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95화 (95/472)

<천검지애 95화>

95화. 사신곡(2)

그들이 본 장면은 아비규환 자체였다.

인간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한 몰골을 한 괴인들이, 자신들을 돌보던 의원들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자들, 독인이야! 이미 독인을 만들었구나.”

담수련은 쓰러진 자들을 보며 경악한 듯 중얼거렸다.

“저 괴인들이 독인입니까?”

“당한 자들을 봐.”

쓰러진 자들의 몸은 퉁퉁 부어 있거나, 살이 터져 검붉은 진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심지어 살이 녹아내리는 자도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죽었는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극도의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의원들을 공격하던 몇몇 독인이 악불군과 담수련을 발견하자 그들을 향해 달려왔다.

단지 가까이 달려오기만 할 뿐인데 이미 매캐하고 속이 메스꺼워지는 냄새를 맡은 악불군은 고개를 저었다.

“몸 전체가 독인 모양입니다.”

“책에 써 있기를, 저자들의 피는 물론 침, 심지어 피부조차 닿는 즉시 중독된다고 했어.”

치지직!

악불군에게 달려오던 독인 세 구가 악불군의 검에 의해 목이 잘라지자, 그들의 몸에서 시커먼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피는 땅에 닿자마자 괴이한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전부 제거하겠습니다.”

악불군은 그들 역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마물로 변한 이상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다수가 싸우는 전쟁에서의 독인은 대단히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악불군에게는 다른 무림인들보다 더 쉬운 상대일 뿐이었다.

일각도 안 되어 삼십 구가 넘는 독인들을 모조리 제거한 악불군은 고통에 신음하는 의원들도 모두 숨을 끊어 버렸다.

어차피 살릴 수 없는 이상, 고통이라도 면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자들,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피 냄새와 독 냄새가 어우러져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공터를 지나, 악불군과 담수련은 안으로 더 들어가기 시작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지금 이 사건으로 무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 중의 하나와 원한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 * *

“추국아. 이리 나와 봐.”

다급한 흑란의 목소리에 추국은 급히 주루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저분이 뭘 좀 물어본다는데?”

흑란이 가리킨 곳은 텅 빈 주루의 창가였다.

“이곳은 우리가 다 빌렸는데, 왜 사람을 들여?”

추국이 힐책하듯 말하자 흑란은 작게 말하라는 듯 손짓을 하며 부언했다.

“우리가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추국은 의아한 표정으로 창가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섭선을 손에 든 젊은 청년과 신선의 풍모를 보이는 노인 한 명이 앉아 있었고, 창을 든 중년인이 그 옆에 서 있었다.

백천학과 태극검자 그리고 양지운이었다.

추국은 태극검자와 양지운을 보자 흑란이 말한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엄청난 고수야……. 밖에 개방 제자들이 우리를 보호해 준다고 했는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무림 백대고수 중 최상위에 있는 태극검자는 그녀의 무공으로는 무공 수위를 짐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저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상대할 수 없는 고수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는 추국이라고 합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철룡세가가 운목산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장군부에 고변하신 분이 여기 있다고 들었는데, 어느 분인지 알 수 있겠소?”

양지운의 말에 추국은 살짝 당황했다.

매향이 지금 그들이 있는 곳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건 왜 물으시는지요?”

“장사성 대장군의 장호대가 그 일로 큰 피해를 입었소. 당연히 그 정보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조사는 해 봐야 하지 않겠소?”

“저희는 장사성 장군님과 철룡세가가 적이라고 들었기에 고변을 했을 뿐이에요. 싸움의 결과가 나빴다 하여 그 책임을 물으신다면, 앞으로 누가 있어 고변을 하겠습니까?”

추국의 말을 들은 백천학이 그제야 몸을 일으키며 포권을 했다.

“전 백천학이라고 합니다. 옳은 일을 하셨는데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제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운목산으로 움직이는 것을 어떻게 아셨느냐는 것입니다.”

“우연히 그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매향을 보낸 것이고요.”

“혹시 이런 분들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백천학은 수배 전단을 꺼내 펼치며 물었다.

거기에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용모파기가 확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추국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들 역시 현상금 때문에 온 것이라면…….

추국이 어떻게 대답할지를 고민하는 듯하자, 백천학은 미소를 지며 다시 말했다.

“이분 소협이 모는 마차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마차가 이곳에 있더군요.”

“그분들을 잘 알지는 못해요. 그 마차는 저희들이 산 것입니다.”

“거짓말에 익숙지 않으시군요?”

“왜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시죠?”

“상관없습니다. 그럼 소저들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저희 사문은 작은 문파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려도 모르실 거예요. 그리고 문규 자체가 문파의 일을 외부인에게는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백천학은 자신들을 경계하듯 바라보고 있는 흑란과 잠봉단원들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알 만큼 알았으니 이만 가겠습니다. 어르신, 가시지요.”

백천학 일행이 객잔을 떠나자, 추국은 긴장이 풀린 듯 휘청하더니 급히 식탁을 손으로 짚었다.

“추국아, 괜찮아?”

흑란이 놀라 뛰어와 잡자, 추국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대체 누굴까? 단지 대화를 나누었을 뿐인데, 전력을 다해 싸운 것처럼 온몸의 힘을 다 빼 버리네.”

흑란 역시 태극검자가 얼마나 고수인지 느끼고 있었다. 수하처럼 보이는 양지운조차 몸에서 풍기는 예기에 몸이 경직될 정도였다.

그러나 둘과 달리 백천학은 전혀 강해 보이지 않았음에도 온몸의 힘이 빠져 버린 것이다.

* * *

“거짓말을 하는 것이 분명한데, 왜 그냥 나오십니까?”

밖에 나오자 태극검자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알고자 하는 것만 알면 됐지, 굳이 왜 거짓말을 하느냐고 추궁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거짓말만 했는데 알 것은 알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들과 수배 전단의 남녀와는 아주 가까운 사이입니다. 즉, 이 여인들만 감시하면 그들도 만날 수 있다는 의미겠지요. 그리고 저들은 오룡세가와는 친구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친구가 될 수 있겠지요. 전 그자가 우리와 대척점에 선 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십니까?”

“이기어검을 사용했다는 소문이 있는 자입니다.”

“이기어검은 저도 가능합니다.”

“보통은 내공의 소모가 너무 심해 사용하지 않지요. 그리고 어르신께서 이기어검의 경지에 오르셨을 때의 나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자는 젊습니다. 그럼 십 년 후에는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요?”

“그렇다 해도 공자님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글쎄요. 분명한 것은 제가 확실히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지요.”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와 양지운의 얼굴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만약 백천학의 말이 사실이라면, 악불군의 존재가 간단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명성이란 주위 사람들에게 천천히 이름이 퍼지면서 쌓아진다.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명성이 쌓이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 * *

안을 뒤지면 뒤질수록 악불군과 담수련의 분노가 커져 갔다. 곳곳에서 보이는 피를 담은 통과 썩어 가는 시신 등, 형용할 수 없는 잔인한 상황을 맞닥뜨렸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런 짓을 저지른 자들의 정체가 뭘까?”

말하는 담수련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죄 없이 이들에게 끌려와 고통당하고 죽은 그들의 아픔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무림 세력인 것만은 분명한데, 어느 세력인지는 단서를 다 태워 버려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자들도 자신들의 짓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증거야. 자신들이 얼마나 악독한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말이지. 소군, 난 정말 이자들만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

비분강개한 담수련의 목소리에, 악불군은 답을 할 수 없었다. 자신들도 코가 석 자인 상황이라, 이자들을 하염없이 쫓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부 다 도망갔나?”

악불군이 답을 하지 않자 담수련도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명을 내린다면 악불군은 자신의 말을 들어줄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말할 염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상한데요?”

주위를 살피던 악불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땅에 귀를 댔다.

“뭐 발견했어?”

“도망을 친다면 밖으로 가야 하는데, 안쪽으로 들어간 자들이 있습니다. 뭔가 더 숨길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그녀를 안고는 훌쩍 몸을 날렸다.

악불군의 목을 두 손으로 잡은 담수련은 달려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단단해 보이는 턱과 오뚝한 콧날이 보였다.

‘이제 묻지도 않고 그냥 안네.’

사신곡을 살피며 분노에 떨던 담수련의 얼굴에는 어느새 포근함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대로 잠시 달리다 보니 사신곡의 가장 깊숙한 곳, 철문이 달린 동굴이 나타났다.

“이 안으로 급히 들어간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말대로 철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철문 안으로 들어선 악불군과 담수련은 인상을 찌푸렸다.

또다시 악취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었다.

“소군, 살아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

동굴은 뇌옥으로 사용하는 곳인 듯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미약하게 들리고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간 자부터 잡고 구해야겠습니다.”

악불군은 뭔지 모를 불안감에 빠르게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 * *

“이제 좀 그만 죽여라.”

너무 말라 해골 같은 형상의 노인은 채광욱을 보자 한탄하듯 말했다.

“네놈이 일찍 책이 있는 장소를 말해 줬으면 오늘 이런 일은 없었을 게다.”

“나도 모르는 것을 어쩌라고 이러는 거냐? 피곤하다. 이만 죽여다오.”

“나도 피곤하다. 이놈아! 너 같이 지독한 놈도 없을게야. 새편작,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배교의 비서(秘書)는 어디 있느냐?”

채광욱의 입에서 나온 이름.

악불군이 찾고 있는 새편작이었다.

“배교의 비서는 없앴다고 이미 말했다.”

채광욱은 밖을 한 번 살피더니 다시 말했다.

“당장 말하지 않으면 넌 죽는다!”

“제발 죽여다오. 내가 원하는 거다.”

채광욱은 갈등하듯 머뭇거렸다. 새편작을 죽인다면 그 역시 성주에게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살려 두고 이곳을 떠날 수는 없었다.

반각 가까이 갈등하던 채광욱은 결국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들어 올렸다. 죽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휘익!

갑자기 들려오는 파공음에 채광욱은 급히 몸을 돌리며 막아 갔다.

탕!

“결국 여기 쫓아왔구나!”

두 걸음을 물러난 채광욱은 그의 앞에 나타난 악불군을 보자 이를 으드득 갈며 말했다.

“살겠다고 도망을 치더니 여기로 온 것을 보면, 이분 어르신이 아주 중요한 분인 모양이군요.”

악불군은 노인을 살피더니 머리를 저었다. 너무 처참했다.

채광욱은 악불군이 잠시 노인에게 신경을 쓰자 전력을 다해 악불군에게 채찍을 날렸다.

회전하며 다가오는 채찍의 위력은 대단했다.

‘피해라, 피해라!’

채광욱은 악불군이 피하기를 바라며 앞으로 짓쳐갔다. 만약 피하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한 채 새편작을 죽일 생각이었다.

악불군은 회전을 하며 날아오는 채찍을 향해 천륭검보상의 회(回)를 시전했다. 그러자 천륭검이 악불군의 손안에서 맹렬하게 돌기 시작했다.

투다다다닥!

악불군의 검은 다가오는 채광욱의 채찍을 조각조각 잘라 내고는 그의 팔까지 산산조각을 내 버렸다.

“으아아악!”

팔의 뼈까지 잘라지는 극도의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몇 바퀴 돈 채광욱은 벽에 등을 기대고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아프시오? 당신이 아프면 다른 사람들도 아프다는 것을 어찌 모르시오?”

“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알 필요 없소.”

“아무리 그래 봐야 이제 넌 평생을 죽음의 공포 속에 살게 될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뭐 그리 대단하겠소이까? 그보다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데.”

말을 마친 악불군은 채광욱의 목을 잘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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