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85화 (85/472)

<천검지애 85화>

85화. 함정(1)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함정임을 알면서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호위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자신이 반대를 한다면 담수련이 슬퍼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소군, 나 보고 가면 안 된다고 해 줘.]

[예?]

뜻밖의 전음에 악불군은 의아한 듯 반문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돼…….]

악불군은 담수련의 설명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감탄했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가씨, 연화의 상황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포기하셔야 합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과 삼화가 모두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연화를 포기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담수련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악양에서의 접선이 실패했습니다. 그럼 다음 접선 장소인 악록산으로 당장 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저희의 임무는 아가씨를 안전하게 모시는 것입니다. 연화를 찾아가는 것이 함정이란 사실을 뻔히 알면서 그곳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삼화는 연화를 구해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싶었지만, 악불군의 말이 틀린 점이 없는지라 끼어들 수가 없었다.

“소군, 나와 사화는 자매 같은 사이야. 내 안전을 위해 연화를 포기할 수는 없어.”

담수련이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더욱 강력했다.

“악록산에 만약 접선자가 와 있다면 연화 때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삼화, 너희는 왜 가만있는 것이냐? 아가씨의 안전보다 연화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악불군의 질책 어린 말에 삼화는 고개를 숙이더니 담수련에게 말했다.

“아가씨, 악 무사님의 말이 맞습니다. 악록산으로 먼저 가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너희들까지 연화를 포기하라는 거야?”

담수련의 반문에 삼화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께서 연화를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악록산은 연화를 구한 후에 가도 되잖아?”

“그들이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면 무슨 수로 연화를 구하겠습니까? 오히려 우리만 큰 피해를 입을 것입니다. 그리고 악록산으로 가는 일은 지체할 사안이 아닙니다.”

“그럼 어떡할 건데?”

“우선 오늘 중으로 악록산으로 떠나야 합니다.”

“이 밤에?”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의 눈을 피하려면 밤이 더 좋습니다.”

“그럼 삼화는?”

“시성란을 이곳에 보낸 것으로 보아, 삼화의 정체 역시 그들에게 들킨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어르신께서 이곳은 누구도 함부로 싸울 수 없는 구역이라고 했으니, 이곳에서 이틀 정도 더 머물면서 그들의 눈을 잡아 두었다가 선양으로 오게 하면 됩니다.”

선양은 악록산 기슭에 자리한 현이었다.

“죽은 줄 알았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기대를 안 했지만, 이제는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 그런데도 그냥 두고 우리만 살기 위해 떠나는 것은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야.”

“저희를 잡기 전에는 연화를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악록산에 가서 접선을 하고, 연화는 그다음에 다시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악록산에 갔다가 연화를 구할 거야?”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담수련은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더니 복잡한 시선으로 시성란을 보며 말했다.

“우린 잠시 대화를 나누니 올 테니, 너는 좀 더 쉬고 있거라.”

“예.”

“우리 다른 방 가서 얘기해.”

밖으로 나가는 담수련의 뒤를 따라 악불군과 삼화가 나가자 힘든 듯 침대에 등을 누인 시성란은, 그들이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느끼자 눈빛이 변했다.

그녀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키던 추국과 흑란이 나가면서 방에 혼자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가더니 품에서 종이를 꺼내 뭔가를 급히 쓰고는 창밖으로 던졌다.

그러고는 다시 침상에 누워 축 늘어진 자세로 눈을 감았다.

* * *

“백 공자님께서 이 누추한 곳을 직접 찾아오시다니, 영광입니다.”

사해신개는 태극검자가 왔다는 말에 급히 분타로 돌아왔다. 그런데 백천학을 보자 더 놀라며 급히 포권을 했다.

“사해신개 노선배님께서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말학 후배이니 거기에 맞게 대해 주십시오.”

“천무성궁의 후계자이신데 나이나 배분을 따질 수는 없지요. 그런데 이곳까지 웬일이십니까?”

사해신개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천무성궁.

중원이 원나라의 침공으로 무너지기 전, 중원에는 네 명의 무황이 동서남북에 존재했다.

북쪽에는 검황 천륭검가(天隆劍家), 동쪽에는 무황 천무성궁(天武聖宮), 남쪽에는 마황 구천마성(九天魔城), 그리고 서쪽의 사황 혈해사계(血海邪界)였다.

그중 끝까지 원나라와 대항하던 천륭검가는 사십 년 전 멸문했고, 천무성궁은 지리멸렬한 중원 무인들을 모아 영웅회를 만들었다.

구천마성은 지하로 숨어들며 사라졌고, 혈해사계는 원나라에 협조하며 신강과 청해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서 여전히 건재했다.

“제가 몇 가지 알아야 할 정보가 있어서 왔습니다.”

“정보요? 하하! 오늘 노부에게 정보를 묻는 사람이 많군요. 그런데 어쩌지요? 남개방의 정보력은 예전의 개방과 비교하면 십분지 일도 채 되지 않으니 말입니다.”

“사해 도우, 무림 수복 계획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네. 그런데 적들이 무슨 눈치를 챈 건지, 갑자기 오룡세가 중 세 곳이나 악양에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았다네. 혹시 개방에서 알아낸 것은 없는가?”

태극검자의 질문에 사해신개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솔직히 사방에서 들어오는 소문이나 보고는 참 많은데, 분석이 안 돼서 아직 첩보 수준에 불과하다네. 우리 개방은 정보가 되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네도 잘 알지 않는가?”

정보와 첩보, 글자 한 자 차이지만 둘의 차이는 무척이나 컸다. 첩보를 거르지 않고 보고가 됐을 때 잘못된 판단을 유도할 수 있고 편견까지 심어 줄 수 있어서, 개방에서는 첩보는 절대 남에게 알리지 않았다.

“사해 노선배님,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설총마가 끄는 큰 마차를 모는 자와 그 안에 탄 여인에 관한 것입니다. 첩보 수준이라도 좋으니, 아시는 것이 계시다면 알려 주십시오.”

백천학의 말에 사해신개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설마 백천학이 알고자 하는 것이 그들에게 관해서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설총마인지는 모르지만 커다란 말이 끄는 마차에 대해서는 보고가 올라온 것이 좀 있습니다. 이미 그 마부에게 죽은 자들의 수가 오십 명이 넘는다고 하더군요.”

“어느 문파 출신인지는 아십니까?”

“본 방의 제자 중 그가 싸우는 장면을 직접 목도한 제자가 여럿 있는데, 누구도 그가 쓰는 무공이 어느 문파의 무공인지 알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다만 공통적인 말은 아주 빠르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럼 그 마차에 탄 여인의 정체도 아직 모르시겠군요?”

“정체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만 무림인들이 벌써 그녀에게 천상신녀라는 명호를 붙였다고 하더군요.”

“천상신녀요?”

“예.”

백천학은 그와 마주쳤던 그녀의 눈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지었는지, 아주 알맞은 명호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들에게 현상 수배 전단이 뿌려진 것도 아시겠군요?”

“그 전단이 오룡세가와 그들에게 협조하거나 원나라에 부역하던 무림 세력 위주로 뿌려졌다는 보고는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오룡세가나 원나라와는 적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가 겉만 보고 믿었다가 배신을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니 말입니다.”

사해신개의 말에 백천학과 태극검자도 이해한 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지로 영웅회가 조직된 이후, 중원 무림인이라는 이유로 믿고 같이 행동하다가 적들의 함정에 빠져 죽은 자들이 수백이 넘었다.

“그럼, 지금 그자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십니까?”

“북망산 근처에서 또 사건 하나를 벌이고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사건이라면?”

“수배 전단 때문에 뒤를 쫓는 자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쫓으면 죽인다고 경고를 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 경고를 무시한 자들을 모조리 죽였는데, 그때 그자가 이기어검을 사용했단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사해 도우, 지금 이기어검이라고 했소?”

태극검자가 깜짝 놀라 물었다.

“나도 보지를 못해 정확하진 않네. 하지만 뭔가 있으니까 그런 소문이 퍼지지 않았겠나?”

이기어검이라는 말에 백천학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와 태극검자는 악불군을 직접 보았었다.

물론 악불군이 겉으로 풍기는 기와는 달리 대단한 고수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기어검은 강한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공자님, 그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빈도가 보았을 때는 그렇게까지 대단한 내공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는 안 보였는데, 이상하군요.”

“저도 좀 의아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일만 냥이나 되는 엄청난 액수의 포상금까지 걸렸는데 아직까지 저렇게 활보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강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해 노선배님.”

“말씀하십시오.”

“그자와 여인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들어온다면 제게 곧장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사해신개는 백천학을 의아한 듯 쳐다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십니까?”

“우선 중양회의 총단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공자님께서 직접 오신 것을 보니, 악양 일대를 완전히 수복할 계획을 가지고 오신 모양입니다?”

“악양만이 아니라 이번 기회에 호남에서 외세를 모조리 몰아낼 생각입니다.”

“본 방의 제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악양에는 아직도 철룡세가의 정보망이 암약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룡세가와 어찰단으로 보이는 자들도 악양에 꽤 들어와 있다고 하는데, 두 분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게 해야겠지요.”

말하는 백천학의 몸에서는 젊은 나이임에도 절대자의 기도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 * *

시성란이 있는 방에서 약간 떨어진 다른 방에 들어선 담수련은, 조용하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삼화에게 작게 말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

삼화는 갑자기 달라진 담수련의 표정에 긴장한 듯 작게 답했다.

“예.”

“시성란이 이곳에 찾아온 상황이 여러 가지로 의심쩍다는 생각은 안 해 봤어?”

“저희도 약간 의심은 했지만, 몸에 난 상처를 보면 거짓 같지는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깊었다면 즉사할 정도의 상처였어요.”

추국의 말에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성란이의 상처는 상당히 깊었어. 그런데 안 죽었잖아? 왜 그런지 알아? 상처가 중요한 신경 부위를 교묘하게 피했기 때문이야. 그냥 휘두른 검에 의한 상처가 아니라, 대단한 고수가 인위적으로 큰 부상처럼 보이게 만든 상처가 분명해.”

삼화는 그녀의 상처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했지만, 의술에 밝은 담수련의 눈에는 다르게 보인 것이다.

“그럼 아가씨는 성란이가 첩자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왜, 너희는 아닌 것 같아?”

“성란이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잠봉단에 들어와 지금까지 한 번밖에 나가지도 않고 저희와 수련만 했습니다. 첩자가 될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그래……. 첩자가 될 기회도 없었는데 첩자가 됐어…….”

갑자기 담수련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녀의 변화를 느낀 악불군이 그녀의 옆으로 바짝 붙으며 주위를 살피며 물었다.

“아가씨, 어디 아프십니까?”

“아니야, 내가 아니라 아버님께서 위험해.”

담수련은 어려서 들어와 외인과 접촉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 첩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들어올 때부터 첩자였거나 세가 내에서 포섭되는 둘 중의 하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어쩌면 세가 내에 대공을 따르는 간세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을지도 몰라…….’

그것은 어쩌면 담무룡에게 치명적인 위험이 될 수 있다고 직감했다. 아니, 이미 위험에 처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악불군의 표정도 굳어졌다.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가주님께서는 무사하실 것입니다.”

“소군은 뭔가 알고 있었지?”

“아가씨께서 아시는 사실 이상으로 아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저도 짐작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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