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83화 (83/472)

<천검지애 83화>

83화. 대공(1)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귀문곡을 빠져나올 때까지 한마디도 묻지 않던 담수련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고 말았다.

“아가씨께서 물어 주시니 정말 다행입니다.”

“뭐가?”

“제가 여기에 왜 왔는지, 그리고 그 어르신과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아가씨께 말씀드리지 않아서 화나신 줄 알고, 솔직히 굉장히 불안했거든요.”

“그럼 계속 불안해해. 나 아직 화 안 풀렸으니까.”

“꼭 알고 싶으십니까?”

“난 소군이 내게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싫어.”

“저도 싫습니다. 하지만 아가씨 심기가 불편한 것은 더욱 싫습니다.”

담수련은 오늘 일이 자신과 연관이 있고, 만약 안다면 심기가 불편해질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나 그렇게 속 좁은 여자 아니거든!”

“그거야 제가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알지요. 아가씨만큼 속이 넓고 배려심 깊은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해 보지도 않고, 왜 내가 심기가 불편할 거라고 생각해?”

“분명 마음이 안 좋으실 겁니다.”

“안 그럴걸!”

“정말 알고 싶으십니까?”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소군이 하는 일로 기분이 나빠지는 상황은 없단 말이야.”

담수련의 장담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아무래도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담수련은 어려서부터 궁금한 것이 있으면 절대 알아야 하는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고집이 어린 나이에 만 권의 책을 읽은 원동력이기도 했다.

“그럼 제 계획대로 따라 주신다고 약조를 해 주십시오.”

“무조건?”

“예, 하지만 이번 일만 끝나면 아가씨께 이런 무례를 저지르는 일은 다시는 없을 것입니다.”

“좋아. 약속할게.”

“잠깐 악양성에 들러 삼화를 만난 후 강소성으로 갈 예정입니다.”

“강소성? 거긴 갑자기 왜? 유모께서 거기서 기다리신대?”

“아닙니다. 새편작이란 분을 만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누군데?”

“천하제일의 신의라고 합니다.”

“신의?”

생각지 못한 답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커다란 눈으로 악불군을 주시했다.

“제 뜻을 따라주신다고 이미 약속을 하셨습니다.”

“지금 내 병 때문에 신의를 찾겠다는 거 아니야?”

“그분이 빙설초에 대해 안다고 했습니다.”

“지금 가지고 있대?”

“모릅니다. 하지만 삼십 년 전 빙설초를 이용해 한 여인을 구한 것은 분명하다고 했습니다.”

“소군, 삼십 년 전이면 우리가 태어나기도 전이야. 지금까지 그것을 가지고 있을 리 없잖아?”

“빙설초는 아주 귀한 약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 그분이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없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구했는지는 알고 있을 것입니다.”

“소군, 난 모든 것을 잊고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을 구경하면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했잖아.”

“세상 아름다운 장소는 다 찾아갈 것입니다.”

“소군, 빙설초나 만년설삼이 구해질 물건이었다면 아버님께서 이미 구하셨을 거야. 그리고 사람의 생사는 천명이야. 내가 살 운명이면 찾아질 거야. 난 소군이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싫어.”

안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매우 속상했다. 그녀는 자신의 목숨이 붙어 있을 동안 악불군과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는 악불군이 자신의 목숨을 늘리기 위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느라 고생하는 것이 싫었다.

“아가씨, 전 아가씨의 옥체에 이상이 생긴다면 제 인생도 끝납니다. 제가 이러는 것은 저도 살기 위해서입니다.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은 제게는 천명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가슴이 메어 왔다.

그녀는 악불군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그리고 그의 품 안에서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해 왔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이었는지 느꼈다.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 뒤에 남을 악불군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 일인지 깨달은 것이다.

“내, 내가 뭐라고…… 소군은 내가 없으면 자유잖아. 소군의 무공이면 천하를 오시하며 이런 호위가 아니라 커다란 명성까지 얻을 텐데, 왜 내게 이렇게까지 집착을 하는 건데.”

“집착이 아니라, 아가씨께서 제 운명이기 때문에 이러는 것입니다.”

서로 자신보다는 상대를 생각하고, 상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고, 상대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

그러나 안타깝게도 둘은 지금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 * *

잠룡세가를 빠져나온 후 지붕을 통해 부명산 쪽으로 달려가던 가등우와 담무룡은, 항주성이 보이자 잠시 멈췄다.

[성내로 도대체 몇 명이나 들어온 것이냐?]

담무룡은 사방에서 무림인들의 기가 느껴지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국대광이 배신하면서 항주성을 그냥 열어 준 것 같습니다. 상당수의 어찰단이 안으로 들어왔고, 절강군부의 군사도 최소 오천 명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추격자가 없다는 것이 좀 이상하지 않느냐?]

잠룡세가 곳곳에서 전투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배신자들에게 장악당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핵심 중의 핵심인 그를 추격하는 자들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를 찾는 자들은 없었다.

[문 군사님께서 최대한 우리의 앞길이 방해받지 않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긴 하겠군.]

사실 이미 함정에 빠져 진퇴양난에 빠진 그였다. 그런 그에게 더 함정을 파서 뭐하겠는가……

가등우의 말대로 문창현이 이렇게 번거롭게 일을 꾸밀 이유는 없어 보였다.

[가자.]

잠시 생각하던 담무룡이 허락과 동시에 성루로 몸을 날리자 가등우도 급히 그 뒤를 따랐다.

‘내가 수십 년에 걸쳐 이룬 세력을 피해 숨어서 빠져나가다니, 어이가 없군.’

담무룡은 자신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수하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세가를 떠나게 했고, 그의 비밀 세력에 합세하게 했다.

지금 그가 이런 상황에 몰린 것도, 어쩌면 진짜 충성하는 자들을 모두 내보낸 것이 이유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남은 이 중 절반 가까이가 배신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드디어 잠룡세가를 벗어난 담무룡과 가등우는 항주 외곽에 있는 부명산에 도착했다.

“여기서 만나기로 한 것이냐?”

“예. 원나라 군사들과 어찰단이 이쪽까지 장악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 안에 고 호법님과 함께 절강을 빠져나가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도망을 치자는 것이냐? 가등우! 내가 담무룡이다. 도망칠 때 치더라도 이대로는 못 간다.”

그 바쁜 와중에도 기어이 호류목을 죽이고 나서야 움직인 담무룡이었다. 가등우는 자신이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한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문 군사님께서 제게 가주님께 전해 달라는 전언이 있었습니다.”

“뭐냐?”

“고 호법님께서 지금 데리고 있는 수하들의 수가 이백 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문 군사님께서는 그 수로 이들과 정면 대결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살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시면서, 아가씨와 소가주님을 생각해서라도 이번 한 번만 피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담무룡의 눈가가 꿈틀했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말이군. 배신은 하되 죽게는 할 수 없다? 고양이가 쥐새끼 생각해 주는 것보다 더 하군.”

담무룡은 문창현이 이번 반역에 가담한 것은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문 군사님께서는 어떤 경우의 수를 대입해도 본가가 이길 방법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목숨이 아까워 대공의 명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안내해라.”

담무룡은 더 듣고 싶지 않은 듯 화제를 돌렸다.

“이쪽입니다.”

부명산은 작은 산이었지만 험한 지형이 상당히 많았다.

가등우를 따라 깊숙이 안으로 들어가던 담무룡의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러십니까?”

“피 냄새다.”

“예?”

담무룡의 말에 가등우가 공중으로 코를 들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커억!”

냄새를 맡던 가등우의 입에서 처절한 격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무엇에 당했는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가등우는 잠깐 담무룡을 쳐다보았지만 말 한마디 못하고 그대로 넘어갔다. 절정 고수인 가등우가 상대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담무룡은 가등우의 어이없는 죽음을 보면서도 전혀 당황함이 없이 쌍월검을 들어 올리며 어딘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며칠 전까지 착실하던 수하들이 갑자기 변해서 혹시나 했는데, 역시 대공께서 직접 오셨군요.”

“그러게 말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신경 쓸 상황이 아닌데, 네가 너무 버티니 더 이상 이곳을 방치한다는 것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조용한 음성과 함께 하얀 수염을 늘어뜨린 대공이 수하 열 명과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수하 중 한 명이 대공의 뒤에 의자 하나를 놓았다.

대공이 자리에 앉자 각기 다른 무기를 가진 열 명의 노인이 그 뒤로 늘어섰다.

“태양십존까지 다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담무룡은 대공의 옆에 서 있는 노인들을 보자 포권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대공의 명만 따른다는 태양십존은 한 명 한 명의 무공이 오룡세가의 가주들과 맞먹는다고 알려진 초절정 고수들이었다. 그들 열 명이 대공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은 담무룡이 이 자리를 벗어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담무룡, 왜 그랬느냐?”

“무엇을 말입니까?”

“난 네게 힘과 명예를 주었다. 오룡세가 중 가장 알짜라고 알려진 절강까지 네게 주었지. 심지어 나는, 혈족인 철장표보다 너를 더 신임했다.”

“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언제나 감사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문창현이 무던히도 너를 변호하더구나.”

“그랬습니까?”

“지금 같이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절강만 조용한 이유가 바로 잠룡세가의 위엄이라는 거지. 솔직히 나도 여러 번 갈등했다. 천륭검보와 천륭검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황실의 안위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아마 내가 너를 믿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믿었기에,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더구나.”

“그래서 그게 억울해 직접 오셨습니까? 대공께서도 늙으신 모양입니다.”

“솔직히 내가 너무 바빠서 오기 힘들었다. 그런데 내 도움 없이는 계획이 너무 지지부진하다는 내 아이들의 말에, 오지 않을 수가 없더구나. 솔직히 나도 놀랐어. 완벽하게 내 명을 최우선으로 따르도록 태어나면서부터 교육을 시킨 아이들이 뜻밖에도 네게 많이 빠져 있더구나. 역시 담무룡이구나 싶었지.”

대공은 잠룡세가만이 아니라 오룡세가 전체에 자신이 명만 내리면 반기를 들 간세들을 상당히 많이 포진시켜 두었다. 그들은 수십 년에 걸쳐 오룡세가의 가주들에게 충성하며 큰 신임을 받고 핵심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유사시에 자신의 명을 따라야 하는 그들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몇몇은 대놓고 담무룡을 그대로 두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반박까지 했다.

금잔화는 자신의 명이 안 먹히자 대공에게 말했고, 결국 그가 직접 항주에 온 것이었다.

최대한 버티던 그들도 대공을 직접 만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대공께 들었던 말들 중 가장 기분이 좋은 말이군요.”

“천륭검보와 천륭검은 어디에 있느냐?”

“전 분명 모른다고 했습니다.”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상황임에도 담무룡은 단번에 부정을 했다. 만약 그가 인정을 한다면 대공의 눈은 당연히 담수운과 담수련에게 향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도 끝까지 모른다고 발뺌을 해야 했다.

“너의 딸이 호위 무사 한 놈을 데리고 잠룡세가를 빠져나갔더구나.”

대공의 말에 처음으로 담무룡의 몸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심적 동요를 일으켰다는 의미였다.

“이미 성인된 아이이니, 제가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가둬 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담무룡이 자식들에게 이렇게 너그러운 아버지일 줄은 몰랐구나. 그런데 호위 무사 놈이 천륭검식을 사용하더구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