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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02화 (102/472)

<천검지애 102화>

102화. 구천마성의 마인들(1)

“하하하! 화룡세가 놈들, 우리가 없는 동안 잘도 살았지! 이제 본 성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화룡세가는 곧 사라질 것이다.”

붉은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장을 날리며 커다랗게 소리쳤다.

구천마성의 호법인 혈염구혼이었다.

붉게 변한 장에 맞은 철기단원들은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그대로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혈염구혼 외에도, 철기단원들을 한 수에 죽이고 있는 고수가 세 명이나 더 있었다.

군벌 간의 전쟁에서는 군사의 수는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무림인 간의 전쟁은 고수의 수가 더 중요했다.

구천마성에서 끌고 온 수하들은 수가 두 배 이상 많은 화룡철기단원들에게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단 네 명의 고수에 의해, 전체적으로는 오히려 철기단원들이 더욱 큰 피해를 입고 있었다.

휘익!

쾅!

혈염구혼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검을 장으로 받아쳤다.

“제법이구나. 네가 화우성이라는 애송이냐?”

혈염구혼은 검을 들고 서 있는 화우성을 보며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순간 화우성의 얼굴이 실룩거렸다.

‘이자들,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단 말인가?’

“구천마성이냐!”

“어린놈이 혀가 짧구나! 네 아비인 화정무도 날 봤다면 존대해야 하거늘.”

화우성은 혈염구혼의 말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아버지 화정무보다 선배라면 구천마성의 호법들이나 장로급이라는 말이었다.

그들은 전대에서도 백대고수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초절정급의 마두들이었다.

“닥쳐라! 너희 같은 마두놈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함자가 아니다!”

“하하하! 어린놈이 패기는 좀 있구나. 그래, 우리가 마두들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중원인이면서 원나라에 부역한 배신자인 네 아비보다는 훨씬 존경받을 만하지 않느냐?”

화우성의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중원의 배신자라는 말은 그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놈! 마두 따위가 감히 누구를 비교하는 말을 한다는 것이냐!”

화우성은 대노한 목소리로 소리치며 창천화룡검식을 펼쳐 나갔다.

혈염구혼은 백전노장의 노회한 자였다.

그는 단 한 수를 겨뤘지만 화우성이 절대 자신의 밑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고수들간의 싸움에서 흥분은 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경험이 적은 화우성이 그의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가 함정에 빠진 것인가?’

화우성과 혈염구혼과 싸우는 것을 본 화룡철기단주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그가 상대하고 있는 자는 구천마성의 호법인 사망염귀였다. 무공만으로 따지면 혈염구혼보다 더 강하다고 알려진 마두로, 혼자서 상대하기에도 벅찬 상대였다.

그의 본래 임무인 화우성의 보호는 시도도 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아직도 그들만큼 강한 고수가 두 명이나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둘에 의해 지금 철기단의 숫자는 급속도로 줄고 있었다. 계속 이렇게 나간다면 결국 그 둘은 자신과 화우성을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된다면 화룡세가는 전멸이었다.

“이야얍!”

한 번도 이렇게 고전해 본 적이 없었던 화우성은 상당히 당황하고 있었다.

그가 익힌 창천화룡검식은 무림의 삼대검법으로 불릴 정도로 천하가 인정한 절기였다. 심지어 창청화룡검식을 구성 가까이 익힌 이후 삼 초 이상 그의 검을 받아 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혈염구혼은 달랐다. 그의 혈화대마장은 창천화룡검식에 맞먹는 절기였기 때문이었다. 거기다 그의 내공은 화우성을 능가하고 있었다.

* * *

[지금 상황이 어떤지 자세히 말해 줘.]

악불군은 구천마성이 나타나고 살육을 벌이자 급히 도우러 나가려 했다. 하지만 담수련의 만류에 나가지 못했다.

[구천마성이 당도한 후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화룡세가의 전력도 상당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수의 수준에서 차이가 나면서 현격하게 밀리고 있습니다.]

담수련은 잠시 생각하더니,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룡세가에서 오히려 함정에 빠진 것 같아. 화 공자님과 맞먹을 정도의 고수라면 구천마성에서도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일 거야. 심지어 그런 자들을 네 명이나 보냈다면, 귀령문의 위치로 봐서 너무 과해.]

[제가 이제 도와줘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예.]

대답을 한 악불군이 얼굴을 두건으로 감싸자 담수련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얼굴을 가려?]

[화 공자님께서 저를 알고 있지 않습니까? 곤란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 얼굴을 가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니. 화 공자가 계시니까 얼굴을 더 가리면 안 돼.]

[그게 무슨?]

[잠룡세가라는 말은 하지 마. 하지만 소군의 이름은 모두가 알도록 확실히 말해.]

악불군은 담수련의 명령에 의문을 품었다. 지금 그의 행적이 알려진다면 그를 쫓는 자들이 또다시 몰려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의문은 의문이고, 명령은 명령이었다.

[알겠습니다.]

악불군은 두건을 다시 품에 넣고는 구천마성과 화룡세가가 싸우는 전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소군의 명성이 높아진다면 내가 없어도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추적자들로 인해 위험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악불군의 명성을 높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 * *

구천마성의 호법인 백사호리의 하얀 줄에 목이 스친 철기단원은 얼굴이 흑색으로 변하며 즉사했다.

철기단원들은 팔다리만 빼고는 철비늘로 만든 갑옷으로 온몸을 방어하고 있었다. 적의 무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화룡철기단의 가장 큰 무서움이었다.

그런데 백사호리가 휘두르는 줄에 스치기만 해도 철기단원들은 갑자기 휘청이다가는 그대로 죽어 버렸다.

“웬 놈이냐!”

백사호리는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청년이 그의 무기를 한 번에 반 토막을 내자 극노해서는 소리쳤다.

“무기가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뱀이었군요.”

악불군은 자신의 검에 의해 허리가 잘린 채 땅에 떨어진 뱀이 그 상태로 빠르게 다가오며 그의 다리를 물려고 하자, 검 끝으로 뱀의 머리를 그대로 뚫어 버렸다.

“감히 나 백사호리의 자식과도 같은 편백사를 죽였으니, 살아 돌아갈 생각은 마라!”

소리친 백사호리가 악불군을 향해 양 소매를 휙 뿌렸다. 순간 그의 소매 속에서는 열 마리가 넘는 뱀들이 쏟아져 나오더니 독니를 훤히 드러내고는 악불군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눈을 피하지는 못했다.

쉭!

휙!

악불군의 검이 공간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향해 날아오던 뱀들은 수십 조각으로 잘려 땅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크흐흐흐! 어린놈이 제법이다만, 이 어르신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악불군의 자신의 팔을 보았다. 거기에는 가느다란 실뱀이 그의 손목을 물고 있었다.

“아주 비겁한 수를 쓰시는군요.”

“비겁? 생사결에서 비겁을 따지는 놈들을 우리는 천하의 멍청이라고 하지. 그리고 지금 네 손목을 물고 있는 놈은, 크기는 작지만 그 독은 천하에서 손꼽을 만하지. 이제 곧 손이 마비되고 심장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당연히 난 해약을 가지고 있지. 하하하하……?”

고개까지 젖히고 크게 웃던 백사호리의 웃음이 딱 멈췄다. 악불군의 검이 그의 심장을 뚫어 버린 것이었다. 악불군이 당연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는 경솔한 판단이 문제였다.

“이, 이 비겁한 놈…….”

“이런 생사결에서 비겁하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저는 천하제일의 바보라고 합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의 자신의 팔목을 여전히 물고 있는 실뱀을 뜯어 문질러 버리고는, 철기단을 죽이고 있는 또 다른 자에게 달려갔다.

여간한 무기로는 상처도 낼 수 없는 철포삼을 익힌 악불군의 피부를 뱀의 이빨로는 파고들 수 없었다.

하지만 강적을 쉽게 제거했다는 기쁨보다, 실뱀한테 물린 그 자체가 악불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철포삼을 익히지 않았다면 자신이 당할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아직 모자라. 그 정도의 수법에 당하다니……. 더욱 노력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가씨를 못 지킨다.’

이 와중에도 악불군은 담수련의 생각뿐이었다.

“죽어라!”

구천마성의 호법인 분명랑군은 백사호리가 악불군에게 당하는 것을 이미 본 터라, 악불군이 달려오자 철기군을 놔두고 악불군을 맞아 나갔다.

대화도 필요 없었다.

‘연 호법이나 소면음마보다 강하다.’

분명랑군의 무기는 쌍철곤이었다. 그는 철곤을 바람개비처럼 돌려 가며 쉴 틈 없이 공격을 했는데, 악불군의 환영전궁보로도 피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나 오히려 그로 인해 악불군으로서는, 몸 속에 숨어 있던 승부사의 본능을 깨우는 중요한 기회가 되고 있었다.

‘싸움이 이렇게 재미있는 것이었던가?’

담무룡과도 수많은 비무를 했지만, 그것은 배우기 위한 것이었지 생사결은 아니었다. 강호에 나와 많은 생사결을 하긴 했지만, 상대가 약해서 그랬는지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는 진정한 강자를 만나 싸우면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심지어 그의 쌍철곤에 머리를 맞을 뻔하는 위험을 당하고는 겁을 먹기는커녕 더욱 피가 끓고 있었다.

‘뭐가 이런 놈이 다 있어?’

악불군의 모습에 분명랑군은 당황했다. 분명 첫 공격을 그가 했고, 단숨에 주도권을 잡았다 생각했다. 더구나 악불군은 그의 구축연환철곤법에 말려 방어에 급급했다.

그의 경험상, 이런 경우 승리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데 방어에 치중하던 악불군이 점점 공격으로 전환을 시작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자신이 밀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이놈, 나이도 젊은 놈이 어떻게 이토록 금방 싸움에 적응하는 거지?’

악불군은 마치 상대의 초식을 알고 있는 듯 상대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했고, 그의 검은 예리하게 상대의 공격 사이의 허점을 정확하게 파고들며 그를 위협하고 있었다.

분명랑군은 위기를 느끼고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혈염구혼과 사망염귀는 우세한 싸움을 하고는 있었지만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의 도움이 사라진 그의 수하들은 화룡철기군에게 계속 밀리고 있었다.

분명랑군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삼십 초를 넘기면서 자신은 이미 내공의 소모를 느끼고 있는데, 자신보다 내공이 약해 보이는 악불군은 조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점점 공격이 예리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드디어 분명랑군이 몰리기 시작했다. 처음과 달리 이젠 그가 방어에 급급하며 쩔쩔매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분명랑군은 자신의 귀를 울리는 악불군의 목소리가 사신의 목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검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찔러 오는 것을 보면서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어떤 실수나 갑작스런 한 방에 당한 것이 아니라 완벽한 대결 상태에서 조금씩 밀리다가 결국 결정타를 맞게 됐으니, 그로서도 할 말은 없을 터였다.

“……네, 네놈의 정체가 뭐냐?”

“전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화룡세가의 제자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는 이유가 뭐냐?”

“그냥 구천마성이 싫습니다.”

말을 마친 악불군이 심장에 박힌 검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분명랑군까지 제거한 악불군은 화우성과 철기단주를 번갈아 보더니, 더 위험해 보이는 철기단주를 향해 몸을 날렸다.

챙!

이미 몸 여러 곳에 상처를 입고 계속 밀리던 철기단주에게, 사망염귀의 무기를 쳐 내며 등장한 악불군의 존재는 구세주나 마찬가지였다.

“누구신지?”

“전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이자는 제가 맡을 것이니 화 공자님을 도와주십시오.”

“인사는 전투가 끝난 후 다시 하겠습니다.”

악불군의 말에 급히 화우성 쪽을 쳐다본 그는 급히 그쪽으로 몸을 날렸다. 화우성이 상당히 위험한 지경까지 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놈이 백사호리와 분명랑군을 죽였느냐?”

사망염귀는 살기가 넘치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 정도의 무공이면 싸우면서도 주위 상황 정도는 다 감지하고 계실 텐데, 쓸데없이 다 아는 사실을 왜 물으십니까?”

사망염귀의 표정에 노기가 나타났다.

“어린놈이 한 수 좀 있다고 감히 어른 말에 토를 달아?”

“솔직히 전 구천마성의 사람들은 어른으로 취급하기 싫습니다. 존댓말도 원체 입에 붙어서 할 뿐이지요. 그러니 쓸데없는 입씨름은 그만두지요.”

말을 마친 악불군의 검이 그대로 튀어 나갔다. 비의 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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