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2화>
92화. 좁혀지는……(2)
“아무래도 악양에 들어왔다는 오룡세가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해신개를 만나고 중양회의 총단에 돌아오던 백천학과 태극검자는, 급변한 주위 상황에 상당히 놀라 도착하자마자 급히 양지운을 불렀다.
“무림인들이 수십 명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아직 누가 죽었다는 것인지 정보가 없으니 판단하기가 좀 어렵군요.”
그때 양지운이 급히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오다 보니까 군사들이 악양에 큰 변이 있었다고 하던데, 무슨 일입니까?”
“좀 심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젯밤 공자님과 어르신이 나간 후 고변(告變)이 들어왔습니다.”
“고변이요?”
“예, 철룡세가에서 악록산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고변이었습니다. 하여 성에서 군사 천 명과 장호대 백 명을 급파했다고 합니다.”
순간 백천학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오룡세가 중 세 곳이 나타났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들이 어디를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는 여전히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군사들로 그들의 행적을 찾아내기에는 무공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의아한 듯 잠시 생각하던 백천학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어찌 됐습니까?”
“화살 공격을 받은 철룡세가는 이십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도망을 쳤고, 그 뒤를 장호대가 추적했습니다.”
“적들은 모두 몇 명이었습니까?”
“대략 오십 명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천 명의 군사가 날린 화살 공격에 겨우 이십 명의 사상자만 내고 삼십 명 이상 피신을 했다면 장호대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닌데, 실수했군요.”
백천학은 말만 듣고도 상대의 무공 수위와 이후 일어날 상황을 당장 짐작하고 있었다.
“공자님 말씀대로 좀 더 신중했어야 했어야 하는데, 너무 쉽게 보았던 모양입니다. 추격한 장호대원 중 오십 명이 죽었고, 부상자도 이십 명에 달한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특히 그중 한 명의 무공이 대단히 높았던 모양입니다. 그자 한 명에게만 이십 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어째서 단지 고변만으로 그 많은 수가 나간 겁니까?”
“제갈 군사님께서 고변이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고 본 모양입니다. 여인이었는데 무공도 꽤 높았다고 합니다.”
“고변한 사람이 여인이었다는 겁니까?”
“예.”
“그 여인은 어디 있습니까?”
“저도 보고만 받은 터라 아직 자세한 상황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호대로 오늘 들어가 볼 생각이었습니다.”
“양 단주님, 그 고변한 여인이 누구인지 반드시 알아내서 돌아오십시오. 아무래도 오룡세가 중 세 곳이 악양에 나타난 것과 전단이 뿌려진 남녀 간에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공자님, 지금 호남을 수복하기 위해서 할 일이 많습니다. 그 수배 전단의 남녀는 지금 우리 일에 연관이 없는데 너무 신경을 쓰시는 거 아닌가 싶습니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지만, 전 그들이 중원 무림 수복에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열쇠요?”
“지금 호남과 호북, 안휘 거기다 강소까지 반란군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장강 이남이 개벽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룡세가는 원나라를 도와주지 않고 있습니다. 원나라를 도와 봐야 피해만 커질 것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힘을 비축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게 지금 이 일과 연관이 있을까요?”
“원나라가 밀려도 보고만 있던 자들이 세 곳이나 악양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곳은 태양천밖에 없습니다. 한마디로 수배 전단에 있는 남녀는 태양천이 원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천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극검자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단지 이름만으로 중원 무림의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고수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는 세력.
바로 태양천이었다.
하지만 양지운은 태양천에 대해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백천학을 쳐다볼 뿐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백천학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그들이 왜 일만 냥이라는 거액까지 현상금을 걸면서 두 남녀를 찾는지는 저도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마지막은 결국 중원 무림과 태양천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러는지를 떠나, 태양천이 원하는 것을 막아야겠지요.”
* * *
사신곡 안으로 들어가는 담수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풍기는 악취가 어찌나 지독한지, 토할 것 같이 속이 안 좋아졌기 때문이었다.
“소군, 이게 무슨 냄새인데 이렇게 역겹지?”
“……사람의 시신이 부패할 때 나는 냄새입니다.”
“부패? 그럼 썩는 냄새란 말이야?”
“그렇습니다.”
“소군은 그걸 어떻게 알아?”
“잠룡세가에 들어가기 전, 어렸을 때 자주 맡았던 냄새입니다.”
말하는 악불군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그가 어렸을 때 절강에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일어나며 역병과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당연히 그는 시신이 부패하는 냄새를 맡아 가며 구걸한 밥을 먹었고, 썩어 가는 시신 근처에서 잔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곳에 사람들의 통행이 사라진 것이 이십 년도 전이라는데, 시신이 있다 해도 전부 백골이 됐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전히 이곳에서 사람이 죽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만약 그렇다면 이곳에 새편작이 아직 있을까?”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아직 사람들이 있다면 조그만 단서라도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요.”
“알았어.”
악불군이 이 상황에서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못하자, 담수련은 더 이상 희망을 깨는 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모두 자신을 위해 이러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까악!”
앞서 가던 담수련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악불군의 가슴에 머리를 묻었다.
담수련의 머리를 감싼 악불군은 검을 빼 들고는 굳은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
지옥도가 이런 곳일까…….
바짝 마른 나무가 마치 송곳처럼 뾰족뾰족하게 사방에 세워져 있었고, 그곳에는 수많은 시체들이 꽂혀 있었다.
이미 백골로 변한 시신도 있었지만, 아직도 부패 중이라 구더기가 뚝뚝 떨어지는 시신도 꽤 많았다.
더구나 거의 모든 시신들이 훼손되어, 팔과 다리 심지어 머리까지 따로 달려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아가씨,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저렇게 처참하게 변하지요. 강호에 나온 이상 저런 것에 겁을 먹으면 안 됩니다.”
악불군은 슬쩍 그녀의 손을 잡고는 귀에다 자그맣게 말했다. 그의 손과 나직한 목소리는 그녀에게 곧 마음의 안정을 주었다.
‘따뜻해…….’
담수련은 악불군의 손이 자신의 몸 전체를 따뜻하게 해 주자 고개를 살짝 들며 말했다.
“나 겁 안 나. 소군이 옆에 있는데 내가 겁낼 이유가 뭐가 있겠어. 다만 내가 징그러운 걸 싫어할 뿐이야.”
“맞습니다. 아가씨께서 얼마나 강건하신 분인데 저 정도에 겁을 먹겠습니까?”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하다가 깜짝 놀라 손을 치웠다.
하지만 담수련은 그의 손길이 좋은지 가만히 있었다.
“아가씨, 드디어 이곳 주인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마음이 안정되기를 기다리며 그 자세로 가만히 있던 악불군은,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담수련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런 짓을 한 자들?”
“아마 그렇겠지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시신을 가지고 이런 짓을 한 자들이니 좋은 자들은 아닐 것입니다.”
“수가 많은 것 같아?”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숨어서 우리를 감시하는 정도이니, 어떤 수작을 부리나 두고 보지요.”
“알았어. 다만 이곳의 나무는 다 없애고 움직이자. 시신들을 이렇게 계속 두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아.”
“예.”
* * *
“귀혼대의 시신들을 모조리 잘라서 묻어? 그걸 그대로 보고 있었다는 거냐?”
“원주님께서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놔두라고 하셔서…….”
“이런 바보 같은 놈들! 원주님께서 놔두라고 한 것은 죽이지 말라는 것이었지, 마음대로 귀혼대를 부수는 것까지 그냥 두라고 한 것은 아니다.”
허곡의 보고에 조충병은 노한 듯 질책했다.
“그게…….”
“변명할 것이 있느냐?”
“사실은 몇 번 제압하려고 시도는 했습니다.”
“그런데?”
“공격을 하려고만 하면 갑작스러운 압박이 수하들을 짓눌렀습니다.”
“……그 압박을 너도 느꼈느냐?”
“예.”
“어떤 느낌이었느냐?”
“공격을 하는 순간 검이 제 심장을 뚫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조충병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젊은 놈들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 놈은 이십대 중반이고, 또 한 명은 수염은 길렀지만 오히려 나이는 더 어려 보인다고 했습니다.”
“지금 말한 현상은 최소 절대지경은 돼야 가능한 것인데? 젊은 나이에 그런 경지에 든 사람이 있었던가?”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조충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너무 쉽게 생각한 것 같구나. 허곡.”
“예!”
“생사천은 넘지 못하게 해라. 죽여도 된다. 원주님께는 내가 허락을 받겠다.”
“예!”
* * *
“잠깐만?”
계곡의 안쪽까지 퍼져 하늘까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던 잡목들이 사라지자, 갑자기 계곡의 전경이 훤히 나타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더 공포스러웠다.
바위는 이끼와 가시 있는 넝쿨로 덮여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는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독사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심지어 날아다니는 벌레들조차 독충들이었다.
“약초도 많았고 가난한 사람들을 고치는 의실 역할도 했다던 이곳이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요?”
“약초가 많았다는 것은 산의 신성한 기가 많이 모이는 장소였다는 뜻이야. 새편작 어르신도 그래서 이곳에 정착을 하신 것일 거고. 그런데 이렇게 변한 건 누군가 신성한 기가 들어오는 길목을 막았기 때문이야. 더구나 지금 보이는 독사나 독충들을 보면 대부분 남만 쪽에 서식하는 것들이야.”
다양한 지식을 지닌 그녀답게 독사와 독충들의 정체까지 알아보고 있었다.
“그럼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인위적으로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인가요?”
“저 독물들은 누군가 운반하기 전에는 여기까지 올 수 없어.”
대화를 나누며 조심스럽게 전진하던 둘의 걸음이 멈췄다.
담수련은 좌우를 살피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여긴 개천이 흐를 지형이 아니야. 거기다 저기 흐르는 물도 보통 물이 아니고. 왜 여기에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개천의 폭이 겨우 십여 장에 불과해, 보통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무림인들이라면 신법으로 얼마든지 건널 수 있는 폭이었다. 한마디로 누군가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개천의 폭이 너무 좁았다.
악불군은 개천의 물을 잠시 살피더니 검미를 좁혔다.
“아가씨, 아무래도 여기서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개천에서는 매우 심한 역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는데, 그 냄새 속에는 약초와 독의 냄새도 같이 섞여 있었다.
“소군, 여기 아무래도 무림 세력이 있는 것 같아.”
“뭐가 보이십니까?”
“이 개천의 폭이 얼마나 되어 보여?”
“글쎄요? 대충 십 장 정도 되어 보이는데요?”
“그렇지? 그런데 사실은 이십 장쯤 돼. 저기 나무하고 이쪽 나무, 그리고 건너편 나무의 크기와 방향을 교묘하게 심어서 거리를 착각하게 만들어. 은형천목진이라는 기초적인 진법의 일종이야.”
“십 장인 줄 알고 몸을 날렸다가는 개천으로 그냥 빠지겠군요.”
“적들이 이곳을 공격한다면 계곡 입구의 미로진으로 상당수가 길을 잃을 거고, 들어온다 해도 독물들의 공격에 큰 피해를 입게 될 거야. 그리고 여기서 또 피해를 입겠지. 누군가 여기를 요새화했어.”
담수련의 말을 들은 악불군은 다리 앞으로 가더니 옆에 있는 돌을 툭 찼다.
그러자 가볍게 날아가던 돌이 중간쯤에서 힘을 잃고 떨어졌다. 최소 십 장 정도 날아갈 힘으로 찬 돌이 중간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담수련의 짐작이 정확하다는 증거였다.
“아가씨 말씀이 맞네요. 모르고 넘었다가 떨어지면 큰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담수련의 머리에서는 그녀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의 내용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이 커지며 자신도 모르게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무리 무도한 자라 해도 그런 짓까지는 안 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