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86화>
86화. 함정(2)
악불군의 성정상 답을 안 할지언정 거짓은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삼화를 보며 말했다.
“내 짐작은 성란이가 첩자라는 것이야. 하지만 짐작만으로 첩자로 몰 수는 없어.”
“그럼 당장 가서 성란이를 심문해 볼까요?”
매향의 말에 담수련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상처까지 감수할 정도면, 심문 정도로 자백할 리 없어. 지금 방이 비어 있지?”
“예. 다른 잠봉단원과는 개인적인 대화를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좋아! 성란이 혼자 있다면 우리가 한 대화를 어디론가 연락했을 거야. 지금 나와 소군이 장항루로 갈 거야. 그들의 움직임을 본다면 성란이가 첩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방에 누워 있는데 연락할 방법이 있을까요?”
“나도 지금은 몰라. 하지만 첩자라면 분명 연락할 방법이 있을 거야. 그래야만 하니까.”
“그런데 아가씨께서 그곳에 직접 가시는 것은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추국의 반문에 담수련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왜, 내가 가면 위험해질까 봐?”
“당연히 위험하지요.”
“내가 여기에 남는 것이 소군과 함께 움직이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대 봐.”
담수련의 반문에, 추국은 매향과 흑란을 슬쩍 보더니 한숨을 살짝 내쉬며 말했다.
“솔직히 저희들의 무공이 강호에서 이렇게까지 쓸모가 없을지는 몰랐습니다. 역시 악 무사님과 같이 계시는 것이 더 안전할 것 같습니다.”
“너희가 약한 것이 아니야. 지금 우리를 노리는 자들이 너무 강한 거야. 솔직히 난 대공이 별 쓸모도 없는 나를 왜 만 냥이나 포상금을 걸고 잡으려고 하는지 아직도 이해를 못하겠어.”
그녀들은 담수련의 말에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담수련을 잡으려는 이유 중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무림인들이 가장 소유하고 싶어 하는 세 가지가 있었다.
바로 무공 비급과 명검 그리고 천하절색의 미녀였다.
그리고 담수련은 가히 천하절색이라 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출발하면 셋이 할 일이 있어. 맨 정신에 제압했다가 첩자가 아니라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 추국은 성란의 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척하면서 수혈을 짚어.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자게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매향은 지금 즉시 악양성부에 가서, 오룡세가가 장항루에서 악록산 쪽으로 가고 있으니 빨리 추격해서 그들을 잡으라고 해. 대단한 고수들이 많으니 주의하라는 말도 꼭 하고.”
“제 말을 믿을까요?”
“내가 매향 너를 보내는 이유가 그거야. 말을 잘하잖아. 어떻게든 믿게 만들어. 특히 장사성 대장군을 존경한다는 것을 강조해. 반란을 일으킨 자들의 신분이 대부분 한미(寒微)하다고 들었어. 그런 자들은 대부분 존경하다는 말을 좋아하니, 그것을 무기로 삼아.”
그녀의 말에 모두는 희한한 말을 들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담수련은 너무 순진해서 계책은커녕 가벼운 거짓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이 얼마 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노회한 무림인처럼 지시를 척척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상대의 심리까지 생각하는 것은 책만 읽어서는 되기 힘들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추국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지금 그 생각은 언제부터 하신 거예요?”
“시성란을 보고 생각했……?”
대답하던 담수련은 자신이 생각해도 의아한 듯 말을 흐렸다.
자신의 머리가 이렇게 원활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그녀 생각에 지금은 차라리 이것이 나았다. 최소한 악불군과 삼화에게 짐이 될 리는 없으니까.
이내 담수련이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흑란.”
“예.”
“장항루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 왔어?”
“예, 악양성 북문을 나가 동정호 쪽으로 오십여 장 가면 주루 몇 채가 연달아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장항루라고 합니다.”
“알았어. 그럼 추국과 흑란은 시성란한테 가 보고, 매향은 잘해. 소군, 가자.”
소군이 담수련의 손을 잡고 몸을 날려 사라지자 매향이 놀란 듯 말했다.
“악 무사님 무공이 점점 높아지는 것 같아. 우리 눈앞에서 경공을 썼는데, 창문으로 나가는 것도 난 못 봤어.”
“더 놀라운 것이 뭔지 알아?”
추국의 말에 흑란과 매향이 쳐다보며 반문했다.
“뭔데?”
“악 무사님께서 아가씨 손을 너무 자연스럽게 잡고 몸을 날렸다는 거야. 이상하지 않아?”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아가씨를 안고 간 것도 아닌데?”
* * *
[소군, 안에 몇 명 정도의 사람이 있는지 느껴져?]
장항루가 보이는 지붕 위.
악불군과 담수련이 그곳에 착 붙어 장항루를 감시하고 있었다.
[예, 지금 많은 무인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디론가 출발하려는 것으로 보아, 아가씨의 짐작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연화의 기는 느껴져?]
[아직 느껴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때 장항루에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나오더니 말을 타기 시작했다.
‘저자…… 철무정? 연화를 잡은 자가 철룡세가라면, 정녕 오룡세가조차 가주님의 적으로 돌아섰다는 건가…….’
오룡세가까지 그들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은 잠룡세가가 완전 고립무원에 빠진 위기 상황이라는 방증이었다.
[누구야?]
담수련은 어둠을 뚫고 삼십 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철룡세가입니다.]
악불군은 철무정의 이름까지는 말할 수 없었다. 요즘 담수련은 약간의 단서만으로도 상황을 너무 잘 파악해서였다.
[이 밤중에 갑자기 저렇게 몰려나올 일이 뭐가 있을까?]
[여간해서는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 역시 악록산으로 달려갈 일 빼면 오늘 이 시간에 바삐 움직일 이유는 없을 거야.]
[제 생각도 아가씨와 같습니다.]
[됐어! 저들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면 안으로 들어가자.]
[예.]
[그런데 이렇게 간단한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것을 보니까, 저들 사이에 머리 있는 자는 없는 것 같아.]
담수련은 철무정이 이끄는 무인들이 남쪽으로 급히 달려가자 자신의 머리에 자신감이 좀 붙는 것 같았다.
[솔직히 저라도 넘어갔을 겁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예쁜 미소를 지며 살짝 흘기며 말했다.
[그런 말, 다른 여자들에게는 하지 마.]
[예?]
악불군의 반문에 담수련은 얼굴이 발개져서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창피하게 또 이상한 말을 했네…….’
‘다른 여인들에게 그런 얘기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 그녀를 보며 악불군은 미소를 지며 중얼거렸다.
* * *
“야 군사는 왜 표정이 그래?”
철무정이 떠난 후 군사인 야율보의 표정이 계속 안 좋자, 막중혁이 의아한 듯 물었다.
“이번 정보가 너무 뜻밖이어서 그럽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자신의 행보를 연화란 계집에게만 알려 주고 다른 잠봉단원들에게 말하지 않았던 담수련이, 왜 이번에는 시성란 앞에서 자신의 행적을 확실하게 밝혔을까요?”
“시성란을 못 믿겠다는 말인가?”
“시성란은 믿습니다. 하지만 시성란이 들켰을 경우도 생각은 해 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자네를 보면 너무 쓸데없이 머리를 쓰는 것 같아. 거의 죽을 정도의 부상을 입고 나타났으니 담수련도 믿은 것이 아니겠나? 그리고 소가주님께서 얼마나 똑똑하신 분인가? 직접 가셨다는 것은 그만큼 신빙성 있는 정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 아니겠나?”
“막 단주님 말씀을 들어 보니 제가 괜한 노파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야율보는 더 이상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잘못하면 철무정의 판단을 자신이 의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연화란 계집은 아직 쓸모가 있을지 모르니 잘 감시하라고 하게.”
“예, 그럼 들어가 쉬십시오.”
* * *
[상당히 멀리 간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날 안아.]
[예?]
[부끄럽게 자꾸 그럴 거야? 내가 안으라면 예? 하지 말고 그냥 안아.]
[아~ 예! 그런데 어떻게 안을까요?]
[우리가 나타난 것을 알면 연화를 죽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우선 연화부터 찾아야 해. 수색하기 가장 편하게 나를 안아.]
‘굉장히 어렵고 까다로운 명을 내리시는군…….’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녀의 어깨와 다리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렸다.
[목을 꼭 잡으십시오.]
자신이 안으라고 했지만 막상 악불군이 안아 들자 얼굴이 빨개지는 담수련이었다. 다행히 밤의 어둠이 그녀의 얼굴색을 가려 주었다.
장항루의 주위에는 이십 명이 넘는 무인들이 경계하고 있었고, 지붕 위에도 두 명의 무인이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악불군은 지붕 위에 있는 무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주시하더니 몸을 날렸다.
주위를 살피던 그들에게 잠시 사각지대가 생겼고, 그 짧은 순간을 이용해 이 층 창문으로 날아,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안 들켰어?]
[예, 안 들킨 것 같습니다.]
[소군, 정말 굉장하다. 이렇게 경계가 심한데 나까지 안고서도 들키지 않고 안으로 들어오다니 말이야.]
담수련은 정말 놀란 듯 말했다.
사실 그녀는 장항루의 경계가 너무 심해 어떻게 안으로 잠입할지 고심을 했었다. 무공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할 수 없는 일이 많았다.
[제가 아가씨만 옆에 계시면 없던 힘도 납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배시시 웃고 말았다. 어렸을 때부터 담무룡이 한 번만 웃어 달라고 사정을 할 정도로 여간해서는 미소를 보이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악불군의 앞에서는 너무 쉽게 미소를 보이곤 했다.
[장항루 안에 모두 몇 명 정도 있는 것 같아?]
[안에는 대략 열 명쯤 있는 것 같습니다. 그중 몇 명은 우리가 악양으로 돌아올 때 마주쳤던 자입니다.]
[오룡세가 중 벌써 세 곳이나 만났네?]
[화룡세가만 빼고 다 온 것 같습니다.]
‘화룡세가……. 그런데 난 어째서 이렇게 잊고 있지?’
담수련은 갑자기 화우성이 생각났다.
자신에게 참 잘해 주었고, 심지어 혼인까지 약속했던 남자였다. 담수련은 지금 화룡세가라는 말을 듣고야 화우성이 생각난 것이 약간은 놀라웠다.
[아가씨, 주루 일 층에 연화로 보이는 기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거의 죽기 직전인 것 같습니다. 기가 너무 미약합니다.]
[빨리 그쪽으로 가 봐.]
[예!]
답을 한 악불군은 살짝 밖을 살폈다. 이제 담수련을 내려놓아도 되었지만 악불군은 여전히 안고 있었고, 담수련도 내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주루 아래쪽을 살핀 악불군의 눈에 가마 하나가 보였다. 철무정이 싣고 온 가마였다.
[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위에 경계하는 무인이 다섯 명 있습니다.]
[연화, 확실해?]
[제가 연화와 같이 생활한 것이 몇 년입니다. 틀림없이 연화입니다.]
[여기 있는 자들, 이길 수 있어?]
담수련의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와 연화를 보호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가마 옆으로 저들에게 안 들키고 갈 수는 있겠어?]
[가마 주위에 불이 있고, 그 주위에 다섯 명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을 피해 가마 옆으로 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럼 제압해. 최대한 조용히.]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담수련의 얼굴을 한 번 보았다.
이들은 철룡세가에서도 정예급의 무인들로, 제압하라는 한마디로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인데도 담수련은 너무 간단하게 명하고 있었다. 그런데 악불군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그를 그만큼 믿고 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아가씨, 제 목을 놔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악불군의 말에 급히 팔을 풀었다. 그리고 또다시 그녀의 얼굴을 빨개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두근거리다니……. 수련아, 정신 차려라.’
담수련도 이제는 자신의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유를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사랑이란 생각보다 오묘해서, 아직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당황하기는 악불군도 마찬가지였다.
담수련이 그의 목을 놓고 몸에서 떨어지자, 계속 안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