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89화 (89/472)

<천검지애 89화>

89화. 격변(1)

집무실에 들어선 원주는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유복통의 군사가 곽자흥의 두 배가 넘는다고 들었는데 유복통이 밀리다니, 우리의 예상과 너무 벗어나는 것 아니냐?”

“곽자흥의 수하 중 주원장이라는 자가 있는데, 그자의 용맹이 거의 항우와 비견된다고 합니다. 유복통의 군사들이 그자 때문에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성주님께서 지금 이곳 반란 세력에 대해 관심이 아주 많으셔서 정확한 상황을 파악해서 정보를 올리라고 하셨는데, 분석이 이렇게 많이 틀리면 나를 어떻게 보시겠느냐?”

중원에서 성주로 불리는 무림인은 구천마성의 구천마황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대화를 나누는 자들은 이곳 운목산의 비밀조직을 맡고 있는 원주 채관욱과 부원주 조충병이었다.

“죄송합니다. 솔직히 지금 상황이 매우 복잡합니다. 우선 유복통이 현재 가장 강한 군세를 이끌고는 있으나, 원나라와 물밑으로 연계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어, 정파에서는 진우량이나 장사성을 지지할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채광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유복통은 원나라 황실에 신임을 받아 왕야 칭호까지 받은 적도 있는 자다. 기회주의적인 성격에 권력 욕심까지 강해, 원나라가 밀린다 싶으니까 재빨리 태세를 전환하고 지금은 중원을 대표하는 것처럼 반기를 든 것이다. 하지만 불리해지면 언제든지 다시 원나라에 붙을 놈이니, 정파에서 지지하기는 힘들겠지. 그런데 만약 곽자흥이 이번 전쟁에서 유복통을 이긴다면 또 달라지지 않겠느냐?”

“곽자흥이 이번 전쟁을 이긴다 해도, 영웅회를 비롯한 정파에서 곽자흥을 대놓고 지지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유는?”

“곽자흥은 무공이 제법 강하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도 상당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소심해서 큰일을 도모하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주원장은 어떠냐?”

“근래 다른 반란군 세력들에게 꽤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기는 했지만, 좀 과격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나라에 문제가 있긴 한 것 같습니다.”

“왜?”

“지금 유복통과 곽자흥이 전쟁을 벌이는 곳이 홍택호 근방입니다. 그곳에는 원나라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데, 반란군끼리 대놓고 싸우고 있는데도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실지로 양민들로 이루어진 허접한 반란군들에게조차 깨지고 있다는 보고가 사방에서 속속 들어오고 있습니다.”

“대원제국으로 불리던 일 갑자 전의 원나라 군사들은 한 명 한 명이 모두 전사(戰士)였지. 특히 기마병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다. 하지만 중원 생활에 맛이 들면서 더 이상 예전의 원나라 군사가 아니게 되었다.”

“드디어 원나라도 무너질 시간이 된 것 같은데, 본 성도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면 알겠지만, 반란군들의 힘이 너무 비슷하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으니, 원나라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면 필연적으로 서로 간에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영웅회도 아직은 확실하게 한 곳을 지지하지 않고 있다고 하니, 우리도 너무 빨리 한 곳을 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우리 연구의 결과물을 빨리 내놓으라고 재촉을 하시니 좀 당황스럽긴 하구나.”

“원나라의 그 커다란 압박 속에서도 삼만이 넘는 수하들을 거느린 거대 문파를 만드신 분인데, 갑자기 왜 그러실까요?”

“영웅회와 혈해사계의 움직임이 빨라진 모양이다. 지금 정세가 대단히 급박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겠지. 우린 성주님께서 어떤 결정을 하시든 그것만 따르면 된다.”

“영웅회와 정파 무림은 지금 각 지역의 모든 반란군들과 조금이라도 연계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약간씩은 그들과 친분을 다져 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 장사성과는 지지를 천명하지만 않았을 뿐, 아주 긴밀하게 협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파 놈들은 앞으로는 명분을 따지고 정의를 외치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실리에 아주 민감하지. 쉽게 정하지 못할게다.”

“원주님, 외곽에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때 집무실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라.”

채동욱의 허락이 떨어지자 중년인 한 명이 들어서더니 포권을 했다.

“무슨 일이냐?”

채동욱이 다시 물었다.

“어떤 놈들이 뜬금없이 사신곡을 찾고 있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신곡을?”

보고를 들은 채동욱의 검미가 바짝 좁아졌다.

“원주님, 혹시 눈치를 챈 걸까요?”

조충병도 놀란 눈으로 채동욱을 보며 물었다.

“허곡.”

“예! 원주님!”

중년인은 채동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급히 대답했다.

“어디서 온 놈들인지는 알아냈냐?”

“아직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허곡의 답에 채동욱은 의아한 표정으로 조충병을 한 번 보더니 다시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도 보고가 안 들어왔냐?”

“그건 들어왔습니다. 한 명은 왜소한 학사이고, 또 한 명은 아주 건장한 무인이라고 합니다. 더해 아주 좋은 말들을 타고 있다고 했습니다.”

“찾는 이유도 아직은 모르겠구나.”

“예! 지금 운악산 주변을 돌면서 화전민이나 약초꾼들을 만나면 계속 뭔가를 묻고 있다는 보고만 받았습니다.”

“영웅회나 어찰단은?”

“그 둘은 분명 아니라고 했습니다.”

“원주님, 운곡산 주위는 지금 한창 전쟁 중입니다. 절대 평범한 자들이 아닐 것입니다.”

조충병의 말에 채동욱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말했다.

“이 근처에서는 완전히 잊혀진 이름인 사신곡을 갑자기 찾는 것부터가 평범하지 않다고 봐야겠지. 그래, 그자들 나이는 어느 정도 된다고 하더냐?”

“정확하지는 않지만 둘 다 이립은 안 된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립도 안 된 어린놈들이 왜 사신곡을 찾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채동욱은 허곡을 보며 다시 말했다.

“그놈들이 눈치 못 채게 사신곡이 어디인지 자연스럽게 알려 주고, 둘만 곧장 사신곡으로 가는지 아니면 다른 놈들을 만나 같이 움직이는지 알아봐라.”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둘만 오면 그냥 오게 놔두고, 다른 자들과 만나 같이 온다면 곧장 보고해라.”

“예!”

명을 받은 허곡이 나가자 조충병이 물었다.

“사신곡은 본 성의 특별 금지 구역인데, 외인에게 알려 줘도 될까요?”

“사신곡이라는 이름 자체를 지워 버린 것이 이십 년 전이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에 사신곡을 찾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냥 넘길 일이 아니다.”

“저는 괜히 건드려 부스럼을 만드는 일은 아닐지 그게 걱정이 됩니다.”

“요즘 인실동에 필요한 인원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선 알아보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판단되면 인실동에 실험 도구로 넘기면 된다.”

“알겠습니다.”

* * *

“소군.”

“예.”

“좀 이상하지 않아?”

“느끼셨습니까?”

운악산에 들어선 이후 그들은 여섯 군데의 화전민촌과 이십 명이 넘는 약초꾼을 만났다.

그중에는 삼십 년 넘게 운악산에서 살았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사신곡이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악불군도 이상하다고 느꼈다는 듯 반문하자,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삼십 년 전이면 분명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 이름조차 완전히 잊힐 정도로 긴 시간은 아니야. 거기다 사신곡은 중병에 걸린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라며? 그런 곳은 여간해서 잊혀지는 곳이 아니야. 내가 느끼기에 이건 그냥 감추는 정도가 아니라, 누군가 계획적으로 철저하게 지워 버린 것 같아.”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그건 모르지. 하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새편작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아가씨, 아무래도 좀 더 안으로 더 들어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행히 운악산의 크기가 그리 크지 않으니, 계곡들을 모두 뒤지다 보면 단서가 나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사신곡에 대한 단서가 나온다 해도 새편작이란 분을 찾을 수 있겠어?”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각성을 한 그녀의 뇌조차,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수십 년 전의 들었던 소문으로 지금 뭔가를 찾는 것은 어렵다고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여기까지 따라온 것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어떤 수단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악불군과 단둘이 강호를 주유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좋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더 돌아보고, 그래도 찾지 못한다면 포기하겠습니다.”

그러나 악불군은 간신히 잡은 단서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었다.

“아니야, 최소한 사신곡이 있었는지까지는 조사해 보고 가. 나도 이들이 이러는 이유가 궁금해졌어.”

담수련도 악불군의 간절함이 자신에 기인함을 아는지라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그가 실망할 수도 있단 사실이 마음 아플 뿐이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말에 목례를 하고는 주위를 한 번 살폈다. 그리고 말했다.

“가시죠.”

둘이 더 깊숙한 산속으로 사라지고 반 각쯤 지났을까…….

두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그들은 백인막의 구 호와 십삼 호였다.

[도대체 뭘 찾는데 강소까지 급하게 와서는 돌아다니는 거지?]

십삼 호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움직임 속에 목적지가 특정되지 않았다는 것을 느끼자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뭔가 중요한 것을 찾는 것은 분명한데……?]

구 호도 의아한 듯 반문했다.

구 호가 악불군을 추적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운이었다.

악양루에서 둘의 종적을 놓쳤던 구 호는 백인막 특유의 추적술을 이용해 악불군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는 간발의 차이로 계속 악불군을 놓치고 말았다.

어쩌면 놓쳤기 때문에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는 도착하는 곳마다 마주친 시신들을 보며 경각심이 점점 커져 갔다.

특히 태룡세가의 정예 무인인 허설필이 이끌던 태룡무단의 시신 앞에서, 그는 정면 대결로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생포하기는커녕 죽이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고심하던 그가 숲속에서 돌아다니던 백설을 발견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백설을 발견한 그들은 백설을 잡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잡을 수 없었다. 고작 말 주제 기감이 어찌나 예리한지, 은실술조차 백설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구 호는 백설을 생포하는 것보다 추적을 쉽게 하는 방법을 취하기로 계획을 바꿨다.

그렇게 천리향을 백설에게 묻히는 데 간신히 성공한 구 호는 우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십삼 호를 만나러 갔다. 사 호, 오 호와 합류한 후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사 호와 오 호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갑자기 천리향의 향기가 악양을 벗어나 외부로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어찌나 빠르게 움직이고 수시로 방향을 바꾸는지, 뒤를 따르는 것도 만만치 않았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움직이던 그들이 갑자기 운악산 안으로 들어서더니 반나절이 넘게 헤매고 있었다.

[사 호와 오 호가 우리가 남긴 표식을 따라오고 있을까?]

[사 호와 오 호의 능력은 우리보다 월등하다. 당연히 잘 따라오고 있을 게다.]

[빨리 가자. 벌써 말발굽 소리가 사라진다. 또 놓치면 골치 아프다.]

십삼 호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이던 구호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저게 뭐지?]

구호는 창백해진 얼굴로 십삼 호에게 한 나무를 가리켰다.

[뭔데, 그래?]

구호가 가리킨 나무에는 네 개의 글자가 적혀 있었다.

종지필사(踵至必死)

‘따라오면 죽는다?’

구 호와 십삼 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무로 다가갔다.

방금 조각칼로 새긴 듯 깨끗한 나무속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글자들.

하지만 말을 타고 대화를 나누던 악불군과 담수련이 적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거리였다. 거기다 악불군은 무기도 꺼내지 않았었다.

[설마 우리에게 남긴 걸까?]

십삼 호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글자를 자세히 살피던 구 호는 손가락으로 글자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분명 방금 새긴 거야……. 도대체 언제 뭘로……?’

잘 드는 조각도로 조심스럽게 깎는다 해도 이 정도로 글자의 주위가 매끈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실력으로는 불가능했다.

‘도대체 이자의 정체가 뭐야? 이런 능력으로 왜 호위 따위를…….’

구 호는 악불군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경악에 찬 눈으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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