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99화 (99/472)

<천검지애 99화>

99화. 뒤쫓던 자들(1)

“올까?”

주루 이 층의 창가에 자리 잡은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개방의 제자라면 올 것입니다.”

악불군은 현에 들어서면서 무공을 익힌 것 같은 거지에게 동전을 한 닢 주면서 슬쩍 사해신개의 죽패를 보여 주었다.

담수련이 보기엔 거지가 죽패를 보고도 아무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악불군은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급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소채와 만두 그리고 어향육 한 접시 가지고 오게.”

“예!”

악불군이 어향육을 시키자 점소이의 행동이 확 변했다. 요즘 같이 어수선한 시기에 가장 비싼 요리를 시켰기 때문이었다.

“뭐 하러 그렇게 많이 시켜?”

“새편작 어르신께서 제게 그러셨습니다. 오음절맥이 활성화되면 점점 마르고 힘이 빠질 것이니, 식사를 기름지게 해야 한다고요. 이제부터 하루에 한 번은 꼭 고기를 드셔야 합니다.”

“매일?”

“예.”

“그렇게 먹으면 난 뚱뚱해져.”

“뚱뚱해지지도 않겠지만, 뚱뚱해지신다 해도 아가씨의 건강이 먼저입니다.”

“싫은데…….”

“안 됩니다. 아가씨께서 싫어하는 것은 제가 다 막아 드릴 수 있지만, 식사만은 아무리 싫어도 제 말을 따라 주셔야 합니다.”

“피!”

담수련은 사실 입이 짧아서 어려서부터 잘 먹지 않았다. 하지만 악불군이 들어온 이후 식사를 꽤 하게 됐는데, 식사가 좋아져서가 아니라 식사를 해야 같이 놀 수 있다는 악불군의 말 때문이었다.

종리화가 악불군과 담수련의 관계에 대해 불안을 느낀 것도 그때부터였다.

어린아이에게 먹기 싫은 것을 먹게 만드는 것은 부모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악불군의 말 한마디에 먹기 시작했으니, 담수련이 얼마나 악불군을 좋아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투정 어린 표정에 자신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짓던 악불군의 눈이 한쪽으로 향했다.

악불군을 살짝 보던 다부진 인상의 중년인은 악불군이 자신을 보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보통 사람이 본다면 조금도 이상함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지만, 악불군은 그가 당황했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최근 안 보이던 아주 특이한 기를 가진 자들…….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뒤를 이렇게 놓치지 않고 따라오지?’

악불군도 중년인에게 신경을 안 쓰는 척 자연스럽게 고개를 창가로 돌렸다.

근래 악불군은 지금 중년인이 보이는 것과 비슷한 기를 풍기는 자들이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백 장 밖에서 따르고 있었고, 특별하게 해를 끼치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어서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었다.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창밖을 보던 악불군은, 한 중년인이 자신이 있는 주루로 오는 것을 보자 담수련에게 말했다.

“누구?”

창가를 내다본 담수련은 의아한 듯 물었다. 거지행색을 한 자는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변복을 하고 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알아?”

담수련의 반문에 악불군은 잠시 입을 닫았다.

그가 중년인이 개방에서 오는 자라고 안 것은 그의 몸에서 개방의 무공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한눈에 느낀 것인지는 그도 알 수가 없었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경지가 이런 것인가……?’

악불군은 담무룡이 기를 감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면서 했던 말들을 생각했다. 그러자 담무룡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더욱 크게 일어났다.

“어떻게 알았냐니까 왜 갑자기 말이 없어?”

“가주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덕분입니다.”

악불군은 자신이 지금 보이는 경지가 담무룡의 예상을 몇 배나 뛰어넘는 성취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공자님, 소인 장삼 왔습니다.”

그때 악불군이 보았던 중년인이 그들의 옆으로 오더니 마치 잘 아는 사이처럼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앉아요.”

“예.”

[저는 개방 강서중부 분타주인 연환개라고 합니다.]

중년인은 앉자마자 즉시 전음을 보냈다.

악불군은 그의 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약간 궁금한 일이 있어서 죽패를 보인 것인데, 분타주님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전음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음을 하지 말라는 말에 연환개는 약간 불안한 듯 주위를 살피더니 그냥 말했다. 그는 악불군이 음파를 차단할 정도의 내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태상호법님께서 공자님의 부탁을 받으면 모든 일에 우선하여 처리해 주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악불군의 검미가 살짝 좁아졌다.

사해신개가 자신에게 대단한 호의를 베풀고 있는 것은 알지만, 도가 너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내게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푸는 이유를 모르겠군.’

악불군은 이해가 안 갔지만 우선 물을 것부터 묻기로 했다.

“오다 보니까 화룡세가의 무인들이 남쪽으로 떼를 지어 달려가던데,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화룡세가에서 갑자기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호남 남부는 거의 평정했고, 강서성까지 넘보다가 강서성 남부를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귀령문과 부딪쳤습니다.”

“귀령문이면 사파입니까?”

“사파이긴 한데, 강서성에서는 상당히 세가 강한 문파입니다. 강서성에 넘어 왔던 화룡세가의 세력이 그들에게 전멸을 당하자, 화룡세가에서 반격하기 위해 무력 집단을 보낸 것 같습니다.”

“다른 오룡세가는 반란군과 원나라 사이에서 제대로 운신을 못하고 있는데 화룡세가는 세를 확장하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한 것이지요?”

듣고 있던 담수련이 물었다. 다시 그녀의 뇌가 활발하게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호남의 형산을 기점으로 광동 광서를 포함하는 남쪽 지역은 대도에서 너무 멀다 보니 원나라에서 거의 통치를 못했습니다. 그 바람에 이쪽 지역은 대부분 호족 군벌들에 의해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지요. 화령세가 역시 호족 군벌에 가깝다 보니, 다른 세가들과는 달리 백성들에게 큰 배척을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화룡세가에서 배를 갈아탈 준비를 하는 모양이군요.”

“예?”

담수련의 말에 연환개는 의미를 잘 모르겠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아니에요. 계속 얘기해 보세요.”

“화룡세가의 대응을 본 귀령문이 구천마성에 도움을 청한 모양입니다.”

“구천마성이 강서에 있나요?”

“아닙니다. 지금 그들의 총단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하로 숨기 전까지의 총단이 광동에 있었으니, 광동이나 강서의 남쪽에 있을 확률이 가장 높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담수련의 눈이 샐쭉해졌다. 사신곡이 구천마성의 짓이란 것을 안 후, 그녀는 구천마성에 대해 아주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구천마성이 귀령문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거기까지는 제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보고를 했으니 윗분들께서 분석하실 것입니다.”

“귀령문은 어디에 있나요?”

“여기서 남쪽으로 삼백 리 정도 내려가면 송화산이라고 있습니다. 그 중턱에 있을 것입니다.”

연환개는 담수련이 계속 질문을 하자 답을 하면서 악불군의 눈치를 슬쩍 보았다. 죽패를 가지고 있는 악불군에 대해서는 명을 받았지만, 담수련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예에?”

악불군이 눈치채고 언질을 주자, 연환개는 깜짝 놀라 더욱 공손하게 답을 하기 시작했다.

* * *

“아가씨,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식사를 끝내고 주루를 출발한 악불군은, 담수련이 말을 천천히 몰며 뭔가 생각에 잠겨 있자 약간 불안함을 느끼며 물었다.

“소군, 귀령문 말이야.”

“아가씨, 지금 빨리 해남도로 가야 합니다. 무림 세력들 간의 싸움에 괜히 얽혔다가는 길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악불군은 그녀가 귀령문이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단호하게 말했다.

거기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화룡세가와 만나고 싶지 않다는 약간의 사적인 감정도 끼어 있었다.

“구천마성이 이 일에 연관이 되어 있다고 하잖아?”

“저도 듣긴 했지만, 구천마성이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는 연환개 분타주님도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곤 했지만 내 생각엔, 그들이 분명 나타날 것이라고 봐.”

“그렇게 예상하시는 이유가 있으십니까?”

“구천마성은 중원 무림의 마도의 절대자였어. 그런데 원나라가 세워지고 나서 갑자기 사라졌단 말이야.”

“저도 그 얘기는 알고 있습니다.”

“지금 원나라가 밀리고 있잖아? 이미 남쪽 지역은 원나라의 통치에서 벗어났어.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구천마성이 모습을 드러낼 때란 말이야. 그런데 화룡세가에서 귀룡문을 제거하고 여기까지 세력을 넓힌다면, 구천마성으로서는 여러 가지로 귀찮을 것이 분명해.”

“그건 화룡세가와 구천마성 간에 해결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우리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 하지만 난 자꾸 새편작 어르신이 아른거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의술을 행하던 그분을 수십 년 동안 가둬 두고, 거기다 독인을 만들기 위해 죄도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어. 그런 자들을 어떻게 그냥 두고 봐.”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얼굴에는 갈등이 나타났다.

담무룡은 악불군에게, 잘 싸워서 보호인을 잘 호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위험한 곳을 아예 회피하는 것이 진정한 호위 무사라고 했다.

하지만 타고난 본성에서 끓어오르는 정의감은 구천마성을 용서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군이 그냥 가자고 하면 난 갈 거야. 하지만 사신곡에서 본 구천마성의 악행이 두고두고 생각나면서, 오늘 이대로 간 것을 후회할지도 몰라.”

‘그래, 새편작 어르신께서 아가씨는 언제나 마음이 편해야 한다고 하셨어. 심기(心氣) 경호도 호위에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야.’

악불군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과 담수련의 주장에 동조하고 말았다.

호위로서 안 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지만, 그 스스로가 신의를 중시하는 신의현맥이기에 외면할 수 없었기도 했다.

“알겠습니다. 단, 구천마성이 나타나지 않으면 저희도 그냥 가는 겁니다.”

“알았어. 약속!”

담수련이 새끼손가락까지 내밀며 크게 말하자 악불군은 결국 미소를 짓고 말았다.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남긴 흙먼지가 가라앉자 그곳에 네 명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사 호, 내가 보기에는 별거 아닌 것 같은데 네가 직접 봤으니 말해 봐라.”

사 호가 악불군이 사라진 길을 쳐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오 호가 물었다.

오 호의 질문에도 반 각 가까이 답이 없던 사 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구 호 말대로 신중해야 할 것 같다.”

“정말 그 정도였냐?”

“나랑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어. 그런데…….”

다시 사 호가 입을 닫자 오 호가 짜증 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사 호, 왜 그래 너까지! 그런데 뭐?”

“빈틈이 없었어.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무슨 말인지 좀 자세히 해 봐라.”

“둘 다 식탁에 앉아 있었고, 나와의 거리는 일 장 남짓밖에 안 됐다. 두 손은 모두 식탁 위에 올라와 있었지. 당장 살수를 펼친다 해도 성공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난 눈을 급히 돌리고 말았다.”

사 호는 그 상황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거 나도 직접 가서 만나 보든지 해야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

오 호는 사 호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너무 멀어지면 추적하기 어렵다. 빨리 가자.”

구 호는 손을 들어 수하들에게 신호를 보내고는 몸을 날렸다. 그러자 나머지도 그의 뒤를 따라 몸을 날렸다.

* * *

“아가씨, 잠깐 멈추시겠습니까?”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백설의 고삐를 잡아 멈췄다.

“왜?”

“아무래도 하나 정리를 하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쫓아와?”

“예. 악양에서부터 여기까지 쫓아온 것으로 보아, 쉽게 볼 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되도록 죽이지는 말고 처리해 봐. 구천마성을 만나면 또 살인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벌써 살인을 하는 것은 좀 그런 것 같아.”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할까?”

“우선 제가 진을 칠 테니 안에서 잠시 쉬십시오.”

악불군은 백설의 안장에 꽂혀 있던 대나무들을 꺼내 담수련이 편히 앉을 만한 바위 주위에 꽂기 시작했다.

“잘된 것 같습니까?”

“호호~ 소군도 이제 진 잘 치네. 완벽한 것 같아.”

“그럼 들어가십시오.”

담수련이 안으로 들어가자 악불군은 마지막 대나무를 꽂았다.

‘확실히 진이란 것이 참 신묘하단 말이야…….’

악불군은 담수련의 모습이 사라지자 감탄하듯 중얼거리고는 백설에게 다가갔다.

“백설아, 아무래도 이자들이 우리를 이렇게 쫓아 올 수 있는 이유가 너인 것 같아. 네 친구 데리고 한 백 장만 달려갔다가 돌아와라.”

악불군의 말에 백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악불군의 새 말은 어느새 백설의 수하가 된 듯 급히 그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자들이 이렇게 끈질긴지 궁금하군.’

악양부터 이어지던 연(緣)이 지금 악불군의 손에 의해 마무리 지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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