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96화 (96/472)

<천검지애 96화>

96화. 새편작(1)

“소군!”

싸움이 끝나자 담수련이 급히 불렀다.

“예!”

“이분 생명이 위험해. 이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 계신 것이 기적이야. 빨리 이것 좀 잘라.”

그녀가 가리킨 곳을 본 악불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굵은 철사줄이 노인의 비파골을 뚫고 벽에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어떤 원한이 있어서 발에 쇠고랑까지 걸어 놓고 또 이런 악독한 짓을 했을까요?”

악불군은 고개를 저으며 검으로 철사와 쇠고랑을 모두 잘라 버렸다.

“크크크, 저놈 맨날 나 보고 죽인다고 협박을 하더니 지가 먼저 죽었네.”

새편작은 잘린 채광욱의 목을 보자 기분이 좋은 듯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미 기가 소진되어 가래 끓는 소리가 말에 섞여 나왔다.

“자꾸 말하지 마세요. 전신의 기가 거의 소진이 되어서, 말하는 것도 몸에 안 좋습니다.”

담수련이 맥을 잡고 말하자 노인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의술을 좀 아느냐?”

“약간 배웠습니다.”

“지금 내 맥은 잡아 봐야 잡히는 것이 전혀 없을 텐데, 기가 소진된 것도 알고 제법인데?”

“자꾸 말하지 마시라니까요.”

“어차피 난 오래 못 산다.”

“그래도…….”

“내가 이래 봬도 예전에 새편작이라 불리며 천하명의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내 말 믿어.”

순간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어르신께서 새편작이십니까?”

“나 아냐?”

“어르신을 찾기 위해 이곳에 왔는데 진짜 만나 뵙다니, 제가 정말 운이 좋군요.”

“운으로 따지면 내가 더 좋지. 너희들 아니었으면 저놈 죽는 것도 못 보고 최소한 육 개월은 더 이 꼴로 살아야 했을 게다. 그런데 나를 알 만한 나이도 아닌 너희들이 왜 나를 찾은 것이냐?”

“우선 어르신 몸부터 추스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소군, 어르신 빨리 업어. 우선 밖으로 나가자. 여긴 공기도 안 좋고 너무 더러워.”

“다 부질 없다. 내 몸은 내가 다 안다.”

새편작이 고집을 부렸지만 막상 악불군이 안아 들자 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드디어 밖을 나간다는 생각에 감개무량한 것 같았다.

새편작을 밖으로 옮긴 악불군은 최대한 편하게 눕힌 후, 다른 뇌옥에 갇힌 자들도 모두 밖으로 끄집어냈다.

“반 이상은 죽을 거야. 나쁜 놈들!”

담수련은 처참한 사람들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눈에는 전에는 보이지 않던 분노가 이글거렸다.

“새편작 어르신께서는 괜찮을까요?”

“너무 오랜 세월 갇혀 있었고 체력도 부족한 상태야. 솔직히 저분이 아직까지 살아 계신 것이 기적이야. 지금 어때?”

“주무시고 계십니다.”

사실 악불군의 마음은 다급했다.

단서나 있으면 감지덕지할 상황에서 본인을 직접 만났으니,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기가 너무 소진이 되셨어. 기를 좀 불어넣어 주면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한데, 너무 허약해지셔서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어.”

“제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악불군이 새편작이 누워 있는 곳으로 가자, 담수련은 주위를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구출한다고 꺼내기는 했는데, 더 이상 그녀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희가 내려가는 즉시 도움을 청해 볼 테니 잘 견디세요.”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 담수련은 몸을 돌려 새편작이 있는 곳을 향했다.

“내게 기를 불어넣었냐?”

눈을 뜬 새편작은 몸이 한결 가볍자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혈맥이 너무 약해져, 아주 약간만 집어넣을 수 있었습니다.”

“공력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불어넣지 마라. 그때마다 알게 모르게 내공이 소실된다.”

“조언 가슴에 새겨 두겠습니다.”

“어르신, 제가 의술이 약해서 어떤 처방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말씀해 주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담수련의 말에 힘들게 미소를 지은 새편작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미 몸과 마음이 다 망가졌다. 그리고 나이까지 들어, 진짜 편작이 와도 난 못 고친다.”

“그런데 어찌 여기에 갇혀 계신 것입니까?”

“오래전에 죽어 가는 무림인을 치료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결국 죽고 말았지. 그때 그자 가지고 있는 유품들을 정리하다가 오래된 책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게 천하의 재수 없는 마물일 줄은 나도 몰랐지.”

우연히 얻은 책자.

그것은 온갖 사술과 괴이한 수법으로 천하를 어지럽히다 마교로 낙인 찍혀 무림인과 황실의 양면 공격에 멸문한 배교의 보물인 배교비전이었다.

그것을 읽은 새편작은 너무 통탄할 내용에 태워 버리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지식을 그대로 버릴 수 없어, 결국 태우지 못하고 누구도 찾지 못할 곳에 책자를 숨기고 말았다.

지식에 대한 욕구와 그가 가진 선(善)의 중간점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천마성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갑자기 사신곡에 나타나 그를 구금하고 책자를 내놓으라고 고문했다.

모진 고초에도 그가 입을 열지 않자, 말할 때까지 세상에 나갈 수 없다며 옥에 가둔 후 거의 매일 찾아와 그에게 배교비전의 행방을 말하라고 괴롭혔다.

“여기에 있던 자들은 누구였습니까?”

“구천마성이다.”

새편작의 말에 악불군과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비록 오룡세가에 밀려 지하에 숨었지만 중원마도를 대표한다는 구천마성의 무서움에 대해서는 그들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굉장하시네요.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입을 열지 않으셨다니, 감복할 뿐이에요.”

“넌 왜 남자로 분하고 다니는 거냐?”

“제가 여자인 줄 눈치채셨습니까?”

“아까 맥을 짚을 때 알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고 보니, 나를 찾은 이유가 뭔지 아직 말을 하지 않았구나?”

“어르신이 큰 고초 속에 몸도 성치 않으신데 말씀드리기가 죄송해서…….”

“고놈들 참! 무림인들치고는 착하네. 걱정 말고 물어봐라. 나를 평생 괴롭히던 놈을 죽여 줬으니 내 그 보답으로 아는 것은 다 말해 주마.”

“어르신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염치불구하고 말씀 드리겠습니다.”

“그래, 말해 봐라.”

“강호의 노선배님 한 분께, 새편작 어르신께서 봉황신녀 어르신을 빙설초로 고치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봉황신녀? 아하~ 봉화신녀면 성모궁의 그 예쁜 처자를 말하는 것이구먼. 그게 언제 때 얘기인데. 난 기억도 잘 안 날 정도인데?”

“꽤 오래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치고, 그래서?”

“저희가 빙설초가 필요합니다. 혹시 가지고 계시다면 돈을 주고라도 사고 싶습니다.”

“내 상황을 봐라. 있던 약초들도 다 없어질 판이다. 그리고 빙설초는 그때 사용한 것이 전부였어. 빙설초가 귀한 약초이기는 하지만 사용처가 한정되어 있어서, 내가 꼭 간직할 필요성은 없던 것이라 더욱 그렇다.”

“그럼 그것을 어디서 구했는지라도 알 수 없겠습니까?”

“빙설초가 필요한 이유가 뭐냐?”

“오음절맥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빙설초로는 오음절맥은 못 고친다.”

“하지만 생명 연장은 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생명 연장은 가능하긴 하지. 진짜 오음절맥이라면 빙설초로도 무한정 연장은 어렵다. 기껏해야 오륙 년 정도 가능할 게다.”

“오륙 년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연장이 가능하다면 꼭 구해야 합니다.”

새편작에게 악불군의 절실한 마음이 통했는지,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담수련을 보며 물었다.

“네가 오음절맥이지?”

“느끼셨습니까?”

“아까 맥을 잡을 때 냉기가 전해 와서 대충은 느꼈다.”

새편작의 말에 담수련과 악불군은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맥을 하기 위해 만진 손가락만으로 여자라는 것을 알아낸 것도 놀랄 일인데, 오음절맥까지 맞춘다는 것은 당대의 신의 소리를 듣는 의원들도 하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제가 오음절맥입니다.”

“지금 나이가 몇이냐?”

“열일곱입니다.”

“열일곱이라고? 부모가 대단한 부자였던 모양이구나?”

“그걸 어떻게…….”

“지금 너 정도면 아주 건강한 편이다. 어려서부터 음기를 다스리는 약재를 상시 복용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지.”

새편작은 담수련을 자세히 보더니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말했다.

“내 손을 네 맥 위에 올려 보거라. 내가 힘이 없어 직접 맥을 잡기는 어렵구나.”

담수련은 조심스럽게 새편작의 손을 잡아 자신의 맥 위에 올려놓았다.

“거참 이상하다.”

무려 일 각 가까이 진맥을 하던 새편작은 힘겹게 손을 떼며 중얼거렸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악불군이 깜짝 놀라 물었다. 이상하다는 말에서 큰 불안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이미 오음절맥이 활성화가 되어 온몸이 음기로 덮여 있다. 보통은 이 정도면 이미 죽었어야 하는데, 신기하게 멀쩡해.”

새편작의 말에 악불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이미 죽었어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지금도 위험하신 것입니까?”

“멀쩡하다고 했잖느냐? 곧 죽지는 않을 것 같으니 걱정 마라. 그런데 근래 성격 변화를 느끼지 않느냐?”

“맞아요. 저도 이따금 제가 아닌 것 같아 당황할 때가 많습니다.”

“오음절맥이 활성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니,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여기서 더 진행이 더 되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변할 수 있어. 물론 대부분은 그 전에 다 죽지만, 너는 어쩌면 더 나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막을 방법을 알려 주세요. 전 그런 냉혈한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담수련은 애가 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을 냉정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지, 타고난 심성이 변하는 것은 아니니 크게 걱정은 마라. 그리고 빙설초가 있으면 성격 변화를 막는 데도 도움은 된다.”

“빙설초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빙설초는 극양의 대지에 조성된 극음의 장소에서만 자란다. 그래서 찾기가 무척이나 어렵지.”

“대충이라도 알려 주시면 찾는 것은 제가 할 것입니다.”

“너희 둘의 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악불군의 말 속에 함유되어 있는 애타는 마음을 느낀 새편작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며 물었다.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입니다.”

“호위 무사? 정말 단지 호위 무사일 뿐이냐?”

“그렇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새편작은 담수련을 슬쩍 보며 말하고는 다시 말을 이어 갔다.

“중원에는 빙설초가 자라는 곳이 없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아는 바로는 빙설초가 자라는 곳은 남만과 해남도 두 곳뿐이다. 하지만 남만은 너무 넓고 야만인들이 들끓어, 극음의 장소를 찾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해남도를 가야겠군요.”

“솔직히 해남도를 간다고 구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남만보다는 나을 게다. 하지만 그 길이 무척 험난할 게야.”

“지옥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악불군의 굳은 말에 새편작은 악불군의 얼굴을 살피더니 말했다.

“네 맥도 한번 줘 보거라.”

“저요?”

“그래.”

악불군은 새편작의 손을 들어 자신의 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일각이 흘렀다.

“역시 이유가 있었군.”

진맥을 멈춘 새편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너희들, 특별하게 할 일이 있어서 강호에 나온 것은 아니지?”

“아가씨의 병을 고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빙설초를 찾으면…….”

새편작은 빙설초로 환을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외웠냐?”

“예, 다 외었습니다.”

“정말이냐? 실수하면 안 되니, 다시 말해 달라면 말해 주마.”

빙설초만으로는 약이 되지 않기에, 무려 삼십 종이 넘는 약초를 배합해야 했다. 그런데 한 번 말했을 뿐인데 다 외웠다고 하니 새편작은 놀란 듯 물었다.

“아닙니다. 다 외웠습니다.”

‘놀라운 아이군……. 내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던 것이 이 아이를 만나라는 하늘의 계시였던가?’

새편작은 악불군의 눈을 자세히 주시하더니 다시 말했다.

“어르신, 혹시 만년설삼에 대해서도 아십니까?”

“만년설삼은 나도 본 적이 없다. 오음절맥을 치료하는 데는 가장 좋은 약이긴 하지만, 그것을 구하기 위해 천하를 헤매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구나. 그런 천하기물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찾아오는 법이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계곡 안으로 더 들어가면…….”

새편작은 작은 목소리로 한 장소를 가르쳐 주었다.

“그 안에 내가 평생을 담은 의서와 그 마물이라는 책이 있다. 나쁜 놈들과 싸우려면 나쁜 수법도 좀 알아야 한다. 한번 읽어 보고 네가 없애도록 하거라.”

“저를 믿으십니까?”

“신의현맥을 타고 난 아이를 믿지 못한다면 천하에 누구를 믿겠느냐? 너는 절대 그 마물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럼 제가 가서 가져올 것이니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말을 마친 악불군은 그 와중에도 담수련만은 안고 몸을 날렸다.

‘이미 오음절맥을 고칠 조건을 다 가지고 있거늘……. 하지만 연은 하늘의 뜻이니, 굳이 내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사라지는 악불군을 보며 새편작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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