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98화>
98화. 주원장
주원장은 자신의 이름에 대해 상당한 자부심을 가진 듯 말했지만, 안타깝게도 악불군은 주원장이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다. 빨리 주원장을 죽여라!”
악불군의 등장으로 잠시 멈칫했던 살수 중 붉은 두건을 쓰고 있는 자가, 악불군이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는지 크게 소리쳤다.
모두가 검은 두건을 쓰고 있는데 오직 그만 붉은 두건을 쓰고 있는 것이, 그가 지휘자인 듯했다.
명이 떨어지자 잠깐 싸움을 멈췄던 살수들이 주원장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챙! 채챙!
“아악!”
히이힝!
주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군사들은 모두 무공을 알고 있는 정예 군사였다. 그럼에도 기습한 무림인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주원장을 호위하고 있던 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점점 줄어들더니, 결국 호위대장으로 보이는 장수의 말까지 암기를 맞고는 애처로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 순간 담수련의 표정이 확 변했다. 살수들의 손속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이었다.
“소군, 저분 도와줘.”
담수련의 명이 떨어지자, 상관하지 않겠다던 악불군이 지체 없이 검을 빼 들고는 살수들을 향해 날아갔다.
두 명의 살수들의 공격을 간신히 창으로 막아 낸 주원장은, 또 다른 살수가 연이어 자신을 공격해 들어오자 더 이상 막기는 틀렸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 죽여라! 하지만 네놈들도 멀쩡하게 돌아가진 못한다.”
주원장은 동귀어진을 할 생각인 듯 방어를 도외시한 채, 달려드는 살수를 창으로 찔러 갔다.
“응?”
창을 찔러 가던 주원장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자신을 공격하던 두 명의 살수들이 피를 뿌리며 고꾸라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악불군은 너무나도 간결하게 살수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이십 명이 넘는 수하들이 죽어 나가자, 지휘자는 몸을 바르르 떨더니 총공격 명령을 내리려고 했다.
“대장군님!”
“대장군니임!”
그때 누군가를 찾는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주원장을 구하기 위해 달려온 군사들이었다.
“여기다!”
주원장이 크게 소리치자, 지휘자는 악불군을 원독에 찬 눈으로 노려보더니 급히 호각을 불고는 몸을 날렸다.
악불군은 도망치는 자들까지 쫓아가서 죽일 생각은 없는지, 그들이 도망치자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이내, 주원장의 외침을 들었는지 사방에서 말을 탄 장수들이 달려왔다.
“대장군님,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십니까?”
그들은 먼저 주원장의 주위를 빙 둘러싸고는 물었다.
“난 괜찮다.”
그제야 엄청난 수의 군사들이 그곳을 에워쌌다.
몰려 온 군사를 본 악불군은 주원장을 슬쩍 쳐다보았다.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지만, 예상 보다 더한 거물이었던 것이다.
악불군이 백설의 옆으로 가자, 군사들은 창을 악불군에게 향하더니 포위를 했다.
“무례하게 굴지 마라!”
주원장의 명이 떨어지자 군사들은 급히 창을 거두고는 뒤로 물러섰다.
십여 명의 장수들의 호위를 받으며 주원장이 위풍당당하게 악불군에게 말을 몰아 다가왔다.
“대단한 무공을 지녔더구나. 이름이 뭐냐?”
“악불군이라는 무명소졸입니다.”
“악불군?”
주원장은 그 이름을 잠시 되뇌었지만 들은 적이 없는지 다시 물었다.
“어떠냐, 네가 원한다면 당장 장군 자리도 줄 수 있다. 내 밑으로 들어와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정치나 군부와는 거리가 멉니다. 지금도 아가씨께서 장군을 도와주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냥 갔을 것입니다.”
“이놈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장수 중 한 명이 당장 검을 뽑을 자세로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주원장의 손짓에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아가씨면 저 낭자를 말하는 것이냐?”
담수련은 역용약을 떼어 낸 후 다시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주원장은 담수련을 주시하더니 진지하게 포권을 했다.
“이 주원장이 낭자 덕에 목숨을 구했으니 감사드리겠소.”
담수련의 몸에서 풍기는 고아함에, 주원장조차 함부로 말을 놓지 못하고 반공대로 대했다.
“장군님의 기상이 이 숲을 꽉 채운 듯 보였습니다. 영웅이 살수 따위에게 해를 입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하하하하! 낭자의 말이 마치 꿀을 먹는 듯 달콤하구려. 내 군영이 여기서 멀지 않은데, 잠시 가겠소? 내 목숨을 구해 줬으니 그 보답은 해야 할 것 같은데?”
“저희는 바삐 할 일이 있습니다. 꼭 보답을 주시겠다면 말이나 한 필 주십시오.”
“한 부장. 네 말을 드려라.”
담수련의 말이 끝나자 주원장은 즉시 옆에 있는 장수 한 명에게 명을 내렸다.
“예!”
한 부장이라 불린 장수는 말에서 자신의 무기만 빼고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안장까지 그대로 말을 넘겼다.
“악불군이라고 했지.”
“예.”
“악 대협은 나의 생명의 은인이다. 우리의 세력권에서는 누구든 악 대협께 무례를 저지르는 자는 군령을 다스릴 것이다!”
“예!”
“악불군. 내 이름을 모르는 것 같은데 다시 말해 주지. 난 주원장이다. 이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라. 말은 굳이 다시 돌려줄 필요 없으니, 낭자를 잘 모시길 바라마. 가자!”
말을 마친 주원장이 말머리를 돌려 달려가자, 모든 군사들이 썰물 빠지듯 사라졌다.
“저분 이름 잘 기억해 놔.”
“도우라고 명을 내리셔서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이 주원장을 도우라고 명을 내린 것에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본 반란군들은 세력 확장에만 몰두할 뿐 제대로 통솔을 하지 못해서 곳곳에서 양민들을 괴롭히고 있었어. 한마디로 오합지졸이었어. 그런데 저분의 군사들은 죽음으로 주군을 지키고 있었어. 수하들에게 그 정도의 존경을 받는다면 도와줄 이유는 충분하지 않겠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보통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강호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나는 은원 관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 일이 향후 무림의 판도에 얼마나 큰 영향을 펼치게 될지는 악불군이나 주원장 모두 모르고 있었다.
* * *
“무슨 일이 있습니까?”
영웅회에서 온 서찰을 읽던 백천학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자 태극검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백천학은 서찰을 태극검자에게 건넸다. 그리고 서찰을 읽던 태극검자의 표정도 굳어졌다.
“드디어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요.”
“중원 무림인들이 모두 힘을 합해도 태양천을 물리치려면 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데, 이들은 벌써 우리의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원나라에서 물러난 지역들은 사실 무주공산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마도와 사파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솔직히 빈도는 그들이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생각이 다릅니다.”
“생각이 다르다니요?”
“중원이 금나라와 원나라에게 계속 유린을 당한 이유는 그들이 강해서만이 아니라, 마도와 사파 그리고 정파 간에 이어진 오랜 전쟁 때문에 중원 무림이 자중지란으로 스스로 무너진 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원나라를 물리침과 동시에 마도와 사파까지 전부 청소할 생각입니다.”
“구천마성이나 혈해마계는 쉽게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거기다 우리가 원나라와 싸우면서 많은 전력 손실을 가져오는 동안 그들은 꾸준히 전력을 키워 왔다는 증거도 여러 곳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당장 그들까지 적으로 삼는 것은 우리 힘만으로는 벅찹니다.”
“당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습니다. 정파에서 정도라는 미명하에 계속 그들에게 당하기만 할 수는 없습니다. 전 그들에게 죄에는 그에 상응하는 손해가 따른다는 것을 각인시켜 줄 것입니다.”
백천학의 말에 태극검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강하면 부러질 수가 있는 법인데, 공자님은 너무 강하다. 걱정이구나…….’
* * *
“그걸 벌써 다 외웠어?”
보름동안 안휘를 거쳐 강서성에 도착한 담수련은 악불군이 배교비전을 태웠다는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천륭검보의 그림들조차 며칠 만에 세세한 자세까지 모조리 외었던 악불군의 기억력은, 뇌가 최대치로 활성화된 담수련조차도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수법들이 너무 괴기해,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대충 보고 없앴습니다.”
“대충 봤어도 다 외웠을 것 아니야?”
“외우긴 했지만, 제가 사용할 일은 거의 없을 것 같더군요.”
“내가 배운 바로는 세상에 나쁜 것은 없어. 나쁜 것은 그것을 나쁘게 사용하는 사람이지. 배교에 대해서는 나도 들은 것이 있어. 수많은 사술과 괴기한 무공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고 하더라고. 그렇다면 그것으로 살릴 수도 있지 않겠어?”
“아가씨의 말씀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악불군도 배교비전의 수법 중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것들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런데 왜 잠룡세가에 대한 소문이 거의 없는 걸까?”
그녀가 잠룡세가를 빠져나올 당시의 상황은 당장이라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처럼 다급했다. 그러나 내려오는 동안 반란군과 원나라 사이의 전쟁은 물론 여러 무림 세력에 대한 소문도 많이 들려왔지만, 신기할 정도로 잠룡세가에 대한 말은 전혀 없었다.
“무사하니까 아무 소문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천하의 상황이 이런데 잠룡세가만 아무 일이 없다는 것이 말이 될까? 난 너무 조용한 것이 오히려 불안해.”
“빙설초만 구하면 종리 단주님을 빨리 찾아보겠습니다. 그럼 세가의 정확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말도 없이 이렇게 사라져서 유모가 걱정을 많이 할 것 같은데…….”
담수련의 말을 듣던 악불군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멀리 흙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아가씨,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우선 잠시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담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악불군을 따라 옆 숲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최소 삼십 명은 됨직한 무림인들이 대단히 다급한 듯 말을 몰고 지나갔다.
“저자들, 화룡세가의 옷을 입고 있어. 화룡세가가 강서성에는 왜 온 거지?”
담수련은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약혼자인 화우성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약간은 작용한 듯했다.
“어찌할까요?”
악불군은 담수련의 표정이 살짝 굳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뭘 어떡해? 아버님께서 그러셨잖아. 화룡세가와 잠룡세가 간의 관계는, 화 공자님께서 내 성인식 때 떠난 것으로 끝난 거라고.”
“알겠습니다. 이제 가시지요.”
‘어떤 때는 은근히 얄밉다니까.’
화우성과 자신의 관계를 다 알면서 기분 안 좋게 묻고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자며 말머리를 돌리는 악불군을 보며, 담수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 * *
“지금 그 말을 우리 보고 믿으라는 것이냐?”
백인막의 사 호는 구 호의 말을 듣자 오 호를 슬쩍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반문했다.
“솔직히 난 막주님께 이번 청부는 포기하자고 건의하고 싶다.”
“구 호! 이번 청부가 얼마나 큰 건인 줄은 아는 거냐? 막주님께서 그 말을 들었다면 넌 암흑동에 갇혔을 게다.”
듣고 있던 오 호가 버럭 소리쳤다.
“우리가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야! 십삼 호. 구 호 얘 왜 이러는 거냐? 네가 말해 봐라.”
사 호는 아무 말 없이 있는 십삼 호를 보며 물었다.
“구 호가 신중하고…….”
“이게 신중한 거냐! 완전 겁을 먹은 거지?”
“사실,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처음 봤을 때는 정말 너무 쉬운 청부라고 생각해서, 너희들 오기 전에 우리끼리 처리하자고까지 했는데.”
“했는데?”
“그놈을 쫓아다니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지더라. 너희도 알다시피, 우리 살수들이 자신이 없어지면 그건 죽음으로 직결된다는 것은 알잖냐?”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구 호와 달리 십삼 호는 암살자를 만났을 때 너무 무모하다 할 정도로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십삼 호가 자신이 없다는 말은 사 호와 오 호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했다.
이들 모두는 따로 직급이 없지만, 살행을 나갈 경우 번호 수가 작은 사람이 지휘를 하게 되어 있었다.
사 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을 하더니 말했다.
“좋다. 내가 직접 그놈을 만나 보겠다. 그런 후 결정한다.”
악불군에게 새로운 상황이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하나 이것이 위기가 될지 기회가 될지, 아직까진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