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7화>
97화. 새편작(2)
산 아래 현으로 내려온 악불군과 담수련은 다시 혼절한 새편작을 의원에 맡겼다.
“아가씨, 생각에 새편작 어르신은 어떠실 것 같으십니까?”
“내가 의술이 부족해서 자세히 못 봐 그럴 수도 있지만, 오래 못 버티실 것 같아. 몸의 상처도 상처지만, 너무 긴 세월을 공기도 안 좋고 축축한 뇌옥에서 지내시면서 온몸의 장기가 다 쇠약해졌어. 그리고 연세가 너무 많으셔서 약도 효과를 많이 못 볼 거야.”
“평생을 사람을 살리는 의원으로 살아가시던 분을 오로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 긴 세월 가둬놓고 괴롭혔다니, 구천마성은 정말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남의 일이니까 이렇게 말하지, 만약 내가 그런 상황에 처했다면 아마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야.”
“자살조차 할 수 없게 하기 위해 비파골을 철사로 뚫어 묶어 둔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파골은 근육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꼭 사용해야 하는 신체의 중요 부위였다. 그곳을 뚫은 채로 묶으면 전신의 힘을 전혀 사용할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놈들의 악독함을 알기에 충분했다.
“소군.”
“예.”
“해남도로 갈 거야?”
“아가씨, 빙설초만 있으면 오륙 년 이상 생명을 늘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전 지금 빙설초를 구하는 것이 그 어떤 일보다 급선무라고 생각합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또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해남도가 얼마나 먼지 알아?”
“남쪽 끝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가는 데만 두 달은 걸릴 거야. 거기다 남쪽은 황실의 힘도 미치지 못해서 완전 무법지대가 된 지 오래고.”
“어떤 난관도 아가씨의 건강을 찾아줄 수 있다면 전 헤쳐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강건하게 잡으십시오.”
“해남도에서 못 찾으면?”
“…….”
담수련은 악불군이 답을 하지 않자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남만까지 갈 생각인 거야?”
“아가씨를 고치는 일이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
“도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하려고 그래?”
“아가씨께서 없는 저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순간 담수련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걸렸다.
크게 감동을 받은 것이다.
“왜 우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담수련의 눈물에, 악불군이 깜짝 놀라 물었다. 확실히 여인의 마음에 대해서는 너무 모르는 그였다.
“안 아파. 그리고 다른 여자들에게는 그런 말하지 마.”
“네? 제가 누구에게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담수련, 정신 좀 차려라. 지금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악불군의 대답에 얼굴이 발개진 담수련은 결국 고개를 숙이려는 순간.
“환자 분께서 깨어나셨습니다.”
그때 의동(醫童)이 달려와 말했다.
“가 보자!”
담수련은 살았다는 듯이 급히 일어나며 말했다.
“시키신 대로 약을 처방하고 금창약도 발랐지만 제 실력으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습니다.”
의실에 도착하자 의원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사실 그는 돈만 아니었다면 새편작을 받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는 이미 시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은자를 다섯 냥이나 준다는 말에 받고 말았다. 하나 어떻게 치료할지 몰라 쩔쩔매다가, 담수련이 처방해 준 대로 조치한 것이다.
“알았습니다. 이제 저희가 돌볼 것이니, 의원님은 제가 말씀드린 약을 좀 달여 주십시오.”
“예.”
그가 일 년을 이상을 일해야 벌 돈을 한 번에 준 사람들이었다. 의원은 공손히 인사하고는 의실을 나갔다.
온몸을 흰 천으로 감고 누워 있는 새편작의 모습 너무 작고 왜소해, 얼핏 느끼기엔 십오륙 세 정도밖에 안 돼 보였다.
“……내가 내 몸 상태는 가장 잘 안다고 했는데, 여긴 왜 데려왔어?”
새편작은 악불군과 담수련을 보자 미소를 지며 한마디 했다.
“어르신이라면 일어나실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이십 년만 젊었으면 내 의술로 어떤 방법을 찾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어려워. 그래도 이렇게 푹신한 데 누우니 기분은 좋구먼.”
말하는 세편작의 얼굴은 처음 뇌옥에서 구했을 때와는 달리 아주 편하고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런 모습에 담수련의 표정은 오히려 어두워졌다.
기분 좋게 미소 짓는 모습은 상태가 나아진 것이 아니라 죽기 전 마지막으로 기를 불태우는 회광반조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말씀하지 마세요.”
“내가 원래 말이 많던 사람이다. 그런데 수십 년을 말 한마디 못하고 갇혀 지냈으니, 죽기 전에 말이라도 많이 하다 죽어야지.”
“하지만…….”
“안다. 입으로 빠져나가는 기라도 좀 막으면 한두 시진 더 살겠지. 그래도 난 말하다 죽으련다. 그런데 네 본 얼굴 한번 보자.”
“저요?”
“그래. 내가 관상도 좀 보는데, 요절할 상인가 아닌가 보려고 한다.”
담수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얼굴에 발랐다. 그녀의 얼굴은 그냥 수염만 붙인 정도가 아니라 피부에도 뭔가 많이 붙였기 때문에, 떼기 위해서는 특별한 약이 필요했다.
잠시 지나자 훤한 담수련의 본 얼굴이 나타났다.
“콜록! 콜록! 하하하! 이거 참 죽기 전에 내가 이렇게 눈 호강을 할 줄은 몰랐구나. 내가 의원이다 보니 별의별 미인들을 다 만났는데, 너 같이 예쁜 애는 처음이구나.”
“관상은 어떻습니까?”
악불군의 질문에 새편작은 혀를 차며 말했다.
“쯧! 쯧! 인명은 재천(在天)이라고 했다. 이 아이가 오래 살 운명이면 너 없이 혼자 돌아다녀도 오래 살 것이고, 일찍 죽을 팔자면 네가 안고 다녀도 죽는다. 무엇보다, 다행히 관상적으로는 요절할 상은 아니니 걱정 마라.”
악불군은 다른 말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요절할 상이 아니라는 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이 말씀하신 장소에서 가져온 책들입니다.”
악불군은 등에 멘 봇짐을 열더니 여러 책을 꺼내 앞에 놓으며 말했다.
‘고놈 참! 진짜 고지식하군…….’
자신의 의서만도 보통 사람들은 혹할 정도로 중요한 책이었다. 더욱이 배교비서는 마물로 취급을 하면서도 무림인들이라면 누구라도 탐내는 책이었다.
그런데 이미 가지라고 했는데도 다시 그의 앞에 꺼내 놓는 악불군의 모습을 보면서, 새편작은 정녕 믿을 만한 아이라는 생각을 했다.
“의서는 내가 의원 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네가 의술에 일가견이 있는 것 같으니 이제부터 네가 주인이다.”
“이것을 제게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담수련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그래. 어차피 난 틀렸고, 내 의술을 이대로 사장시키는 것은 좀 아깝지 않겠느냐? 너의 총명한 머리라면 아마 나보다 더 나은 의원이 될 게다. 단 하나만 약조해 주거라. 내 의술로 돈 벌 생각은 하지 않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거기 검은 천에 싸인 것을 풀어 보거라.”
악불군이 천을 풀자 흠칫 몰랐다. 그 안에는 시뻘건 표지로 된 책자가 놓여 있었다.
“내가 그것을 보니까 별의별 괴상한 수법들이 다 적혀 있더구나. 사람이라면 해서는 안 될 잔인한 수법도 많더라. 그런데 악인과 싸우려면 어느 정도 악인의 수법도 아는 것이 유용하다. 난 무공을 몰라 숨겼지만 네게는 도움이 될 것이다. 대신 다 외운 뒤에는 없애 버리거라. 너라면 내가 믿겠지만,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 것은 불안하구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제 빨리 집어넣어라.”
“예.”
악불군이 책자를 모두 싸서 등에 메자 새편작은 밖을 보며 말했다.
“날씨도 좋고 꽃도 참 예쁘다. 내가 그래도 운이 좋구나. 이런 날 떠나게 되다니.”
“……무슨 그런 말을 하세요?”
“내가 아직 너희들 이름도 모르는구나.”
“전 담수련이라고 합니다.”
“전 악불군입니다.”
“너희들과 내가 어떤 인연으로 이렇게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내 최악의 순간에 너희를 만나 덕분에 호사스럽게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로서는 정말 고마울 뿐이다. 콜록! 콜록!”
기침을 두 번 한 새편작은 다시 말했다.
“둘 다 맥을 내 손에 대 보거라. 마지막 진맥을 한번 해 보자꾸나.”
이미 뇌옥 동굴 앞에서 진맥을 했는데도 뭔가 미진한 듯 다시 진맥을 원하는 새편작의 말에, 둘은 가만히 자신의 맥을 그의 손가락에 갔다댔다.
눈을 감은 채 뭔가 즐거운 듯 흥얼대며 맥을 짚던 새편작은 조용히 말했다.
“수련아. 네가 내 의서를 보면 네가 왜 지금까지 악화되지 않았는지 단서를 찾을 수 있을 게다. 사람의 신체는 오묘해서 몸 자체가 영약이 되는 경우가 많단다.”
“그, 그게 무슨 소리세요?”
담수련과 악불군은 깜짝 놀라 물었다. 빙설초나 만년설삼의 힘을 빌지 않고도 자신의 병을 고칠 방법이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
“어르신, 그게 무슨 소리신…….”
다시 묻던 담수련은 고개를 푹 숙였다.
새편작이 결국 숨을 거둔 것이다.
둘은 너무 중요한 다음 말을 못 들은 것이 아쉬웠지만 어찌하랴. 그들의 연이 거기까지인 것을…….
그나마 원래 둘이 가졌던 희망의 불씨가 조금은 더 커진 듯하다는 게 위안이었다.
* * *
“장군! 함정에 빠진 것 같습니다.”
장군이라고 불린 자는 팔척장신에 대단한 강한 인상을 지닌 중년인이었다.
“유복통, 그놈에겐 이런 작전을 쓸 만한 머리가 없을 텐데?”
중년인은 자신이 당한 것이 무척이나 분한 듯 중얼거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본진과 떨어지며 그를 따르는 수하가 겨우 삼십여 명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를 급습한 자들은 무림인이 분명했다.
“영웅회에서 분명 우리끼리의 싸움에는 끼어들지 않겠다고 했거늘!”
“아악!”
그때 그의 수하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장군! 피하십시오. 저들이 벌써 따라온 모양입니다. 지금 본진에서도 장군을 찾고 있을 것입니다. 이곳은 제가 맡겠습니다.”
부장의 말에 중년인은 좌우를 둘러보더니 한탄을 하며 말했다.
“잠깐의 방심으로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 유 장군, 꼭 살아라.”
“예! 빨리 가십시오. 장군께서 다치시면 안 됩니다.”
중년인은 유 장군이라는 자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이십여 명의 군사들이 그의 뒤를 따라 달렸다.
중년인이 피하자 유 장군은 크게 외쳤다.
“장군님께서 무사하셔야 한다. 죽음으로 적을 막아라!”
유 장군은 보통 군사와 달리 상당한 무공을 지닌 듯했다. 하지만 그들을 쫓는 자들을 당해 내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 * *
“너무 가엾으신 것 같아.”
새편작을 홍택호 부근 양지 바른 곳에 묻은 담수련은, 잠깐 본 새편작이 스승이라도 되는 듯 그의 죽음이 무척 가슴이 아팠다.
“그래도 마지막에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가셨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악불군은 자신의 어머니가 담수련이 준 과일을 먹고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가시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였다.
말하던 악불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어디선가 창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연달아 들렸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던데 빨리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았어.”
무림인들은 자신들은 수시로 전쟁을 벌이면서도 군부간의 전쟁은 무척이나 싫어해서 무조건 회피했다.
악불군은 입을 오므리고는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렇게 일각쯤 지났을까……
백설이 혼자 달려왔다.
“백설아, 내 말은 어떻게 하고 혼자 왔어?”
악불군이 묻자 백설은 마치 알아듣기라도 한 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가며 히힝거렸다.
“누가 너희들을 공격했어?”
히이잉!
백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악불군은 다시 물었다.
“어디야?”
악불군은 자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해를 당했고 백설이 그것에 대해 대단히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는, 담수련과 함께 백설의 등에 타고는 물었다.
그러자 백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쏜살같이 나무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그냥 갈 걸 그랬나 봅니다.”
백설이 달려온 곳에는 군복을 입은 군사들의 시신이 십여 구 널려 있었고, 역시 십여 명의 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장대한 체구의 한 중년인이 창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무림인으로 보이는 자들 이십여 명이 호시탐탐 공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휘익!
“아악!”
“으아악!”
또다시 중년인을 보호하고 있던 군사들이 죽어 나갔다. 지금 상황이면 이들이 일 각 이상을 버티기 어려워 보였다.
“소군, 저자들은 군인이 아니라 살수들 같은데?”
“제가 보기에는 어찰단들과 수법이 비슷합니다.”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적들을 보고 있던 중년인은, 이런 상황에서 뒤에 앉은 여인과 담담히 대화를 나누는 악불군을 보자 그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무림인이냐?”
“그렇습니다.”
“유복통의 편이냐?”
“전 어떤 편도 아닙니다.”
“그럼 나를 돕거라.”
중년인의 말투는 강압적이었고 대단히 패도적이었다.
“전 정치나 황실의 일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난 주원장이다. 나를 돕는다면 넌 분명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