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1화>
91화. 좁혀지는……(1)
“전하께서 오시니 일이 정리가 되네요. 전하의 자리가 얼마나 큰지를 저희에게 일깨워 준 날이었습니다.”
대공을 맞이한 금잔화는 환한 미소를 지며 포권을 했다. 대공을 만나면서 오체투지를 안 해도 되는, 몇 안 되는 수하 중 한 명이 그녀였다.
“앉거라.”
대공은 금잔화의 인사를 받지도 않고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금잔화가 앞에 앉자 대공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모두가 밖으로 나갔다.
“제게 비밀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 봐요?”
“전단을 가지고 오너라.”
언제나 금잔화를 보면 미소를 짓던 대공이었지만 오늘은 상당히 사무적이었다.
금잔화는 대공이 원할 것을 알고 있었는지, 즉시 전단을 꺼내 그의 앞에 펼쳤다.
“천하에 너와 미모를 견줄 만한 계집이 또 있을 줄은 몰랐구나.”
대공은 담수련의 용모파기를 보더니 검미를 찌푸렸다.
“거기다 청초하기까지 하니, 소녀가 남자라도 반할 정도였습니다.”
“이놈이 너와 철무정이 원한다던 담수련의 호위인 악불군이냐?”
“예.”
“이놈의 용모파기는 어떻게 구했느냐?”
“둘의 얼굴을 다 본 사람은 저밖에 없어서, 제가 직접 그려서 화공들에게 넘겼습니다.”
“남자들은 발가락에 낀 때만큼도 인정 안하는 네가 용모파기를 그릴 정도로 얼굴을 기억하다니, 확실히 호위 주제에 특이한 놈이긴 했던 모양이구나.”
“보통 남자들하고 다르긴 했어요.”
“그놈에 대한 다른 보고는 없었느냐?”
“전단을 뿌린 이후 상당히 많은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그자가 어찰단을 죽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아서 고심 중이었습니다.”
“고심할 이유가 뭐냐?”
“제가 그를 만난 것은 담수련의 성인식 날입니다. 당시 제가 본 그는 초일류급의 고수라고 보기에도 부족했습니다. 만약 천목산에서 어찰단을 죽인 자와 동일인이라면 저를 속였거나 무공이 일취월장했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그자가 제 눈을 속일 수 있었다고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무공이 늘었다고 보기에도, 일 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짧아 분석에 많은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일 년이라…….”
대공은 일 년이라는 단어를 되뇌었다. 초일류도 못되는 무인이 일 년 만에 초절정 고수를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급격하게 무공이 늘 수 있을까……
대공은 자신이 한창 무공이 늘 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은 어떤 결론을 냈느냐?”
“여전히 의문점이 많습니다. 전하, 혹시나 해서 여쭙습니다. 담무룡이 진짜 천륭검보를 가지고 있었다면, 담수운이나 자신의 종가 사람이 아닌 일개 호위에게 익히게 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담무룡은 자신의 가문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종가에 대한 애착이 아주 심했다. 자신의 아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제자까지 들이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런데 제자도 아닌 호위에게, 다른 무공도 아닌 천륭검보를 익히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대공은 부검 서류에 적힌 상처에 대한 분석을 보자마자 천륭검법이 사용되었다는 판단을 하고는 당장 악불군에 대해 알아보았다.
하지만 전혀 중요인물이 아니었던 악불군에 대한 정보는 전무하다시피 했다.
결국 잠룡세가에 심어 놓은 간세까지 호출하여 알아보았지만 여전히 의아했다. 담무룡과의 연결고리 거의 없었던 것이다.
“제가 계속 결론을 내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어요. 제가 보고받은 것이나 직접 담무룡을 보고 느낀 대로라면, 그는 천륭검보를 없애면 없앴지 다른 누군가에게 익히도록 할 자가 아니에요.”
금잔화의 말에 대공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놈이 천륭검법을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수백 년간 누구나 인정하는 천하제일의 검공으로 알려진 천륭검법.
그런데 특이하게도 천륭검법의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본 사람은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대공이었다.
대원 제국이 파죽지세로 천하를 유린하기 전, 중원은 구파일방의 지휘 하에 일사불란하게 송나라에 협력하고 있었다.
초원의 전사라 칭하며 세력을 불려 나가던 원나라의 무림인들이 새외 무림까지 통합한 후 대대적인 중원 침공을 예고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이천 년 시간 동안의 중원 무림은 마교를 필두로 한 새외 무림의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중원은 정파와 마도가 힘을 합쳐 그들을 물리쳤다.
하지만 이번 침공은 지금까지의 침공과는 차원이 달랐다. 무림만이 아니라 나라간의 전쟁이 더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천하의 향배를 결정할 아주 중요한 사건이 벌어졌다.
원나라가 남송으로 진격하기 일 년 전, 원나라의 수호 조직인 태양천의 천주가 네 명의 중원 최고의 고수들에게 도전장을 보낸 것이다.
상대는 무림의 마지막 희망이나 마찬가지였던 사대 세력의 주인들이었다. 당시 무림의 절대 무황으로 불리는 네 명의 절대자.
무황, 마황, 사황 그리고 검황이었다.
태양천주와 사대 무황들이 대결하는 자리에는 각자 한 명씩만 대동하기로 했다. 덕분에 태양천의 소천주이자 수제자였던 대공은 모든 대결을 볼 수 있었다.
그 싸움의 승패는 아주 중요했다. 태양천주가 질 경우, 원나라는 그들 세력이 관장하는 지역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반대로 그가 이길 경우 사대 세력은 일 갑자 동안 무림 활동을 하지 않기로 약속을 한, 실질적으로 천하를 건 결투였다.
대결의 승패는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그들 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 후 원나라가 남하를 시작하고 사대 세력 중 삼대 세력이 갑자기 활동을 멈추면서, 무림만 믿고 있던 남송은 순식간에 망해 버렸다.
무황들이 태양천주에게 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활동을 하며 원나라를 불안하게 한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천륭검가였다.
파죽지세로 전 세계를 밀어붙이던 원나라조차, 구문황이 죽기 전까지는 천륭검가 주위 천 리를 감히 침범하지 못했다.
태양천주가 이기지 못한 단 한 사람이 바로 천륭검가였기 때문이었다.
하나, 군림하지 않는다는 전통과 정치 체계의 변화에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수백 년에 걸친 정책 때문에, 천륭검가는 대놓고 원나라와 적대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원나라도 건드리지 못하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원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기에, 원나라로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구문황과의 대결을 마치고 돌아온 태양천주는 그때 입은 상처를 결국 치료하지 못하고 십 년 만에 죽고 말았다.
대공이 천륭검가를 없애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은 이유였다. 그리고 천륭검보는 반드시 없애거나 자신이 가져야만 하는 최대의 목적이 되고 말았다.
어찰단 부검 보고서에 나타난 상처는 대공이 태양천주와 구문황간의 대결에서 보았던 검식이 보인 모양과 아주 흡사했다.
대공의 심각한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피던 금잔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대공께서 허락만 해 주신다면 제가 직접 악불군을 추적해 보려고 합니다. 직접 보고 그를 만나 확실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금잔화의 뜻밖의 제안에 대공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직접 움직인다면 누구보다도 믿을 만했다. 하지만 지금 중원의 상황을 감안하면, 아무리 그 일이 중요해도 그녀를 뺄 수가 없었다.
“지금 구천마성과 혈해사계가 슬슬 움직이고 있다. 지금 네가 이 일에 끼어들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으니, 우선 오룡세가에게 맡겨 둔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잠룡세가에 대해 조사가 끝났는데, 나온 것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잠룡세가가 가진 모든 자산에 대한 서류를 하나도 발견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잠룡세가의 유동 자산만 해도 최소한 금자 이십만 냥에 달한다고 보고를 받았는데, 그 많은 돈이 없다는 것이냐?”
“하루 이틀에 걸려 처리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들여 은밀하게 빼돌린 것 같아요. 땅과 건물들 역시 우리가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현금으로 전환하는 것은 어렵다는 분석입니다.”
잠룡세가는 원나라에 아주 큰 도움이 되는 조직이었다. 그것을 대공의 독단으로 제거하면서 그가 황실에 내세운 명분이, 빈약한 황실의 재정을 단숨에 채워 줄 수 있을 만큼 잠룡세가의 재산이 많다는 것이었다.
“문창현도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는 것이냐?”
“문창현은 군사일 뿐, 재정 문제는 총관인 유영필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영필은 어찌 됐느냐?”
“전하께서 직접 오셨다는 말을 듣고도 협력을 거부하고 담무룡에게 보고하려고 해, 방조위와 국대광이 어쩔 수 없이 제거했다고 합니다.”
대공의 검미가 꿈틀했다.
분명 전투에서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지만 전쟁의 결과는 이겼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담무룡이 천륭검법이 탐이 나 순간적으로 배신을 한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배신할 생각이었다는 말이군?”
“제가 가장 의아했던 것 중의 하나가 왜 담수운과 담수련이 따로 나갔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의문이 풀린 것 같네요. 돈과 세력 그리고 천륭검보까지 누구 한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불안했겠지요.”
“담무룡을 반드시 살려 두어야 할 이유가 많군.”
대공은 의미심장한 말을 중얼거리더니 몸을 일으켰다.
“가십니까?”
“황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내가 대도를 더 이상 비울 수 없다. 그리고 잠룡세가에서 일어난 일은 비밀로 해라. 담무룡이 제거되었다는 소문이 퍼지면 절강까지 위험해진다.”
“여긴 걱정 마세요. 제가 확실하게 장악하고 있으니까요.”
* * *
“원주님, 이놈들이 보통 놈들이 아닙니다.”
안으로 들어선 부원주 조충병의 말에 원주 채광욱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저희가 매복한 곳을 교묘하게 비켜 가며 곡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진 안에서 매복을 느낄 정도의 고수는 천하에 열 명도 안 된다.”
“매복을 느낀 것은 아니고 진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진이 유도하는 길을 따르지 않고, 진을 관통하면서 들어오고 있다고 합니다.”
“진을 관통해? 그건 우리도 못하지 않느냐?”
“그러니까 말입니다.”
“진의 대가가 있다는 말인데……. 그럼 혹시 제갈세가의 잔당이 들어오는 것은 아니냐?”
“그것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군사께서 저 진을 파악할 수 있는 자는 제갈세가의 전대 가주인 만진선생 제갈우명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쨌든 재미있는 놈들이군. 조충병.”
“예!”
“허곡에게 죽이지 말고 곡 안에 들어와 무슨 짓을 하는지 감시만 하라고 해라. 무슨 목적으로 이곳을 들어오려고 했는지 알아봐야겠다.”
“그렇게 명을 내리겠습니다.”
‘이십 년 넘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아 상당히 무료했는데, 오랜만에 재미있겠군.’
채광욱은 지금 얼마나 심각한 일이 자신에게 일어날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 * *
“아가씨, 여기가 사신곡의 입구인 것 같습니다.”
직진으로 통과했다면 반 시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꼬불꼬불 방향을 바꿔 가며 움직인 탓에, 입구에 도착한 것은 출발한 지 두 시진이 넘어서였다.
이미 계곡의 입구는 땅거미가 가득 덮였고, 계곡의 안은 상당히 어두워져 있었다.
“입구가 꽤 크네?”
담수련의 말마따나 계곡은 컸고, 안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었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곡 입구에 산산조각이 난 바위 하나를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풍화되고 이끼도 상당히 많이 끼어 있었지만, 사신곡의 신(神) 자로 보이는 글자는 알아볼 수 있었다.
“꽤 큰 바위였던 것 같은데, 그 정도로 부수려면 어느 정도 내공이 필요할까?”
“최소 일 갑자는 넘는 고수가 들이닥친 것은 분명할 것 같습니다.”
“그 노인의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같아. 진짜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
고개를 살짝 뽑아 계곡 안을 쳐다본 담수련은, 진짜 섬뜩하다는 듯 몸까지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귀신이 실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보다야 더 무섭겠습니까?”
“하긴 강호에 나와 보니까 사람이 더 무서운 것 같기는 하더라.”
악불군의 말이 웃긴지 살짝 미소를 지은 담수련은 안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악불군이 바짝 붙어 따라갔다.
분명 요사스러운 분위기였으나, 뒤에서 느껴지는 악불군의 기척에 담수련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