과 코의 모양으로 미루어 사방에 퍼져 있는 수배 전단에 있는 여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중요한 여인인가 보구나. 그런데 호위하는 사이치고는 솔직히 너무 돈독한 것 같다?]

[호위하는 무인으로서 돈독이 어디 있겠습니까?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할 뿐이지요.]

[최선을 다해 임무라……. 그런데 왜 내 눈에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일까?]

천하의 모든 풍파를 직접 몸으로 경험한 그답게, 악불군과 담수련 사이에 흐르는 애틋한 뭔가를 즉각 느끼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연애를 해 본 적이 없는 탓에 그 뭔가가 무엇인지까지는 알아챌 수 없었다.

[부탁을 말해도 될까요?]

‘요놈한테 정보 캐기는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울 것 같군.’

사해신개의 말에 대답 없이 사무적으로 말하는 악불군을 보며 사해신개는 머리를 살래살래 흔들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 말해 봐라.]

[어르신, 개방이 천하에서 가장 방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까?]

[예전에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서, 중요한 정보는 대부분 궁가방에서 가지고 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거의 잡동사니 수준이지. 그래 뭘 알고 싶은 거냐?]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결심한 듯 물었다.

[약초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약초? 그 정도야 알아봐 줄 수 있지. 무슨 약초가 필요하냐?]

[빙설초와 만년설삼입니다.]

[뭐, 뭐라고? 설마 지금 빙설초와 만년설삼이라고 한 것은 아니지?]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너 혹시 깊은 숲속에서 혼자 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거냐?]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세상물정을 몰라? 빙설초는 구하기도 힘들지만, 음공(陰功)을 익히는 무림 여인들에게는 세상의 어떤 기이영초보다 더 보물로 여겨지는 약초다.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빙설초가 없다면 만년설삼도 괜찮습니다.]

[빙설초는 그래도 사용되었다는 소문이라도 들었지만, 만년설삼은 솔직히 실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귀물인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냐?]

사해신개의 답에, 악불군의 얼굴에 기대감이 나타났다.

[빙설초를 보셨습니까?]

[보긴 봤지. 하지만 그게 삼십 년도 전이라,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떤 찾을 수 있는 단서라도 알 수는 없습니까?]

[그런 단서가 있으면 내가 이미 찾으러 갔을 게다. 그리고 찾는다 해도 빙설초나 만년설삼은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사해신개가 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자 다시 물었다.

[어르신께서 제게 먼저 접근하셨을 때는, 제가 어르신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있으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지만 저는 어르신과 가깝게 지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그것은 어르신만이 아니라 모든 무림인들에게 적용되는 제 방식입니다. 하지만 전 도움을 받으면 그 은혜는 반드시 갚습니다. 그리고 제가 강호에 나와 도움을 받는 것은 어르신이 처음이라는 점도 염두에 두어 주십시오.]

[흠…… 은혜로 생각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냐?]

[제겐 제 목숨보다 중요합니다.]

[네가 이기어검을 펼쳤다는 말이 있던데, 정말이냐?]

[전 이기어검을 어떻게 펼치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비슷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너를 미행하던 자들 중 개방의 제자들도 있었다. 그렇게 죽이다가 본 방의 제자들까지 죽었다면 어찌할 뻔했느냐?]

[전 저희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사람들만 제거했습니다. 개방의 제자들 역시 우리에게 안 좋은 마음을 품었다면 죽었을 겁니다. 만약 살았다면 그런 마음을 갖지는 않은 것이니 다행이겠지요.]

사해신개는 말없이 서 있는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담수련을 슬쩍 보더니 말했다.

[그럼 본 방에서 자네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 되는 건가?]

[유의미한 정보를 주신다면 개방은 제게 은인이 될 수도, 나아가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해신개는 턱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갈등하는 척하더니 입을 열었다.

[약속은 꼭 지켜라.]

[아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나도 아는 것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하나, 한 가지 들은 것은 있다.]

삼십 년 전, 개방은 북개방과 남개방으로 나뉘어 정말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북개방에서는 남개방을 반도라고 칭했고, 남개방은 북개방을 변절자들이라고 했다.

당시 사해신개는 남개방의 행동 대장격인 천강개 총대장을 맡아 모든 싸움을 진두지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 본 사실이 있었다.

[당시 지하에 숨은 중원 무림인들은 진짜 열악한 환경에서 원나라와 그들을 돕는 오룡세가와 싸우고 있었다. 그런데 중원 무림의 중요한 주축이었던 해남 성모궁의 봉황신녀가 목숨까지 위태로운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내가 알기로 도저히 고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는데, 빙설초를 먹고 더 강한 무림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럼 봉황신녀라는 분을 찾아가면 빙설초의 행방을 알 수 있겠군요.]

[봉황신녀 아니면 그녀를 고친 사람을 찾아가야 하겠지.]

[그럼 봉황신녀라는 분은 어디 계십니까?]

[지금은 봉황신녀가 아니라 봉황성모라고 불리신다. 지금 해남의 성모궁에 계실 게다. 하지만 난 그녀를 고친 의원을 찾는 것이 더 빠를 거라고 생각한다.]

봉황성모.

천하가 인정한 여인 최고의 고수이자 무림 십대고수의 한 명이었다. 정의를 최우선 명제로 여기는 그녀는 정파에게는 신성시되고 있지만, 마도나 사파에게는 사갈처럼 두려움을 주는 존재였다.

[의원은 누구십니까?]

[당시는 명의 정도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최고의 신의라 불리고 있다. 사람들은 보통 그를 새편작이라 부른다.]

새편작이라는 단어를 들은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담수련의 병을 전담했던 정환후도 빙설초나 만년설삼을 못 찾는다면 마지막으로 새편작을 찾아보라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새편작이란 분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 * *

“호법님, 저자가 왜 호법님을 만나려고 한 것입니까?”

사해신개에게서 알고 싶은 정보를 얻은 악불군은 공손히 포권을 하고는, 담수련을 신주단지 모시듯 보호하며 귀문곡을 나갔다.

그러자 대물개가 사해신개에게 급히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사해신개의 답은 그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할 뿐이었다.

“글쎄 말이다. 솔직히 나도 굉장히 의아하다. 대물개.”

“예!”

“네가 보기에 저들이 어디서 왔다고 생각하느냐?”

사해신개가 악불군을 따르게 된 것은 호북사걸 진재기의 보고 때문이었다.

천목산에서 어찰단을 모두 죽였다는 대목에서 흥미를 느낀 사해신개는 직접 악불군이 탄 배에 올라탔고, 그가 배에서 보인 무위에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자신의 호법패를 그에게 넘긴 것은, 악불군의 몸에서 풍기는 기가 너무 깨끗했기 때문에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일종의 파격적인 모험이었다.

“호북사걸의 진재기 대협 말로는 저들을 천목산에서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안휘성 분타에 연락을 했는데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소성 아니면 절강성 두 곳 중 한 곳에서 왔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강소성은 영웅회에서 장악했다. 저들이 강소성에서 왔다면 우리의 이목에 무조건 걸려야 한다.”

“그렇다면 절강성밖에 안 남는데, 그곳은 잠룡세가가 있는 곳입니다.”

“담무룡에게 천하제일미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예쁜 딸이 있다고 들었는데, 맞느냐?”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그런 소문은 무성했습니다. 하지만 저 여인이 잠룡세가의 딸이라면, 어찰단과 싸운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이름도 얼굴도 처음 보는 젊은 무인, 그리고 그 무인이 보호하는 여인. 그리고 갑자기 원나라에 부역을 한 무림 세력들에게 뿌려진 현상 수배 전단.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였다.

절강성에서 왔고 담수련을 보면 잠룡세가를 의심해 볼 수도 있었지만, 잠룡세가의 무인들에 대해서는 사해신개도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악불군 같은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더욱 의아한 것은 그를 어찰단이 추적하고 있었고, 거기에 더해 악불군과 그가 보호하는 여인에 대한 현상 수배 전단이 원나라에에 부역을 하던 무림 세력들에게 뿌려진 것이었다.

특히 포상금 금자 만 냥이 그 둘의 중요성을 알려 준다고 보았다.

악불군이 그에게 도움이 필요하니 만나자는 연락을 해 왔을 때, 그는 자신의 모험이 통했다고 좋아했다. 그리고 대단한 비밀이 모습을 드러낼 줄 알았다.

‘빙설초와 만년설삼……. 빙설초는 그렇다 쳐도 만년설삼은 나타나는 순간 천하가 피바다가 될 수도 있는 천고의 귀물인데, 그걸 대놓고 알려 달라고 했단 말이야?’

사해신개는 악불군이 세상 물정에 대해 상당히 모르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대물개.”

“예.”

“대하루에 있다는 저 아이의 동행들, 잘 보호해 줘라. 그리고 제자들에게 저 아이를 만나면 무조건 호의적으로 대하라고 하고. 만약 도움을 원하면 최대한 돕는다.”

“저희도 아직 불안해서 대놓고 행동을 못하고 있는데, 저자의 동행까지 보호한다는 것이 쉽겠습니까? 더욱이 저자의 정체가 아직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영웅회에서 우리를 이상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이놈아! 생각해 봐라. 지금은 공통의 적이 있어서 다 한편 같지만, 적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지 누구도 몰라. 그런데 세상 물정에 어두운 순진한 자가 이기어검을 사용하는 고수야. 그럼 무조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강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보답 없는 도움을 받으면 고마움과 함께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갖는 법이다. 저 아이의 마음에 개방에 대한 많은 부채 의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이유 없는 도움이 가장 효과가 좋은법이다.”

“……알겠습니다.”

“다른 분타에도 나의 특별 명령이라고 전하고, 그대로 행하라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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