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88화>
88화. 드러나는 신위(2)
연화의 치료를 끝내고 삼화에게 이후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를 마친 담수련은 해가 올라오는 시간에 맞춰 객잔을 나섰다.
담수련을 안고 악양성을 무사히 빠져나온 악불군은, 그녀의 표정이 계속 안 좋자 불안한 듯 물었다.
“아가씨, 혹시 저 때문에 불편하신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소군 때문에 불편할 일이 뭐가 있어. 다만 시성란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파. 대공에게 사육되다시피 키워져서 어린 나이에 완전히 세뇌된 채로 본가에 들어왔어. 첩자인 것은 괘씸하지만, 어쩌면 불쌍한 아이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
수혈에서 깨어난 시성란은 처음에는 자신이 첩자라는 것을 완강히 부인했다. 하지만 철룡세가의 악록산의 출동이라는 빠져날 수 없는 완벽한 증거에 더 이상 우기지 못하고 토설을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중원인이 아니라 원나라 사람이라는 것까지 밝혀지자, 담수련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그녀를 죽이라는 명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같이 지낸 많은 좋은 추억이 있었지만, 배신자를 사적인 감정으로 살려준다면 그것은 다른 잠봉단원에게 배신해도 된다는 신호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지금 그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세상에는 그보다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가씨께서는 지금 우리의 지도자이십니다. 공정하게 죄가 있으면 합당한 벌을 주고, 잘한 것이 있으면 상을 주시면 됩니다.”
“아버지께서 소군에게 나를 자꾸 세뇌시키라고 했어?”
“아, 아닙니다.”
“난 지금 내가 변해 가는 것이 스스로도 싫어. 소군도 나를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마. 난 소군이 그냥 나를 담수련이라고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제게 아가씨는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 난 지도자 같은 거 능력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어. 지금이라도 가능만 하다면 사람들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서 숨어 살고 싶어.”
“……”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답을 하지 못했다. 그가 답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던 담수련은 한숨을 살짝 내쉬며 물었다.
“휴우~ 소군, 아버님께서 안전하시겠지?”
“가주님은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려움은 있겠지만, 분명 건강하게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래, 소군이 그렇게 말하니까 믿을게. 그럼 백설이를 불러 줘.”
“예!”
대답한 악불군이 하늘을 향해 길게 휘파람을 불자. 일각도 안 되어 백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달려왔다.
“기다렸구나?”
담수련은 백설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 듯 미소를 지며 갈기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가씨, 출발하시지요.”
악불군은 담수련이 말에 타는 것을 도와주고는 자신의 말에 올라탔다.
처음 나올 때는 그저 담수련을 종리화에게 데려다 주는 것이 임무였지만, 지금은 담수련의 병세를 고치기 위한 여정이었다.
“백설아, 가자!”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 백설이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악불군이 쫓기 시작했다.
둘이 나서는 지금 이 길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악불군과 담수련은 전혀 생각 못하고 있었다.
* * *
날이 밝자 악양은 완전 긴장에 빠졌다.
장사성의 군사들 수만 명이 뛰쳐나오더니 악양 성내는 물론 악양포구와 악양루로 가는 길목까지 모조리 뒤엎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항루에서 일어난 엄청난 싸움과 북망산에서 발견된 수십 명의 시신은 악양을 경악에 빠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오룡세가 중 철룡세가와 태룡세가의 무인들로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장항루에 도착한 철무정은 다른 수하들은 물론 막중혁까지 죽었다는 것을 알자 분노가 극에 달했다. 당장이라도 시성란을 보낸 객잔으로 찾아가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장사성을 돕는 무림인들이 곧 그들의 뒤를 쫓아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백 명 가까이 쫓아온 그들은 오히려 오십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는 철무정 일행을 놓치고 말았다.
아니,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느끼고 철무정 일행이 사라지는 것을 그냥 보고 있었다는 것이 맞았다.
그들 중 절정 고수도 몇 명 있었지만, 철무정의 무공은 그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철무정조차, 악불군이 있는 악양성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놈을 내가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악양에서 백 리 밖까지 피한 철무정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데 소가주님, 그 호위 무사 놈이 어떻게 막 단주님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철무정의 앞에 선 율사기는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화살을 무려 네 대나 맞고, 장호대의 검에도 두 군데의 검상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질문에 철무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막중혁은 속칭 말하는 무림 백대 고수 중에서도 중위권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잠룡세가에서도 호법급이나 상대할 정도의 고수인데 일개 호위 무사에게 죽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수하들의 시신이 놓인 위치를 봤지 않느냐? 최소한 열 명 이상이 도망을 쳤다. 철룡단의 무사가 도망을 치는 것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고수일 때뿐이다. 거기다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을 쳤음에도 결국 다 죽었다. 그놈의 무공은 최소한 나랑 맞먹을 정도다.”
“담 가주께서 직접 가르쳤다 해도 그렇게 되기는 힘듭니다. 거기다 일 년 전만 해도 마룡세가 소가주에게 몇 초도 못 버티던 자였습니다.”
율사기는 철무정을 호위하여 잠룡세가를 방문했었다. 그리고 악불군이 사도비류에게 당하는 장면을 직접 본 당사자였다.
“둘 중의 하나겠지. 자신의 실력을 감췄거나, 아니면 일 년 사이에 그렇게 강해졌거나…….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율사기.”
“예!”
“아버님께 전서를 보내라.”
“뭐라고 할까요?”
“본 가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일이 벌어진 것 같다. 철룡단 본대와 철사단 두 개 대를 보내 주셨으면 한다고 써라.”
“예에?”
율사기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철룡대 본대면 그 수만도 오백 명에 달했다. 거기다 철사단이라면 추적과 암살에 최적화된 철룡세가의 비밀 무력 집단이었다.
“본 가는 위대하신 칭기즈 칸의 혈통을 타고 났음에도 방계인 대공 전하에게 언제나 한 수 접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대공 전하의 무공이 너무 높았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공 전하는 후계자로 본 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다. 그런데 본 가의 염원을 풀어 줄 수 있는 단서가 나타났다. 우리가 반드시 먼저 가져야 한다.”
“설마 그 호위 무사 놈이 그 정도로 중요한 자란 말입니까?”
“처음에는 우리에게 담수련을 잡으라고 했으면서, 그 직후에 갑자기 수배전단을 뿌렸다. 난 그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 당장 전서 날려.”
“예!”
율사기가 급히 밖으로 나가자 철무정은 무표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공 전하께서 노린 것은 담수련이 아니라 그 호위 무사 놈이었어…….”
* * *
새벽에 출발한 악불군과 담수련이 강소성에 도착한 것은 밤이 되어서였다.
“소군, 목적지가 어디야?”
“홍택호 근방에 있는 운악산 사신곡(死神谷)이라는 곳입니다.”
“사신곡? 무서운 사람들이 있는 곳 같네?”
“무서운 사람이라기보다는 불쌍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랍니다.”
“불쌍한 사람?”
“예, 나병 같은 죽을병에 걸린 사람들이 찾아가는 골짜기라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의원이 있을 만한 장소네. 하지만 이미 삼십 년 전이라면서, 단서가 있겠어?”
“단서가 전혀 없는 것보다는, 잡을 지푸라기라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소군은 생각보다 긍정적이네.”
“제가요?”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어. 그런데 삼십 년이면 십 년이 세 번이나 지난 긴 세월이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거의 가망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거든! 하지만 소군은 거기서 희망을 보는 것 같으니 말이야.”
악불군은 그녀가 자신의 본심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에둘러 말했다는 것을 느꼈다.
‘긍정적이라서가 아니라, 아가씨를 낫게 하고 싶은 소망 때문입니다.’
악불군은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들은 달려오는 동안 여러 차례 방향을 바꾸었고 주루조차 들르지 않았다. 그들의 뒤를 따르는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였다.
“아가씨께서 지시한 대로 움직인 덕인지, 우리를 쫓는 자들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지형과 상황을 봐 가며 방향을 바꾼 것은 모두 담수련이었다. 그녀는 북망산에서 천연진을 본 후 자신의 지식과 접목해, 진을 치지 않고 주위 지형을 이용해 방향만 바꿔 적의 눈을 피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식을 이번 기회에 사용해 본 것이었다.
“생각보다 실수를 많이 했는데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네. 그런데 운악산이 어딘지는 알아?”
“아까 개방의 제자에게 알아 두었습니다.”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약간은 걱정과 의문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개방은 잠룡세가에서 영웅회와 더불어 최대의 적으로 여기던 세력인데, 그들이 우리의 정체를 알면 문제가 안 될까?”
“제가 도와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사해신개 어르신께서 자발적으로 죽패를 준 건데 문제 삼겠습니까?”
“그래도 난 좀 불안해. 무림의 정파들은 남을 속이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던데?”
“속이면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 말을 안 했을 뿐이고, 저들은 묻지 않았습니다. 속인 것이 없으니 그 문제는 염려 안 하셔도 되실 것입니다.”
“어차피 편법이잖아? 난 소군이 나 때문에 적이 될지도 모르는 개방에 가서 도움을 청하고 그런 것이 싫어.”
“저 산이 운악산인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에 답 없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홍택호는 동정호보다 작다고는 하지만 대단히 큰 호수였고, 근처에는 수많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운악산은 산봉우리가 특이해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았어. 가자.”
악불군이 더 이상 그 문제로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느끼자 담수련은 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백설이 신난다는 듯 앞으로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다행인 것은 백설이 악불군이 탄 말이 따라올 정도의 속도로 조절한다는 것이었다.
* * *
자욱한 연기가 가득 찬 동굴 안.
최소 백 개는 넘어 보이는 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유난히 태양혈이 불룩 뛰어나온 노인이 십여 명의 의원들로 보이는 자들과 함께 서 있었다.
“아직도 못 찾았느냐?”
노인의 말에 바로 옆에 붙어 있던 중년인이 급히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저희들이 지닌 모든 의학 지식을 동원해 배합했지만 아직까지는 가시적인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빼놓은 약초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됩니다.”
중년인의 말에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적어 놓은 의서에서 찾아낸 것이니, 빠진 약초는 분명히 없다.”
“그렇다면 배합의 문제인데, 이미 수천 번에 걸쳐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습니다. 아무래도 배합 비율을 알아야만 할 것 같습니다.”
“명색이 명의 소리를 듣는 놈들이 열 명이나 모였는데, 겨우 열 가지 남짓한 약초의 배율조차 찾아내지를 못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노인의 질책에 중년인은 물론 옆에 있던 자들도 급히 허리를 숙였다. 노인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그때 밖에서 등에 부채꼴로 단창 십여 개를 멘 노인이 들어왔다.
“원주님, 유복통이 불리한 상태에서 전쟁이 멈췄다고 합니다.”
“유복통이 불리하다고?”
원주라 불린 노인은 예상치 못한 보고인 듯 고개를 갸웃하며 반문했다.
“저도 의아했지만 분명 그렇다고 합니다.”
“부원주는 내 집무실에 가 있어라. 나도 곧 나가마.”
“예!”
부원주가 나가자, 원주는 의원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강하게 말했다.
“열 번 넘게 실패할 경우 어떻게 되는지는 너희도 알 게다. 이제 두 번 남았다. 저 관 안으로 직접 들어가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성공시켜라!”
모두의 얼굴이 공포로 사색이 되는 것을 본 원주는 몸을 돌려 동굴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