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1화>
101화. 화룡세가(2)
[아가씨, 화룡세가에서 왜 이렇게까지 귀령문을 압박하는 걸까요?]
화룡세가가 진을 친 곳을 지난 악불군은 귀령문의 총단을 향해 날아가며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 나도 그것을 계속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화룡세가가 딴생각을 하는 것 같아.]
악불군의 등에 업혀 얼굴을 등에 대고 눈을 감고 있던 담수련이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딴생각이요?]
[강서까지 장악한 후 총단을 옮기고 새로운 문파를 만드는 거지. 화룡세가는 오룡세가의 일원으로 중원인들의 지탄을 많이 받고 있었잖아.]
[이름만 바꾼다고 그게 감춰지겠습니까?]
[사람들은 생각보다 잘 잊어. 이름을 바꾸고 총단까지 다른 성으로 옮겨 환골탈퇴한 후 환심을 얻는 정책을 펼치면, 사람들은 그들이 다르다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
[잠룡세가도 그렇게 했다면 됐을까요?]
[아버님께서는 이미 그렇게 하셨어. 그래서 잠룡밀과 잠룡단을 만든 것 아닐까 싶어.]
[가주님께서도 이런 상황이 올 것을 이미 짐작하고 계셨다는 말이군요?]
[아버님께서는 과격하시지만 언제나 다음을 생각하시는 안목은 가지고 계시던 분이야. 분명 준비를 하셨어. 우리에게 유모를 찾아가란 것도 그 선상에 있었을 거야.]
[아가씨, 저기가 귀령문 총단인 모양입니다.]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하고 있네?]
멀리였지만 장원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무인들만 보아도, 이들이 화룡세가의 공격에 대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담수련은 주위 지형을 유심히 살피더니 한 나무를 가리켰다.
[저 나무 꼭대기에서 세 번째 가지로 가서 자리 잡아.]
[세 번째요?]
[화룡세가에서 공격을 시작하면 우선 이 근처 나무들 사이에 자리 잡을 거야. 그런데 저 세 번째 가지는 귀령문으로 몸을 날리기 좀 불편한 자리야.]
[아가씨, 요즘 보면 마치 제갈공명이 다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악불군은 칭찬을 하고는 즉각 몸을 날렸다. 그리고 칭찬을 들은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악불군의 등에 얼굴을 살포시 갖다 댔다.
* * *
각 지역에서 수하들을 이끌고 달려온 화룡세가의 대주들은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늦으시는데, 무슨 일이 계신 것은 아니겠지?”
막여의 말에 방의량이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받았다.
“소가주님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데, 누가 있어 막겠어?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이미 밖은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급히 들어오더니 둘을 불렀다.
“막 대주, 방 대주. 소가주님 오셨네.”
막여와 방의량은 후다닥 일어나더니 밖으로 뛰어 나갔다. 그곳에는 말을 탄 청년이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장한들과 함께 서 있었다. 같이 나타난 장한들은 몸에 얇은 쇠비늘을 장착한 옷을 입고 있었다.
화룡세가에서 자랑하는 정예 무력 집단인 화룡철기단이었다.
“오셨습니까?”
막여가 급히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좀 늦었다.”
청년은 말에서 내리며 말했다.
“아닙니다. 아직 공격할 시간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불빛에 비춘 청년의 얼굴은 담수련의 약혼자인 화우성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담수련과 있을 때 보였던 따뜻한 미소나 부드러움은 사라지고 강렬한 기세가 풀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치열하게 생활해 왔는지를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화우성은 마련된 막사 안으로 들어가더니 상좌에 앉았다.
“귀령문에 대해 알아본 것이 있으면 보고해라.”
“예!”
막여는 송화산의 지도를 펼쳤다.
“지금 저희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 이곳입니다. 그리고 귀령문의 총단은 이곳에 있습니다. 신법을 펼쳐서 달린다면 대략 반 시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곳곳에 상당히 우거진 숲들이 많아 그들이 매복을 했을 경우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고사흥이 이끌던 화룡대가 전멸한 곳은 어디냐?”
“이곳입니다. 그놈들이 이곳에 함정을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귀령단의 경계 태세는 어떻다고 하더냐?”
“밖에 외유 중인 수하들까지 전부 불러 모아 최소한 백오십 명은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사실 우리만으로도 얼마든지 지워 버릴 수 있었는데, 소가주님께서 화룡철기단까지 끌고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추 군사 말이, 구천마성에서 돕기 위해 달려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구천마성이라니요. 그들은 이미 사라진 지 사십 년이 넘었습니다.”
“그놈들이 다시 꿈틀대고 있다는 정황이 여러 곳에서 나타났다.”
막여를 비롯한 대주들의 얼굴에 긴장한 표정이 나타났다. 만약 구천마성이 끼어든다면 만만치 않은 싸움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는 구천마성이 나타날 기미가 없는 것 같으니 당장 공격을 시작한다.”
“예! 준비하겠습니다.”
모두가 나가자 화우성은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종이를 편 그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눈으로 중얼거렸다.
“연 매, 이번 일만 끝나면 내 반드시 당신을 구하러 가겠소.”
그 종이는 금잔화가 뿌린 담수련과 악불군에 대한 현상 수배 전단이었다.
그가 오늘 늦게 도착한 것은 바로 그 수배 전단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는 귀령문을 빨리 멸문시키고 담수련을 찾아 나설 마음에 다급하기만 했다.
* * *
[드디어 시작한 것 같은데?]
나무 위의 가지들을 이용해 간단한 진을 펼쳐 은신을 한 담수련은, 귀령문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을 느끼자 드디어 시작이 되었다고 판단했다.
[예, 밑에서 무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싸움이 시작된 듯합니다.]
[여기서 소리가 들려?]
[저도 의아하긴 한데, 저번에 한 번 쓰러지고 난 이후 귀가 굉장히 밝아졌습니다.]
[무공도 더 세진 것 같고, 귀도 밝아지고……. 한 번 더 쓰러져야 하는 것 아니야?]
[그럴까요?]
[안 돼! 다시는 쓰러지지 마.]
담수련은 악불군이 쓰러졌을 때 자신이 얼마나 애가 탔는지가 생각났는지 즉시 반대했다.
[그럼 안 쓰러지겠습니다.]
악불군이 미소를 지며 답하자 담수련의 얼굴이 발개졌다.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새편작이 결국 말하지 못한, 그녀가 악화되지 않은 이유는 바로 그녀의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얼굴이 발개지고 가슴이 뛰는 현상은 양기가 작동해야만 가능했다. 음기가 너무 가득 차 눌려 있는 양기는 어떤 의술로도 활성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사랑의 힘만은 모든 것을 초월해서, 그 미약한 양기를 끌어올려 그녀의 음기를 중화시키곤 했던 것이다.
[아가씨! 화룡세가에서 외곽을 지키는 귀령문도들을 다 제거한 모양입니다. 지금 빠르게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제가 말하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마십시오.]
[알았어.]
* * *
“소가주님, 귀령문 놈들이 저번과 같이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화룡철기단주 범육수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피해 정도는 어떠냐?”
“경미한 수준입니다.”
“총공격에 들어가기 전, 철기일대와 이대는 후방을 지키라고 해라. 구천마성이 기습을 벌인다면 우리가 불리해질 수 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자.”
화우성을 필두로 백 명이 넘는 화룡철기단이 몸을 날리는 모습은 마치 밤하늘을 철새들이 줄을 지어 나는 것처럼 아름답기까지 했다.
* * *
[뭐 하고 있어?]
악불군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 담수련은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화룡세가 말고 다른 기가 느껴지나 살피고 있습니다.]
[구천마성?]
[예.]
[뭐 느껴지는 거 있어?]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구천마성이 안 올까? 내 예상이 맞는다면 와야 하는데?]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구천마성이 귀령문을 도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난 일 이후로 그녀는 구천마성에서 왜 사신곡에서 독인을 만들고 독물들을 키웠을까를 계속 생각해 왔다. 원래 자신들의 세력인 중원 남쪽만 지킬 생각이었다면 강소성에 그런 장소를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구천마성이 현재는 무주공산인 예전 정파의 세력까지 노리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북부까지 노린다면 당연히 자신들의 본거지가 있는 남쪽에 후환이 있으면 안 된다. 그렇다면 귀령문은 화룡세가를 견제할 아주 중요한 자산이었다.
예전에는 무림 세력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 재미없어서 피하던 자신의 변화에, 담수련은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가씨.]
[응?]
[화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담수련은 화 공자라는 말에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악불군이 화 공자라 부르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바로 화우성이었다.
[어디에 있어?]
[귀령문 총단 정문에서 약 삼십 장 거리에 계십니다.]
시선을 그쪽으로 향한 담수련은 상당히 먼 거리임에도 한 번에 화우성을 알아볼 수 있었다.
수십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귀령문을 향해 서 있는 화우성의 모습은, 잠룡세가에서 보던 약간은 유약해 보이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도 나랑 좋은 추억이 많았던 분인데…….’
담수련은 잠시 화우성과 대화를 나누며 즐거웠던 과거를 잠시 회상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담수련은 화우성에게서 두근거림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제 화 공자님을 봐도 내게 알려 줄 필요 없어.]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자신의 단호한 마음을 정확하게 말했다. 악불군이 화우성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드디어 화룡세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총단 곳곳에서 화살이 날아왔지만 선두에 선 화룡철기단 때문에 무력화되고 말았다. 화룡철기단이 입은 비늘옷이 화살을 전부 튕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귀령문이 오래 못 버틸 것 같은데요?]
[화룡세가의 화룡철기단이야. 최정예 무력 집단이라고 들었는데 저들까지 오다니, 화룡세가에서 작정을 한 모양이네.]
[무공도 강한데 무기를 무력화시키는 갑옷까지 입고 있으니, 이런 집단전에서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할 것…….]
악불군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아주 강력한 마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왜?]
담수련은 악불군의 행동이 약간만 달라져도 금방 알아챘다.
[아가씨 말씀대로 구천마성에서 온 것 같습니다. 대단한 고수들의 기가 여러 명 느껴지고 있습니다.]
[화룡세가는 아니야?]
[화룡세가의 무인들이 풍기는 기와는 다릅니다. 아주 날카로운 것이 살기와 비슷한데 더 강렬합니다. 아무래도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마기인 것 같습니다.]
악불군은 소면음마를 비롯해 그동안 마기를 지닌 고수들을 여럿 상대해 보았다. 하지만 정통 마기는 처음이었다.
[몇 명이나 돼?]
[강한 자들이 네 명, 그리고 약 오십여 명 정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길 수 있겠어?]
악불군이 싸우기 전에 담수련이 꼭 묻는 말.
그런데 그 말이 신기하게 악불군에게 큰 힘을 주고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악불군은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다.
* * *
“문주님, 피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령문의 호법 호면대도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뭐야? 벌써 뚫렸어?”
“화룡철기단과 화우성이 직접 왔습니다.”
“화우성?”
귀령문주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최근 화우성은 남무림에서 이미 후기지수를 넘어 절대 고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명성이 높아져 있었다.
“으아악…….”
“죽여라!”
챙! 챙!
귀령문주는 연이어 들여오는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에 갈등하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도망을 친다면 목숨은 살릴 수 있겠지만, 수십 년을 키워 온 자신의 모든 세력을 잃어버릴 수 있었다.
그때 그의 눈이 커졌다.
절정 고수답게, 밖의 상황에 큰 변수가 생겼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구천마성에서 왔다.”
귀령문주는 힘이 났는지 무기를 손에 들더니 벌떡 몸을 일으켰다.
* * *
“소가주님, 기습입니다.”
귀령문도들을 파죽지세로 제거하며 앞으로 나아가던 화우성은 철기단주의 보고에 걸음을 멈췄다.
“어떤 놈들이냐?”
“소가주님께서 걱정하셨던 구천마성 같습니다. 지금 뒤쪽에서 피해가 상당합니다.
“철기일대와 이대는 아무 연락이 없었지?”
“예, 소가주님의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막 대주!”
화우성은 오른쪽에서 싸우고 있는 막여를 불렀다.
“예!”
“막 대주가 지휘를 맡아라. 구천마성은 내가 맡을 것이니, 귀령문을 오늘 반드시 멸문시킨다.”
“알겠습니다!”
명을 내린 화우성은 철기단주와 함께 밖으로 몸을 날렸다.
천하를 오시하던 화룡세가와 재야에 웅크려 있던 구천마성이 처음으로 맞부딪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