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90화 (90/472)

<천검지애 90화>

90화. 격변(2)

[더 이상 근접 미행은 위험할 것 같다. 사 호와 오 호가 올 때까지 백 장 거리를 두고, 놓치지 않을 정도로만 따라가자.]

[백 장?]

구 호의 말에 십삼 호가 불만 섞인 목소리로 반문했다.

[백 장 안으로만 안 들어가면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거야 거기서 한 말이고, 지금은 상황이 다른데 그게 계속 유효할까? 그리고 백 장 밖이면 저놈이 누구를 만나고 무슨 짓을 하는지 알 수가 없잖아?]

[그동안 본 것으로 보면 스스로의 말에 아주 충실한 자다. 백 장이라는 거리도, 따라오는 것은 상관없지만 누구를 만나고 뭐를 하는지는 보지 말라는 의미로 정한 걸 게다.]

[천하제일의 살수 집단인 백인막의 특급 살수 둘과 일급 살수 이십 명이 이렇게 기회도 잡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조차 조심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군.]

십삼 호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그렇다고 먼저 움직일 생각도 없는 듯했다.

‘도대체 이자의 사문이 어딜까?’

구 호는 새겨진 글자를 손으로 다시 한번 만지며 생각을 정리했다.

* * *

산속으로 향하던 담수련과 악불군은 반 시진도 안 되어 한 명의 노인과 세 명의 중년인으로 이루어진 약초꾼 무리와 마주쳤다.

그들은 악불군을 보자 겁을 먹은 듯 급히 허리를 숙였다.

[소군, 이들은 사신곡에 대해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보이십니까?]

담수련의 전음에 악불군은 놀란 눈으로 반문했다.

악불군이 보기에 그들은 무공을 모르는 약초꾼들이 분명했다.

[그냥 보자마자 느껴지네? 가서 물어봐.]

담수련도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스스로도 의아한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전음을 마친 악불군은 말에서 내리더니 그들에게 포권을 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약초꾼들은 악불군이 인사를 하자 허리를 더 숙였다.

“아이쿠…… 소, 소인들은 이 산에서 약초를 캐는 약초꾼들입니다. 저희들이 무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하십시오.”

무림인으로 보이는 둘의 모습에, 중년인 중 한 명이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나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운악산 지리를 잘 몰라 길 좀 물으려고 할 뿐입니다.”

“길이요? 그럼 물어보십시오.”

악불군이 최대한 친절하게 물었지만 산속에서 만난 등에 무기를 멘 무림인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일 뿐이었다.

“운악산에 사신곡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들어 보셨습니까?”

“사신곡이요?”

“예, 사신곡입니다. 아십니까?”

중년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뭔가 기억에 난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전에 그렇게 불린 곳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미 없어진 지 꽤 됐을 것입니다.”

‘아가씨의 머리가 놀라울 정도로 똑똑해지고 있어……. 정말 큰일이구나.’

노인의 대답에 악불군은 점점 다급해 옴을 느꼈다.

수십 명에게 물어도 모른다, 처음 듣는다라는 말만 들었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러나 악불군은 그 사실보다, 담수련이 그들을 보자마자 그들이 사신곡에 대해 말할 것을 알아챘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없어졌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골짜기 자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까?”

“당시 어린 나이였던지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골짜기가 어떻게 없어지겠습니까? 거긴 사람이 못 가는 곳이 되면서 사신곡이라는 이름까지 바뀌었지요. 지금은 불귀곡(不歸谷)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그때 중년인의 뒤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노인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불귀곡이요? 들어가면 못 나온다는 뜻입니까?”

“당시는 제가 농사를 짓고 있어서 가 보지는 않았지만, 약초꾼들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했습니다. 좋은 약초가 아주 많이 자라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왜 불귀곡이 된 겁니까?”

“사신곡에는 몸이 아파도 의원을 찾지 못하는 가난한 우리 같은 천민들을 치료해 주시는 신의(神醫)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거기 살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고 하더군요.”

“다 죽어요?”

“예.”

“이유가 뭡니까?”

“그거야 모르지요. 소문은 그렇게 퍼졌는데 그곳을 찾아간 약초꾼들이 모두 돌아오지 않으니까, 무서워서 아무도 가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근처에서 귀신까지 나오면서, 아예 그쪽은 발길도 안 하게 되었지요.”

“혹 귀신을 직접 보셨습니까?”

“본 사람은 다 미쳐 버렸는데, 제가 봤다면 아직까지 살아 있었겠습니까? 사신곡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사람들이 꺼려하면서, 그렇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졌지요.”

악불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렇겠군요. 그럼 그곳이 어디인지는 아십니까?”

“거기를 가시려고요?”

단순한 악불군의 질문에, 노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마치 들으면 안 될 것을 들은 것처럼.

“가면 안 됩니까?”

“거기에 귀신도 있고…….”

말을 흐리는 노인을

“제가 알아볼 것이 좀 있습니다.”

‘알아볼 것?’

악불군의 대답에, 허곡의 명을 받아 이번 일을 주도하고 있던 중년인이 의아한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긴 너무 오랫동안 버려져 있던 곳이라, 이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수풀이 우거져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저도 어디쯤인지만 알지, 확실하게는 모릅니다.”

“어디쯤인지만 말씀해 주셔도 충분합니다.”

“이 오솔길을 타고 오십 장 정도 올라가시다 보면 봉우리 두 개가 나타납니다. 사신곡은 그 봉우리 사이에 형성이 되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왕래가 없던 터라 나무가 길을 덮어, 길을 찾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악불군은 노인이 가리킨 봉우리를 쳐다보더니 포권을 하며 감사를 표했다.

“어르신 덕에 좋은 정보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말을 타자 담수련은 앞장서서 노인이 가리킨 봉우리 쪽으로 백설을 몰았다.

둘이 사라지자 중년인이 노인과 다른 약초꾼을 보며 말했다.

“수고했다. 너희는 이만 가 보거라.”

“예!”

중년인은 노인과 약초꾼들이 사라지자 약초 담는 망 안에서 조그만 새 한 마리를 꺼내 하늘로 날렸다.

* * *

“아가씨 짐작이 맞았습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말을 몰며 악불군은 진심 어린 칭찬을 했다.

담수련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나타났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담무룡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다. 하지만 미소를 보인 적은 거의 없었다. 괜히 애 늙은이라고 불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악불군이 칭찬을 하면 그냥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대단하긴 뭐가 대단해? 잠시 생각해 보니까, 내가 그런 추측하게 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어.”

담수련은 악불군이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을 듣고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어떤 예상을 할 때 그 이유를 모르고 하는 말은 말 그대로 추측일 뿐이기에, 다음에도 맞는다는 보장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어떤 이유셨습니까? 저도 알아야 다음에 상대를 판단할 때 써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의 연기는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지만, 우리를 보고 놀란 것은 실수였어. 우리는 분명 천천히 말을 몰았고, 그들은 이미 우리를 봤어야 했어. 그런데 마치 처음 본 것처럼 놀랐어.”

“그들이 우리를 노리는 자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약초꾼이었어. 우리가 그동안 사신곡에 대해 물은 자들은 대부분 약초꾼과 환전민들이었어. 그러니까 사신곡에 대해 묻기를 바라고 나타났다고 봐야지. 그리고 그 노인, 일개 약초꾼치고는 말에 아주 조리가 있었어. 약초꾼이 아니거나, 그렇게 답하라고 훈련을 받고 왔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다시 감탄의 표정을 지었다.

“이제 아가씨 앞에서 뭔가를 숨기려고 하는 자들은 다 걸릴 것 같습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고. 그런데 저쪽은 백설이는 못 들어갈 것 같던데?”

“백설이는 좀 놀라고 풀어 주고 우리만 가야겠지요.”

* * *

“원주님, 연락이 왔습니다.”

인체의 그림이 잔뜩 그려진 책자를 펼친 채 뭔가를 연구하던 원주는, 부원주가 들어서자 고개를 들었다.

“뭐라고 왔느냐?”

“같이 온 자들은 없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래? 무공 수위는 어느 정도 된다고 하더냐?”

“제법 강한 일류급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절정 고수급에도 들지 못한다는 말이냐?”

“예.”

“나이는 좋은데 무공이 좀 약한 것이 안깝군. 그럼 곡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그냥 둬라. 이유는 알아보고 처리해야겠지.”

“예!”

* * *

이제 백설이 없을 경우 악불군의 등에 업히는 것이 당연한 듯, 담수련은 악불군의 등에 업혀 있었다.

처음에 매우 부끄러워하던 것도 이제 사라졌는지,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까지 보이고 있었다.

“소군, 잠깐 서 봐.”

노인이 말한 봉우리 사이로 가까워지자 담수련이 갑자기 악불군을 세웠다.

“왜 그러십니까?”

악불군의 등에서 내린 담수련은 사방을 유심히 한 참 보더니,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땅바닥에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곡선과 직선이 이리저리 얽히는 복잡한 기하학적 그림을 그려 나가던 그녀는 뭔가 발견한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아~ 여기서 또 천연진을 보네.”

“천연진이요?”

“응, 분명해. 거기다 이곳에는 누군가 인공적으로 또 다른 진을 가미했어.”

가만 생각하던 악불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번에 천연진에 인공진을 가미하면 굉장히 무서운 진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어.”

“그렇다면 지금 이 주위가 매우 위험하다는 의미 아닙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하지만 그것은 진을 모르는 사람들에 한해서야. 나 같이 진의 원리를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적이 위험해졌다고 해야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잘난 척을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악불군은 그녀의 말을 언제나 액면 그대로 믿었다.

“아가씨 덕에 저도 편할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았으니까 다시 가자.”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등을 내밀었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잠깐 서 봐.”

“예!”

숲을 헤쳐 나가던 악불군을 멈추게 한 담수련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약간 비스듬하게 자란 나무 있지?”

“예, 보입니다.”

담수련이 말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비스듬하다고 생각하기 힘든 나무였다.

“그게 천연진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심은 나무야. 진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저 나무가 약간 휘어진 것을 발견하기 힘들어. 저 나무가 똑바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방향을 약간 바꾸게 돼. 나는 앞으로 계속 들어간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저 안으로 못 들어가는지.”

“그렇군요.”

진에 대해 평소 악불군이 관심이 많은 것을 알기에, 담수련이 실전적으로 진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고 위를 봐 봐. 빛은 들어오지만 해는 안 보이지?”

“그러고 보니 어둡지는 않은데 해는 안 보이는군요.”

“나뭇잎 사이로 들어오는 빛만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면 무조건 틀리게 조작이 되어 있어.”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완전 헤맬 뻔했습니다.”

“소군.”

“예.”

“아무래도 사신곡에 뭔가 비밀이 있을 것 같아. 그냥 들어가면 위험할 것 같은데…….”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 때문에 확실치 않은 수십 년 전의 정보를 믿고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별로 달갑지 않은 듯했다.

“저는 그래서 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솔직히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이곳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변화가 있는 걸 보면, 오히려 새편작에 대해 알아낼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새편작은 천하가 인정한 신의였다. 누군가 사신곡을 비밀 요새화했다면 그것은 새편작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즉각 눈치챘는지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그래. 가 볼 곳은 가야지, 후에 찝찝하지 않을 거야. 이쪽으로 가.”

“아가씨, 이제부터 제가 알아서 가 보겠습니다. 혹시 잘못 가면 그때 고쳐 주십시오.”

지금 악불군은 진법에 대해 직접 겪어 보고 돌파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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