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3화>
93화. 좁혀지는……(3)
담수련의 독백에 악불군의 얼굴에 안쓰러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녀의 소망은 천하를 주유하며 아름다운 곳을 보며 행복한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고집으로 이곳에 들어와 추악하고 괴이한 장면만 보고 있으니, 그로서는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 이만 돌아갈까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예전 아버님께서 가지고 있는 책 중에 무림의 여러 기사(奇史)에 대해 쓰인 책이 있었어. 대단히 두꺼운 책이었는데, 배교에 대해 적힌 부분에 정말 기이한 수법들이 많았어. 그런데 거기에 독인에 대해 쓰여 있었어. 어떻게 만드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독인을 만드는 곳의 처참한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었는데, 지금 보는 것과 많이 유사해.”
책에 남겨진 짧은 기사와 사신곡에 들어와 본 몇 가지의 상황만으로 독인을 유추해 냈다는 사실은, 그녀가 이제 한 가지만 봐도 서너 수 앞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보는 악불군의 눈에는 걱정의 빛이 가득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진마다 발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만큼 두뇌 회전이 빠르다는 의미였고, 그것은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소리이기도 했다.
“아가씨.”
“돌아가자는 소리는 하지 마.”
“예?”
“이곳에서 정말 독인을 만들고 있다면, 이대로 돌아서는 것은 우리 역시 이들과 똑같이 나쁜 사람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 새편작 님을 떠나서 여기는 조사해 봐야 할 것 같아. 소군.”
“예.”
“자신 있지?”
“걱정 마십시오.”
악불군이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장담하자 담수련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나타났다. 그녀의 악불군에 대한 믿음은 이런 공포스러운 장소에서도 확고했다.
‘아가씨의 미소는 언제 봐도 너무 예쁘시다…….’
악불군도 점점 그녀의 아름다움이 가슴에 와닿고 있었다.
“아가씨, 저들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몇 명이나 돼?”
“최소한 스무 명입니다.”
“갈수록 내 짐작이 맞는 것 같네.”
지금 사신곡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림 세력이 장악한 것 같다는 담수련의 추측이 확신이 되는 순간이었다.
타타타탁!
순간 사방에서 사람의 해골 형상이 그려진 가면을 쓴 자들이 나타났다.
“귀신 놀음은 이제 끝났나 봅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허곡은 악불군이 자신을 보며 말하자 깜짝 놀랐다. 지금 모두 똑같은 복장에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는데 자신을 보며 말한다는 것은, 그 짧은 시간에 모두의 무공 수위를 판단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었다.
“제법 한 수가 있는 놈이군, 사신곡을 찾은 이유가 뭐냐?”
“아까부터 여러 차례 공격을 할 듯하다가 멈추더니 결국 여기서 모습을 나타낸 것을 보면, 저 개천 건너에 뭔가 있는 모양이군요?”
“지금 묻는 사람은 나다. 내 질문에 답이나 해라!”
“내가 찾는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만나기 위해 온 것입니다.”
“찾는 사람이 누구냐?”
“꽤 유명한 분인지라 여기 책임자를 만나 뵙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책임자?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는 놈이었군. 지금 네게는 우리말을 순순히 듣고 목숨만이라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반항하다가 온몸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면 죽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다시 묻는다. 찾는 사람이 누구냐?”
“선택을 거기서만 정한다면 공평하지 않지요. 저도 두 가지 선택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를 이곳 책임자에게 안내를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이 끝날 것입니다. 하지만 저희 앞을 막는다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장담할 수 없어? 결국 고통을 스스로 원하는구나!”
악불군의 말을 듣던 허곡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반문을 하더니 손을 들었다. 공격 명령이었다.
쉭!
탕!
검이 바람 가르는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허곡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악불군의 검은 우측에서 좌측으로 직선을 그렸다.
그러자 달려든 십여 명의 장한들은 거의 동시에 튕겨 나갔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악불군의 검이 그들의 무기만을 쳐 냈기 때문이었다.
‘방어를 한 것이 아니라 무기를 쳐서 물리친 거야? 어떻게?’
허곡은 자신의 눈으로 보았으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단순히 직선으로 베어 나간 검.
하지만 수하들은 공격하는 위치가 모두 달랐다.
악불군의 다리를 공격한 자도 있었고, 가슴과 머리를 노린 수하들도 있었다.
직선으로 휘두른 검에 한두 개는 부딪칠 수 있어도, 모두가 부딪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거기다 검의 속도가 어찌나 빨랐는지, 열 방위로 쳐들어간 수하들의 무기에서 들린 소리는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더 이상의 자비는 없습니다.”
조용히 울려 퍼지는 악불군의 목소리는 마치 사신의 목소리 같았다.
단 한수에 덤비면 죽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자각하게 만든 것이다.
“안내하시겠습니까?”
“저 생사교를 넘어간다면 원주님을 뵐 수 있을 것이다.”
허곡은 이미 전의를 잃었는지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다리가 하나 놓여 있었다.
악불군은 허곡을 잠시 주시하더니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거짓은 아닌 것 같으니 결국 다리를 건너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가시겠습니까?”
“응.”
“영주님, 어떻게 하지요?”
담수련과 악불군이 생사교 쪽으로 다가가자 수하 한 명이 급히 허곡에게 물었다.
“단 한 수였지만 우리 능력으로 저자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만약 생사교까지 무사히 넘는다면 이젠 원주님께서 알아서 하실 게다.”
하지만 말하는 허곡의 표정은 허탈했다. 십 년을 충성을 바쳐 겨우 영주라는 말단 간부직에 올랐는데, 오늘 일로 인하여 직에서 떨어지는 것은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아까부터 이 다리가 좀 이상했는데, 가까이 보니까 더 이상하네?”
개천의 한 구석에 놓인 다리는 폭이 좁아서, 두 명이 동시에 움직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지붕이 있어 마치 동굴을 지나는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었다.
“다리 생김새가 함정 같은데요?”
“맞아. 돌과 돌의 배열이 여러 군데에서 어긋나 있어.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확률이 많아.”
이미 함정으로 보이는 다리와, 빠지면 상당히 치명적인 해를 끼칠 것 같은 개천.
이미 함정을 파악한 이상 그 다리는 중요성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뇌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에 대한 답을 반드시 찾아야 하는 듯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드디어 답을 찾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다리를 만들었는지 아셨습니까?”
“내가 저들의 머리에 들어간 것도 아닌데 확실하게는 알지 못하지. 다만 내 짐작으로는, 저 다리는 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 둔 것 같아.”
“고수요?”
“진짜 대단한 고수들은 함정이 없다고 판단한다면 굳이 신법을 쓰지 않고 저 다리로 건널 거야. 그리고 함정이 있다고 판단해도 저 다리로 건널 거야. 고수의 자존심이거든.”
“그럼 우린 그냥 신법으로 개천을 뛰어 건널까요?”
“소군.”
“예.”
“요즘 나도 소군의 무공이 어느 정도의 수준인지 모르겠어. 정말 여기를 건너도 괜찮을까?”
“전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할 뿐입니다.”
지금 사신곡에 펼쳐진 여러 상황으로 보아 이곳이 용담호혈이나 도산검림에 비견할 만큼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담수련은 자꾸 마음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 * *
사방의 벽에 지옥 유명계의 잔혹한 장면이 적나라하게 그려져 있는 커다란 정청.
상당히 긴 계단이 뒤 벽면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십여 개의 해골로 장식되어 보기만 해도 섬뜩한 모양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다.
징-!
어디선가 커다란 종소리가 울리더니, 계단의 양 끝에 도열해 있던 오십여 명의 무인들이 오체투지를 하며 소리쳤다.
“계주님을 뵙습니다.”
비어 있던 태사의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핏빛의 용포에 황금빛 아수라탈을 쓴 자가 앉아 있었다.
사대무황 중 사황(邪皇)으로 불리는 아수라사황이었다.
“모두 일어서라!”
아수라사황의 명이 떨어지자 모두는 일사불란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얌전하게 시립했다.
아수라사황은 오른쪽 계단 가장 높은 곳에 시립하고 있는, 머리는 보통 사람의 두 배는 될 정도로 크고 몸은 기형적으로 왜소한 노인을 보며 다시 말했다.
“뇌혼광뇌.”
“예!”
“드디어 때가 왔다. 보고해라.”
뇌혼광뇌라 불린 노인은 허리를 한 번 깊숙이 숙이더니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본뇌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원나라는 십 년 안에 다시 북방으로 쫓겨나고 중원은 다시 중원인들이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확실한 거냐?”
“칭기즈 칸이 다시 태어나는 변수만 없다면 거의 확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 이제 슬슬 다시 중원에 진출할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뇌혼광뇌의 말에 사방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천 년 넘게 중원 무림의 태두 소리를 듣던 구파일방은 지금 유명무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붕괴되어 있었다.
대공의 사부인 태양천주와의 대결에서 패한 세 곳의 무황들의 세력은 봉문이라는 치욕과 중원이 무너지는데도 도와주지 않았다는 비난은 받았지만, 그 덕에 세력은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다.
이후 천륭검가의 멸문 소식을 듣자마자 충격을 받은 그들은 일 갑자 동안의 봉문 약속을 깨뜨렸다.
그들 역시 대공의 공격에 멸문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천무성궁의 천제무황은 지리멸렬한 무림 세력들을 모아 영웅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원나라에 대항하기 시작했고, 구천마성의 구천마황과 혈해사계의 아수라사황은 지하로 숨어들어 자신들의 힘을 키워 나가는 전략을 택했다.
그리고 혈해사계가 드디어 그동안 비축한 힘을 바탕으로 전면에 나설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뇌혼광뇌는 벽에 붙은 중원 전도를 대나무 봉으로 가리키며 보고를 이어 갔다.
“지금 원나라는 장강 이남의 지배력을 완전히 잃은 상황입니다. 천무성궁이 이끄는 영웅회가 천하의 인심을 얻으며 주도권을 잡고는 있지만, 정파의 특성상 연합 형태이기 때문에 구심력이 약합니다. 그러니 원나라를 다 몰아낸다면 그들끼리 주도권 다툼을 벌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 해도 영웅회와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지 않겠소? 거기다 지금 구천마성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을 텐데?”
호법인 독수염라가 물었다.
“지금 밀리는 것은 원나라일 뿐, 그들에게 부역하던 무림 세력은 아직 건재합니다. 특히 오룡세가의 힘은 본 계나 영웅회도 함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지요. 더욱 문제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태양천입니다.”
태양천이라는 말에 잠시 정청에 침묵이 돌았다.
“뇌혼광뇌.”
침묵을 깬 것은 아수라사황이었다.
“예!”
“그래서 어찌할 건지 계획을 말해라.”
“영웅회나 구천마성은 반란군과 연계를 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룡세가와 연계하려고 합니다.”
순간 정청에 웅성거림이 나타났다. 원나라가 물러가면 중원 무림의 가장 최대의 적이 오룡세가인데, 그들과 연계했다가는 혈해마계가 중원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무너져 가는 원나라와 연계하겠다는 거요? 그게 말이 되는 계획이야?”
호법인 독수염라가 어불성설이라는 듯 소리쳤다.
“무너져 가니까 연계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는 도움이 절실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돕는 척하며 알아낸 정보를 영웅회와 반란군에게 제공하여, 계속 그들이 싸우게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전력은 보존하고 적들의 전력을 소모하게 하여, 마지막 싸움이 끝난 후에 최후의 승자는 우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정의니 의리니 하는 말은 혈해사계의 인물들에게는 위선적인 정파나 하는 개소리일 뿐이었다.
“뇌혼광뇌.”
“예!”
“네 계획대로 실행하라.”
“존명!”
“혈해사계만이 천하에 우뚝 설 것이고, 너희는 온갖 부귀영화를 마음껏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와아!”
아수라사황의 외침에 모두는 다시 부복하며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숨죽이며 힘을 기르던 세력들이 하나둘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혼란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