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87화 (87/472)

<천검지애 87화>

87화. 드러나는 신위(1)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뜻밖의 감정 동요에, 악불군은 급히 전음을 보내고는 밑으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반각도 안 되어 악불군이 그녀의 앞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아가씨, 모두 제압했습니다. 가시죠.]

앞에 나타난 악불군은, 이번에는 먼저 그녀를 안고는 가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가마 옆에 가뿐히 내려선 악불군은 담수련을 내려놓고는 검을 빼 들었다.

다섯 명을 제압했지만 밖에는 아직도 열 명의 무인이 있었고, 주루 안에 딸린 방에도 몇 명의 고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화야!”

가마 안을 연 담수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안에는 한 여인이 죽은 듯 쓰러져 있었다.

간신히 숨만 붙어 있었는데, 너무 미약해서 곧 죽을 것 같았다.

거기다 그녀의 옷은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릴 정도로 찢어져 있었는데, 얼마나 심한 고문을 당했는지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담수련은 금방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연화야!”

담수련이 그녀의 몸을 안아 감싸며 다시 한번 불렀지만, 여전히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소군!”

순간 담수련이 대노한 목소리로 악불군을 불렀다.

“예!”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만들 수 있어. 이자들은 인간이 아냐! 전부 죽여!”

“웬 놈이냐?”

담수련의 목소리가 너무 컸던가…….

외부를 지키던 무인들이 크게 소리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악불군이 누구인가.

담수련의 명을 천명처럼 여기는 그였다. 그는 들어오는 자들의 목을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잘라 버렸다.

그때 악불군의 머리를 노리며 한 명이 이 층에서 뛰어내렸다.

막중혁이었다.

챙!

악불군의 검에 공격이 막힌 막중혁은 공중에서 회전을 하며 다시 이 차 공격을 시도했다.

챙! 채채챙!

다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넌?”

삼 차 공격을 포기하고 착지한 막중혁은, 악불군의 얼굴을 확인하자 눈이 동그래졌다. 분명 악록산으로 향하고 있어야 할 악불군이 이곳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철룡세가는 명색이 무림 최고의 무가인데, 어찌 여인에게 저렇게 무지막지한 고문을 할 수가 있습니까? 부끄럽지 않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막중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받았다.

“우리가 철룡세가라는 것을 알면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 후환이 두렵지 않느냐?”

“후환이라고 해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습니까? 그런데 어쩌지요. 그쪽이 저보다 더 먼저 죽게 생겼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환영전궁보를 밟으며 막중혁에게 다가갔다.

이제 그는 보법을 시전하면서 천륭검보의 자세까지 마음대로 바꿀 정도로 움직임이 익숙해져 있었다.

다가오는 악불군을 맞받아칠 준비를 하던 막중혁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자신을 향한 악불군의 검이 어찌나 현란한 움직임을 보이는지, 어디를 공격하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이게 무슨 검식이지?’

막중혁은 당황했다. 생사투에서 상대가 자신의 어디를 공격점으로 잡는지를 알아내지 못한다면 사실상 장님이 된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는 급급히 뒤로 물러서면서도 자신이 아는 최고의 절초를 사용해 방어막을 펼쳤다.

하지만 악불군의 검은 그의 방어망을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나름 자신의 무공에 자신이 있던 막중혁이었지만 악불군의 검식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 상대할 때는 그저 빠르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전설같이 떠도는 한 가지 검식이 생각이 났다.

“설마……?”

하지만 그의 생각은 끝을 보지 못했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목과 복부를 동시에 찔러 버렸기 때문이었다.

‘분명 막았는데?’

그는 자신의 가슴을 향해 찔러 오는 검을 분명 완벽하게 막았다. 그런데 검이 찌른 곳은 목과 복부였다.

어떻게 한 자루의 검이 동시에 세 곳을 노린단 말인가…….

하지만 그는 의문도 품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막중혁까지 죽자, 남은 자들은 더 버티지 못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간하면 도망치는 자들을 죽이는 것은 악불군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의 행사는 담수련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었다.

악불군은 한 명도 살려 보낼 수 없었다.

다시 비명 소리가 이어졌다.

어느새 근처의 객잔과 주루에서는 여러 사람이 불을 밝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곧 무림인들의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고 급히 창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고는 불을 끄기 바빴다.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연화를 안고 나타나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삼화가 급히 몰려왔다.

악불군이 연화를 침상에 조심스럽게 눕히자 삼화의 눈에는 곧 눈물이 고였다. 침상에 누운 연화의 모습이 너무 처참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나쁜 놈들! 여자를 어떻게 이렇게 고문을 할 수가 있는 거지요?”

추국은 분노로 몸을 떨면서 소리쳤다.

“지금 분노할 시간도 없다. 흑란은 빨리 깨끗한 천과 뜨거운 물을 가지고 오너라.”

“예!”

“추국은 의원에 가서 이 약초들을 사 오고.”

“예.”

“매향은 아직 안 왔어?”

“아직 안 왔습니다.”

“알았다. 빨리 갔다 와. 조심하고.”

“예! 그런데 아가씨.”

“왜?”

“외곽을 경계하는 잠봉대원들 말이, 밖에 수상한 자들이 객잔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다고 합니다.”

“계속 감시는 있었잖아?”

“그건 아는데…… 이자들은 아예 대놓고 객잔 주위를 돌고 있다고 하네요?”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악불군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혹시 거지들 같지 않았어?”

“거지는 아니었지만 옷차림이나 모습은 무척 추레했다고 합니다.”

“그럼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일 거야. 걱정 말고 약초나 구해 와. 혼자 가지 말고 잠봉대 서너 명과 같이 가도록 해.”

“예.”

추국이 나가자 담수련은 연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맥을 짚었다.

그리고 곧 심각한 표정으로 온몸의 요혈 여러 곳을 짚어 나갔다.

“소군.”

창문 밖을 보고 서 있던 악불군은 담수련의 부름에 급히 답했다.

“예.”

“내게 기를 좀 넣어 줄 수 있어?”

“어디 아프십니까?”

“그건 아니고, 연화에게 기를 좀 불어 넣어 줘야겠는데 내가 내공이 약해서.”

주화입마에 걸린 사람에게 기를 넣어 주는 것은 고수들이면 모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화 같이 중한 환자에게 기를 넣어 주는 것은 의술을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다고 악불군이 직접 연화에게 기를 넣어 주기도 어려운 것이, 혼인도 안 한 처녀의 맨살에 손을 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담수련에게 기를 넣어 줘도 마찬가지였다.

“아가씨, 기를 넣어 주려면 아가씨의 맨살에 손을 대야 합니다. 전 아가씨의 명예에 누가 되는 행동은 할 수 없습니다.”

“소군, 내게 어떤 명예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할 수는 없다고 봐. 빨리해.”

담수련이 어깨와 등이 보이게 옷을 살짝 내리자 악불군은 급히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았다.

“빨리하라니까. 시간 없어.”

악불군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뒤로 달려가 어깨 바로 밑 견정혈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순간 악불군은 담수련의 피부가 정말 부드럽다는 생각을 언뜻 했다.

그러나 동시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녀의 피부가 너무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오음절맥이 각성을 하면서 음기가 그녀의 몸을 더 많이 침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악불군은 내공을 그녀의 견정혈에 불어넣었다.

악불군의 기가 몸 안으로 들어오자 담수련은 이상하게 포근함을 느꼈다.

담무룡은 그녀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양기를 그녀의 몸에 집어넣어 주곤 했었다. 음기와 중화를 시켜 그녀의 병의 악화를 최대한 지연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열둘을 넘으면서 그만두고 말았다. 담무룡의 양기가 그녀의 몸 안에 들어갈 때 격렬한 충돌을 일으키며 큰 고통을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의 기는 조금의 고통도 없이 그녀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고 있었다.

‘이게 왜 이러지?’

담수련은 잠시 의아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연화의 중요 요혈 열 곳에 그녀의 기를 집어넣었다.

무려 네 곳이 건드리기만 해도 죽는다는 사혈이었지만, 지금은 생이 경각에 다다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다 됐어.”

담수련의 말이 떨어지자 악불군은 황급히 손을 떼고는 그녀의 내려진 옷을 올려 주었다.

“생명에 지장은 없을까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란 단어의 뜻을 오늘 확실히 알 것 같아.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썼으니까 다음은 하늘에 맡겨야지, 뭐.”

담수련은 옷깃을 올리며 말하다가 갑자기 얼굴이 발개졌다. 연화를 고쳐야 한다는 급한 마음에 그녀의 견정혈에 악불군의 손이 닿는 것을 허락했는데, 그제야 악불군의 손길을 느낀 것이다.

“무리하신 것은 아니시지요?”

그녀의 얼굴이 발개지자 악불군이 놀라 물었다.

“기는 다 소군이 줬는데 뭐. 그런데 우리, 어디로 갈 거야?”

“강소로 갈 겁니다.”

“강소? 언제 갈 건데?”

“오늘 갔으면 합니다.”

“연화도 이런데, 오늘 가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을까? 저들이 돌아온 다음에 수하들이 다 죽고 연화가 없어진 것을 보면 이곳으로 쳐들어올 수도 있고.”

“아가씨께서는 저들이 이곳을 쳐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바쁘더라도 좀 더 기다리겠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길이 수월할 것입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매향에게 고변을 하라고 한 것은, 적들이 악양성 안으로 쳐들어오는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수하들을 모두 죽이라고 한 것도, 연화에 대한 분노도 있었지만 그렇게 함으로서 적들이 쉽게 준동을 못하게 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그 많은 수하들이 죽었다면 대단한 고수가 있다고 믿을 것이고, 그렇다면 신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마 이곳을 공격하지는 못할 거야. 그래도 그렇게 바쁠 이유는 없잖아?”

“아가씨께서 방금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진인사대천명이라고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늘도 도울 것이 아니겠습니까?”

악불군은 그녀에게 기를 넣으며 그녀의 기의 흐름이 너무 미약한 것에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담수련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 * *

수하들을 이끌고 악록산으로 달려가던 철무정은 갑작스런 활 공격에 자신이 너무 경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공을 모르는 군인들은 천 명이 몰려든다 해도 정면으로 마주칠 경우 철룡세가의 정예 무인인 그들에게 문제가 될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밤에 포위가 될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무림인들이 가장 꺼려하는 일 순위가 활 공격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어둠 속에서 쏘아 대는 활 공격은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거기다 몇 명이나 매복했는지는 모르지만 날아오는 화살의 수가 거의 소낙비 수준이었으니, 아무리 철무정이라 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가주님, 피하셔야겠습니다.]

흑살마검은 날아오는 화살을 검으로 막아 내며 다급히 말했다.

[속았다.]

[그게 무슨?]

[이자들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어. 우리가 갈 곳을 이들이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이냐?]

[그렇다면 악록산으로 간다는 것도 함정이군요?]

[감히 나를 속여!]

철무정이 이를 바드득 갈 때,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무정 정도의 고수가 아닌 이상, 연속으로 쏟아지는 수백 발의 화살을 막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흑살마검!]

[예!]

[후퇴한다.]

철무정은 더 버텨 봐야 수하들의 피해만 커진다고 판단하고는, 퇴각 명령을 내리고 말머리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급히 답한 흑살마검은 조그만 호각을 입에 물더니 세게 불고는 역시 몸을 날렸다.

삐이익! 삑! 삑!

가늘면서도 뾰족한 호각음이 울리자, 화살을 막아 대던 수하들도 몸을 돌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는 후퇴이기는 하지만,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전장에서 등을 돌리는 것이니 어느 정도 희생은 피할 수 없었다.

또다시 십여 명의 철룡단원들이 등에 화살을 맞고 쓰러졌다.

“쫓지 마라!”

도망치는 것을 보고 신이 난 군사들이 매복 지점에서 튀어나가며 추격하려 하자, 지휘자가 크게 소리쳤다.

비록 도망을 치고는 있지만, 무공을 모르는 군사들이 뒤를 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추격하려던 군사들이 발을 멈추자, 사방에서 백 명 가까운 무림인들이 튀어나오더니 경신술을 사용하며 철무정 일행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장사성의 친위 호위대인 장호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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