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0화>
100화. 화룡세가(1)
달리던 사 호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에 그 자리에 섰다. 동시에 오 호와 구 호도 뭔가를 느꼈는지 그 뒤를 이어 멈췄다.
“왜 갑자기 서는 거야?”
그들을 지나쳤던 십삼 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오며 물었다.
사 호는 대답 없이 몸을 한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악불군이 나무에 등을 기댄 편한 자세로 서 있었다.
네 명의 백인막 살수들의 얼굴은 굳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길옆이라고는 하지만, 은신술을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버젓이 보이게 서 있었는데 잠깐이나마 못 보고 지나쳤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다.
물론 상당한 고수라 해도 급하게 달리다 보면 옆에 서 있는 사람을 놓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되는 특급살수들이었다.
그들이 모두 자신을 보자, 그제야 고개를 든 악불군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네 명이나 되는 고수들 앞에서 딴짓을 하는 것도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었지만 악불군은 아주 태연했다.
마치 그들 정도 수준은 고수라 취급도 안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
“한두 명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수가 많군요.”
말을 마친 악불군은 천천히 기댄 나무에서 등을 떼고는 그들의 앞으로 몇 걸음 다가섰다.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살수들이신 것 같은데, 누구 청부를 받고 저를 죽이러 오셨습니까? 아니면 현상금 때문에 오신 겁니까?”
“…….”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네 명 모두 답을 못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다.
수많은 살행을 했지만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답이 없자 악불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말하기 싫은 모양이군요? 주위에 숨어 있는 자들의 수가 최소한 서른은 넘는 것 같고, 네 분은 자신의 무공을 완벽하게 감출 수 있는 능력까지 가지고 계시니, 누구라도 걸리면 살아남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결국 사 호가 앞으로 한 발 나서며 말했다.
“그래, 소협은 우리가 협공을 한다면 어떨 것 같소?”
“살수답게 암살을 노렸으면 성공 확률이 조금은 더 있었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제게 들켰으니, 저를 죽인다는 것은 물 건너 같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이기어검을 사용했다는 말을 들었소이다. 한번 보여 줄 수 있겠소?”
사 호는 악불군이 진짜 이기어검을 쓴다면 암살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십삼 호 말대로 살수가 기세에 밀려 자신감을 잃는다면 대부분은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악불군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검을 뽑았다.
그러자 모두 다급히 무기를 꺼내 손에 들었다.
자신들이 이기어검을 보고 싶다고 해서 검을 뽑았지만, 그 순간 자신들을 향해 검이 날아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악불군은 검의 끝을 그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날카로운 검기가 네 명 전체가 짜릿짜릿할 정도로 강하게 그들을 짓눌렀다.
하나, 막상 악불군은 자신의 행동이 그들에게 강한 압박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점점 검(劍)과 신(身)이 일체를 이루며 그의 가벼운 움직임에도 검기가 따라다니고 있었지만 스스로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휘잉!
순간 악불군의 자세가 확 변했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검이 떠나더니 그들의 옆을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곧 공중으로 떠오르며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버리더니 순식간에 악불군의 손으로 돌아갔다.
사 호를 비롯한 네 명의 얼굴이 확 변했다. 검이 그들의 옆을 지나갔지만 그들은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정면대결은 언감생심이었고 살행을 한다 해도 성공할 거란 보장은 절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악불군은 검을 검집에 꽂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 살생을 하지 말라는 아가씨의 당부가 있어 이 정도로 끝냅니다. 하지만 또 따라온다면 그땐 이런 식으로 끝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네 분의 잘못된 판단으로 사방에 숨어 계신 수하분들의 목숨까지 잃게 된다면 얼마나 큰 불행이겠습니까?”
사 호는 공손하게 포군을 했다.
“대협께서 자비를 베풀어 저희들의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기회가 되면 그 은혜는 갚겠습니다.”
사 호의 말에, 악불군의 눈에 이채가 나타났다.
자신이 죽이려고 하다가 그만둔 것이 그들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 될 수는 없지 아닌가…….
“그게 왜 은혜가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은혜 갚을 생각은 말고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나 마십시오.”
사 호는 손을 들어 숨어 있는 수하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린 후 몸을 날려 사라졌다.
“와아! 소군 정말 멋있다.”
진을 해체하자 담수련이 정말 반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멋이요? 저 같은 놈에게 무슨 멋이 있겠습니까?”
순간 담수련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소군은 내가 우습게 보여?”
“예?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 아가씨께서 우습게 보이겠습니까?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악불군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했다.
“그럼 내가 멋있다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해?”
“그건…….”
“소군은 내가 본 남자 중에 가장 멋있어. 그런데 그걸 부정하면 내가 별 볼 일 없는 여자 같잖아!”
“하하하! 그러고 보니 이따금 동경에 비춘 제 모습이 멋있다는 생각을 이따금 하긴 했습니다.”
“킥!”
악불군을 당황하게 하고 금방 한 말까지 즉시 바꾸게 할 수 있는 여자. 담수련이었다.
악불군은 담수련이 재미있다는 듯 웃자 기분이 좋은 듯 같이 미소를 지었다.
분명 절대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둘은 이상하게 행복했다.
“백설이 옵니다. 다시 가시지요.”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사라지고 반각쯤 지났을까……
사 호를 비롯한 모두가 다시 나타났다.
“어쩌려고?”
“난 저자를 계속 따라다녀 볼 생각이다.”
사 호의 말에 오 호가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이 물었다.
“무공 수위까지 우리가 전혀 감지를 못했어. 내공이 우리보다 더 높다는 의미다. 거기다 아까 이기어검 봤지? 살행을 하면 우리가 다 죽는다.”
“살행 때문이 아니야.”
“그럼?”
“저런 고수가 왜 고작 여인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고 다니는 것인지, 그게 궁금해졌어.”
“그게 왜 궁금해?”
“지금 원나라와 반란군이 팽팽한 것 같지만, 막주님께서는 원나라가 밀리고 있다고 분석하셨다. 원나라가 물러가고 대공까지 중원에서 축출되면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 같냐?”
사 호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백인막은 살수 집단 본연의 임무인 청부를 받고 상대를 죽여 왔다.
하지만 그들에게 많은 돈을 주고 청부를 할 수 있는 집단이 대공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이 대공의 청부를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죽은 자들은 대부분 중원의 무림인들이었다.
백인막주는 자신들이 원나라에 부역을 한 것은 아니라고 언제나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부역을 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만약 중원이 중원 무림인들에 의해 다시 장악된다면, 원나라에 부역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피의 숙청이 시작될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막주님께서 일 호부터 나까지 무림에 나가 우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세력이나 사람을 찾아보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저자는 일개 호위 무사야. 그리고 혈혈단신이라고! 아무 세력도 없는 자가 우리를 어떻게 보호하냐?”
“너희들 정말 저자의 무공이 무서워서 살행을 포기한 거냐? 우리가 언제 죽음을 두려워한 적 있어? 우린 저자를 공격해서 죽을까 봐 살행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저자의 기세에 눌려 포기한 거야. 내공의 기가 아니라 그냥 저절로 풍기는 기세에 눌린 거라고. 난 저자가 엄청난 인물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따라다녀 보겠다는 거다.”
“또 따라오면 죽인다고 했어. 저자의 능력상 너 곧 걸려.”
“해를 끼치기 위해 따라간다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럴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인다면 죽일 사람은 아니라고 본다.”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생각에 잠겨 있던 구 호가 갑자기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구 호, 너도 가겠다고?”
“계속 저자를 따라다니면서 굉장한 흥미를 느꼈다. 나도 좀 더 알아보고 싶다.”
“좋다. 그럼 오 호와 십삼 호는 철수해라. 그리고 막주님께는 내가 우리를 보호할 자를 한 명 발견해서 따라갔다고 전해.”
* * *
“분성주님, 큰일났습니다!”
구천마성 복건분성 당주 마천택이 사색이 되어 뛰어 들어왔다.
그의 행동은 천하에서 가장 차가운 사람 중 한 명으로 불리는 분성주 냉면마도 남우철조차 얼굴에 미미한 동요를 보이게 만들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 이러는 것이냐?”
어찌나 차가운지 공기가 얼어붙은 것 같은 그의 냉막한 목소리에 약간 정신을 차린 듯, 마천택은 허리를 숙이며 보고를 시작했다.
“불귀곡에서 연락이 없어 수하들을 보내 보니, 불귀곡이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사신곡을 불귀곡이라 부르고 있었다.
냉면마도의 표정이 더욱 차갑게 변했다.
“채광욱은 어떻게 됐느냐?”
“원주인 채광욱을 비롯해 부원주인 조충병까지 죽은 채 발견되었고 독인들까지 죽어 있었다고 하니, 할 수 있는 방어는 최대한 했던 것 같습니다.”
“태양천이냐? 아니면 어찰단?”
“그곳의 대주인 보탁현이 다행히 살아 있어 적을 특정할 수는 있었는데, 전혀 모르는 자들이었습니다.”
“도대체 몇 명이나 쳐들어왔기에, 독인까지 풀었는데 채광욱까지 죽었다는 것이냐?”
“두, 두 명입니다. 이십 대의 젊은 놈들이었다고 하는데, 싸움은 한 명만 했다고 합니다.”
쾅!
냉면마도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자신의 책상을 손으로 내려치고 말았다.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책상을 보며 마천택은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게 지금 말이 되느냐? 이십대 놈이 거의 십대 고수에 맞먹는 무위를 지녔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을 보고한 보탁현 그놈을 당장 끌고 와라!”
“지금 이쪽으로 데리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놈들이 뇌옥에 갇혀 있던 새편작을 데려갔다고 하는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새편작을?”
잠시 생각을 하던 냉면마도는 다시 명을 내렸다.
“본 분성에 구천마영이 몇 명이나 있지?”
“이십 명입니다.”
“구천마영 열 명을 불귀곡으로 보내 그놈들을 찾아내라고 해라. 새편작을 데리고 갔다면 분명 흔적을 남겼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내라고 해라.”
“예! 그런데 본 성에는 뭐라고…….”
냉면마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불귀곡과 복건분성은 상당한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에 이번 일은 그의 책임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직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보탁현이 도착하면 자세히 듣고 그때 보고한다.”
“알겠습니다. 책상은 당장 새것으로 올리라고 명하겠습니다.”
마천택이 후다닥 나가자 냉면마도는 살기를 풀풀 날리며 중얼거렸다.
“감히 내 얼굴에 똥칠을 한 이놈을 내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야!”
* * *
송화산, 귀령문 총단은 비상이 걸린 상태로 경계가 어마어마했다.
담장과 지붕에는 수십 명의 무인들이 활을 언제라도 당길 수 있는 자세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총단 곳곳에도 이삼십 명 단위로 조를 짜, 적의 침입 시 유기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열을 구축하고 있었다.
“화룡세가 놈들은 지금 어디에 진을 치고 있느냐?”
귀령문주는 상당히 긴장을 한 듯 입술을 혀로 적시며 물었다.
“송화산 초입에 모이고 있습니다. 정보원의 말에 따르면, 이미 모인 자들이 백 명이 넘는데 아직도 모여들고 있다 합니다.”
“이놈들이 이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군. 구천마성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느냐?”
“약조된 방법으로 구원 요청을 하긴 했지만, 제대로 들어갔는지는 저희가 확인할 방법이 없어서 올지 안 올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귀령문주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우리를 돕는다는 약조를 받고 화령세가를 함정에 빠뜨린 것인데, 막상 위험에 다쳤는데 오지 않으면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냐!”
귀령문주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만약 구천마성이 오지 않는다면 오늘 귀령문의 멸문은 거의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서서히, 누군가에겐 급박하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