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84화>
84화. 대공(2)
대공의 뜻밖의 말은 담무룡조차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종리화에게조차 말하지 않은 사실을 대공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하지만 역시 담무룡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조금도 내색 없이 말을 받았다.
“천륭검보가 있지도 않지만, 있다 해도 제 성격상 호위 무사 따위에게 전해 주겠습니까?”
“그래, 내가 아는 담무룡은 절대로 자식이 아닌 다른 자에게 그런 귀한 것을 줄 리 없지. 그래서 계속 의아했다. 하지만 그놈이 강호에 나와 어찰단을 꽤나 많이 죽였어. 내가 네게 말한 적이 있을 게다. 시신이 남긴 상처는 거짓말을 못한다. 그리고 내가 본 시신의 상처는 분명 천륭검식에 의한 것이었다.”
중원 사대 무황 중 검황이라 불렸던 구문황이었지만 그의 검식을 직접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악불군이 검식을 펼치는 정면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았지만 누구도 그것이 천륭검식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것도 그 이유였다.
그리고 지금, 담무룡의 가장 큰 의문 중 하나가 풀렸다.
“솔직히 전 대공께서 구문황이 죽은 후에야 천륭검가를 친 것에 의아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이제야 풀리는군요.”
“……무슨 의미냐?”
대공은 담무룡의 말에 눈에 노기가 스쳐 갔다. 대공이 가지고 있는 최대이자 최고의 치부를 담무룡이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대공께서 구문황에게 패한 적이 있다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아서 정말 다행이라는 뜻입니다.”
천륭검보를 수십 년 동안 연구한 그도 모르는 천륭검식을 시신만 보고도 안다는 것은, 대공이 구문황과 이미 겨뤄 봤다는 반증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패했다고 누가 그러더냐?”
“대공께서 사대무황 중 유독 구문황만 두려워해서 왜 그럴까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었지요. 그 이유가, 구문황에게 패했기 때문 아닙니까? 그것도 다시 덤벼 볼 생각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패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담무룡, 언제나 똑똑하던 너도 이제 나이가 든 모양이구나? 내가 예전에 네게 해 준 말을 잊었느냐?”
“너무 많은 것을 들어서, 어떤 말을 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 중원인들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생각하지. 그러나 진짜 강한 자는 살아남은 자다. 구문황이 강하기는 했지만, 지금 구문황은 물론 그의 집안까지 세상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건재하다. 그렇다면 천륭검가와 나 사이의 진정한 승자는 누구겠느냐?”
“승리는 승리, 패배는 패배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대공께서 미사여구로 포장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자신의 창피함을 가리고자 하는 행동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담무룡의 말에 대공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내가 오늘 직접 온 이유를 아느냐?”
“아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본 세가에 심어 놓은 간세들이 말을 안 듣는다고 말입니다.”
“역시 담무룡답구나. 너는 언제나 내 마음을 꿰뚫어 봤지. 내가 너를 가장 신임했던 이유도 나의 젊은 날과 너무 닮아서였을 거다. 그래서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
“반드시 죽여야겠다고 결정하신 모양이군요?”
“네가 나와 닮았기에, 아군일 땐 분명 중요한 협조자였겠지만, 적이 된 순간 그때부터 아주 골칫거리가 된다. 더구나 최근 네 행보를 보고 분석해 보니, 이번 기회를 이용해 원나라에 부역한 무림인에서, 그들에게 죽음으로 항거한 투사로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고 나오더구나.”
태연함을 가장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던 담무룡의 안색이 처음으로 굳어졌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계획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공이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그로서는 정말 징글징글할 정도로 두려운 상대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을 하셨군요? 그렇게까지 치밀히 계산하여 계획을 세울 정도로 제가 대단하지는 않은데 말입니다.”
“그럴까? 천륭검보와 천륭검을 가져오고 스스로 반성을 한다는 구체적인 행동만 취한다면 넌 어쩌면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너는 은연중에 우리가 공격하기를 기다리는 행태를 계속 보여 왔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도망을 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겠지. 그래서 너만은 절대로 살려 둘 수 없기에 내가 직접 온 것이다.”
“제가 그 정도로 거물이 되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는 나를 속인 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다. 그래도 너이기에 마지막 기회를 일 년이나 준 것이었다. 하지만 넌 나의 마지막 기대까지 저버렸다.”
그의 말이 떨어지자 태양십존은 기다렸다는 듯 담무룡의 주위를 포위했다.
“제가 오늘 살아남기는 어렵겠군요?”
“너만이 아니다. 너의 잘못된 판단으로, 너를 따르던 수하들 삼백 명도 오늘 다 죽는다.”
대공의 말에 담무룡은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다 시체로 변해 버린 가등우를 보더니 반문했다.
“……고숭무까지 다 죽였습니까? 모두 저만 사라진다면 다시 대공을 따를 자들인데, 그러실 필요까지 있었습니까?”
“고숭무, 그놈은 내가 직접 온 것을 알면서도 너를 택했다. 다른 때 같으면 한 번쯤 용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내가 그놈을 살려 둔다면 내 권위를 따르지 않는 놈들이 또 생길 수 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담무룡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주위를 은밀히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태양십존에 의해 퇴로는 완벽히 막혀 있었다.
‘담무룡이 이렇게 죽는가? 내가 자만했어…….’
그는 대공이 직접 나설 것이라고 전혀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 한 번의 판단 실수가 그의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 * *
백설과 자신의 말을 악양 외곽의 숲속에 풀어 놓은 악불군은, 날이 어두워지자 담수련과 함께 악양 성내로 스며들었다.
사방 곳곳에서 상당한 무공을 지닌 무림인들의 기가 느껴졌지만, 악불군의 환영전궁보는 그들의 이목을 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아가씨!”
초조한 표정으로 방 안을 서성이던 매향이, 창문으로 담수련이 들어오자 깜짝 놀라 불렀다.
“쉬!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담수련이 급히 손가락을 입에 대며 말하자, 매향이 즉각 입을 닫고는 전음을 날렸다.
[악 무사님은요?]
[곧 올 거야. 지금 주위에 어떤 자들이 감시하는지 알아보러 갔어. 그런데 무슨 일 있어?]
[예,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그때 악불군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문제라니,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냐?]
[연화가 이끌던 잠봉단의 시성란이 큰 상처를 입은 채 돌아왔습니다.]
[시성란이 왔다고? 어디에 있어?]
담수련이 급하게 반문했다.
[상처가 너무 깊어 지금 옆방에서 치료중입니다.]
[시성란이 어떻게 여기 나타난 거지?]
악불군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가 악양으로 온다는 사실은 연화밖에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희를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연화를 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악불군의 검미가 좁아졌다.
[소군.]
[예.]
[우리를 잡으려는 함정이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면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리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대처법이 저절로 떠올랐다.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추국을 보며 말했다.
[시성란이 있는 곳으로 가자.]
[예!]
방을 나가자 다섯 명의 잠봉단원이 통로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이 층을 통째로 며칠간 빌린 터라 외부인은 없었다.
“이 방입니다.”
매향이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추국과 흑란이 반가운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아가씨!”
“악 무사님!”
고개를 끄덕인 담수련은 침상에 누워 있는 시성란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악불군이 그녀의 뒤에 바짝 붙어 만약의 상황에 대비를 했다.
“시성란은?”
“지금 수혈을 짚어 잠을 재워 놓았습니다. 곧 깰 겁니다.”
시성란의 이마에 먼저 손을 댄 담수련은 이어 그녀의 맥을 잡았다. 과거 정환후가 의술만으로는 이미 자신을 능가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로, 의술에 조예가 깊은 그녀였다.
“내상이 꽤 심하네. 그래도 맥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안정이 되어 있어. 소군은 고개 좀 돌려.”
“예.”
악불군이 고개를 돌리자 담수련은 그녀를 덮고 있는 이불을 살짝 들췄다. 그곳에는 어깨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긴 자상이 보였다.
“누가 꿰맸어?”
“제가 꿰맸습니다.”
추국의 대답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잘 꿰맸네. 상처는 얼마나 깊었어?”
“어깨는 뼈가 보일 정도로 깊었습니다. 다행히 내려오면서 얕아져서, 장기까지는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이불을 다시 덮은 담수련은 매향을 보며 물었다.
“연화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은 시성란이 말한 거야?”
“예, 도착했을 때 상당한 상처를 입고는 있었지만 정신은 또렷했습니다. 하지만 너무 고통스러워해서 상처를 꿰맬 때까지 수혈을 짚어야 했습니다. 그 탓에, 아직은 확실한 내막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럼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네?”
“그건 대충 들었습니다. 연화와 함께 약속대로 합비 남쪽 소호변에서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때 어찰단이 그곳을 공격했고요. 적들의 무공이 강해 싸움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연화 역시 십 초를 못 버티고 제압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여기는 어떻게 온 건지도 말했어?”
“성란이도 모르겠다고 합니다. 자신과 연화만 혈도를 찍힌 채 끌려왔는데, 도착해 보니 악양이었다고 합니다.”
“연화와 성란이만 끌고 왔다고?”
“예.”
“다른 아이들은?”
“처음 기습했을 때 반이 죽었고, 연화를 고문하면서 그 앞에서 잠봉단원을 죽였답니다. 말 안 하면 다 죽인다고요. 자신도 죽을 뻔했는데, 갑자기 이곳에 자신을 버려 놓고 갔다고 하더군요.”
“연화를 고문했다고?”
담수련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했다.
“……예, 정말 무도한 자들입니다.”
말하는 매향은 물론 추국과 흑란의 얼굴도 분노로 일그러졌다. 자매처럼 자란 그녀들에게 연화가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은 그녀들까지 고문을 당한 듯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으음…….”
그때, 시성란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눈을 떴다.
“정신이 들어?”
“아, 아가씨…….”
눈을 뜬 시성란은 담수련을 보자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일어나지 마.”
시성란은 눈에 눈물까지 가득 담고는 끝내 몸을 일으켰다.
“소녀, 연화 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가 큽니다. 용서하십시오.”
“여기 어떻게 알고 왔어?”
“연화 님과 함께 가마 안에 실려 오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를 꺼내더니 검으로 제 몸을 잘랐습니다. 그러더니 제 상처를 보면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 지 알 거라면서, 저를 이곳에 던지고는 사라졌습니다.”
“그럼 여기 와서야 우리가 있는 줄 알았다는 말이네?”
“네.”
시성란은 말하는 도중 고통스러운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힘들면 누워도 돼.”
“아닙니다.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럼 연화는 지금 어디에 있어?”
“저랑 같이 실려 온 가마 안에 있을 것입니다.”
“연화를 구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야?”
“그들이 저를 이곳에 던지면서, 연화 님을 구하고 싶으면 장항루로 오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장항루? 지금 그들이 장항루에 있다는 말이네?”
반문하듯 말한 담수련은 흑란을 보며 말했다.
“나가서 장항루가 어디에 있는지 알아와.”
“예!”
흑란이 나가자 담수련이 다시 물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
“어찰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룡세가 사람들이 같이 있었습니다.”
“오룡세가 어디?”
“예전 아가씨 성인식 때 보았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세가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연화가 살아 있는 것은 분명해?”
“아가씨, 저들이 제게 굳이 장항루를 알려 준 걸 보면, 함정이 분명합니다. 전 아가씨께서 가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도 함정이라고 생각해?”
“예, 다만 연화 님의 몸의 상처가 너무 심해 오래는 못 버티실 것 같아 그게 마음이 아픕니다.”
시성란의 얼굴에 슬픔을 가득 담고 말했다.
함정이니 가면 안 되다면서 연화가 오래 못 버틸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는 말은 담수련에게는 가야 한다는 말로 들리고 있었다.
“그래, 네 말대로 함정이 분명해. 그래도 연화를 버릴 수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