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4화>
104화. 동병상련
“밀주님께 호법단과 장로단이 인사드립니다.”
담수운은 담무룡이 낸 수수께끼를 푸는 데 보름이상이 걸렸다.
그가 완전히 잊었던 어린 시절, 담무룡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숨바꼭질을 한 적이 있었다. 비밀금고는 그때 그가 숨었던 곳이었다.
담무룡은 태사의 밑에서 교묘하게 숨겨진 비밀금고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가 그곳을 기억해 내지 못했다면 아마 찾지 못했을 것이었다.
비밀금고에는 담수운을 잠룡밀의 밀주로 봉한다는 담무룡의 명령서가 들어 있었다.
이후 그는 잠룡밀의 비밀문서를 접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잠룡밀이 조그만 세력이 아니라는 데 상당히 놀랐다. 가진 재산만 금자 십만 냥에 달했다.
거기다 잠룡밀은 대외적으로 상단을 표방하고 있었다.
완벽한 변신이었다.
예를 취하는 호법과 장로들을 잠시 둘러본 담수운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잠룡세가에 대한 소식이 들어온 것이 있소?”
“저희는 잠룡세가에 대한 정보는 수집하지 말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이유는?”
“잠룡밀에 밀주가 정해졌다는 것은 잠룡세가에 큰일이 벌어졌다는 의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한 탓에, 가주님께서는 절대 잠룡세가를 돕거나 위험하다 하여 달려올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양호철의 말에 담수운의 표정이 굳었다.
‘아버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가문이 무엇이기에 부모 자식 간에 도움도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까?’
“잠룡밀은 이제부터 잠룡세가와는 관계없이 강호활동을 시작할 것이오.”
“밀주님, 가주님께서는 대공의 추격이 있을 것이니 얼마간은 자중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양 호법.”
“예.”
“이제 잠룡밀은 아버님이 아니라 내가 다스립니다.”
“하오나, 지금 저희들의 전력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무림 세력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당연히 위험하겠지요. 이미 잠룡밀은 상단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우리의 힘이 닿는 데까지 군소 상단들을 흡수합니다. 그리고 자금을 비축합니다. 이런 혼란기에는 결국 가장 큰 힘은 자금력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 제 말에 아버님을 끌어들여 토를 다는 일은 금합니다.”
담수운의 강력한 말에 모두는 입을 닫고 말았다.
* * *
“역시 대공 전하시군.”
유복통의 패배 소식을 들은 금잔화는 미묘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가장 강력하던 유복통이 몰락했으니, 다른 반란군을 토벌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금령사자 역시 오랜만의 낭보에 기분이 좋은 듯 말했다.
“황실만 안정이 되어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차칸 테무르 님을 그냥 놔둘지 모르겠어…….”
원 황실은 여러 부족이 힘을 합쳐 세워진 연합 세력이었다. 칭기즈 칸이라는 걸출한 영웅의 탄생으로 그의 직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지만, 이후 수많은 반역으로 황제가 바뀌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이후 황제들은 누군가 전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면 즉시 견제에 들어가거나 반역으로 몰아 제거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대공 전하께서 차칸 테무르 님의 후견인 역할을 하고 계신데, 누가 있어 건드리겠습니까?”
“그래, 대공 전하께서 직접 나섰는데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안 되겠지.”
“그런데 군주님. 악불군과 담수련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그래? 말해 봐. 그동안 절강을 안정시키느라 거기는 신경을 좀 못 썼네.”
“악양에 나타난 악불군에게 천호무적검이라는 명호가 붙었습니다.”
“천호무적검? 호호호! 일개 호위 무사에게 거창한 명호가 붙었네? 정말 출세했어.”
비웃듯 말하는 금잔화였지만,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보며 앞을 가로막던 악불군의 모습이 또렷하게 눈에 선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서 남부 송화산이란 곳에 악불군이 나타났습니다.”
금령사자는 화룡세가로부터 얻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담수련은 없었다고?”
“혼자 나타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둘이 같은 인물이라고 확정을 지은 모양입니다.”
“그동안 중원 무림에 영웅이 없었으니 누군가 영웅을 만들고 싶었겠지. 그런데 너는 둘이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냐?”
“둘 다 젊은 나이에 이기어검을 사용했고, 이름까지 같다면 다른 사람일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입니다. 다만 군주님께서 예상하신 움직임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을 하고 있어서…….”
금잔화는 악불군이 악양에 나타났다는 말을 듣자 종리화나 담수운과 접선을 꾀하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리고 악불군이 움직일 동선을 조사하도록 어찰단에 명령했는데, 예상 동선은 강서와는 너무 거리가 멀었다.
“그래……. 많이 다르긴 하네.”
금잔화는 뭔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대공이 인정한 천재였다. 그녀는 확실치 않으면 아예 예측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측을 할 경우 틀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강서 남부면 잠룡세가와는 전혀 연관이 없어.’
금잔화가 말이 없자 금령사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혹시 담무룡이 자신의 세력을 그쪽에 숨겨 놓았을까요?”
“아니야. 강서 남부는 잠룡세가와 너무 멀어. 담무룡은 의심이 많아서,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곳에 세력을 숨길 자가 아니야.”
“지금 강서까지 어찰단을 보내기에는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고 합니다.”
“어찰단이 안 된다면 다른 곳에 부탁을 하는 수밖에 없지.”
“어디를 보내시려고요?”
“태양천에 연락해.”
금잔화의 금령사자는 눈이 동그래져서는 반문했다.
“태양천이 움직여 줄까요?”
“대공 전하의 특별한 관심 사항이라고 하면 된다.”
“아,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룡세가의 사도비류가 큰 상처를 입은 모양입니다.”
“누구에게? 설마 악불군?”
“예.”
“사도비류가 그 성격에 화병이 나겠군?”
“마룡세가에서 정예 세력이 본격적으로 나선다고 합니다.”
“태룡세가나 철룡세가는 뭐해?”
“태룡세가와 철룡세가도 꽤 많은 피해를 입은 모양입니다. 아마 그들도 본격적으로 악불군을 쫓을 듯싶습니다.”
“흥! 제상보다는 젯밥에 더 관심을 가지고 놀러 가듯이 출동했다가, 이제야 정신들 차린 모양이군. 금령사자.”
“예!”
“태양천에 연락을 하더라도 그들이 움직이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우선 혈랑사자에게 혈랑무 열 명을 이끌고 직접 강서로 내려가라고 해라.”
“당장 시행하라 전하겠습니다.”
* * *
“와! 여긴 참 특이하게 생겼다.”
담수련은 광동의 절경으로 유명한 단하산을 보자 감탄사를 터뜨렸다.
“아가씨, 여기까지만 보고 해남도로 가는 겁니다.”
담수련은 광동까지 와서 단하산을 못 볼 수는 없다며, 보고 가자고 계속 졸랐다.
“소군, 새편작 어르신께서 그러셨어. 내가 죽을 운이면 아무리 급하게 행동해도 죽을 것이고, 살 운이면 천천히 할 거 다해도 산다고. 그러니까 그렇게 조급하게 굴지 마.”
‘휴우! 이 대상이 아가씨만 아니면 제가 이러지 않습니다.’
악불군은 나오려고 하는 말을 억지로 삼켰다. 한창 기분 좋은데 상하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었다.
광동은 중원에서도 아주 특이한 지역이었다.
너무 남쪽에 치우쳐 있어 황실의 영향력이 가장 약해서 호족 군벌들의 입김이 아주 강했다.
색목국을 필두로 남만, 파샤 등 외국과 무역을 하는 항구가 발달해 이권이 크다 보니 마도와 사파는 물론 흑도까지 세력이 너무 강해, 정파는 물론 흔한 정파를 표방하는 무관조차 몇 개 없었다.
심지어 북쪽과는 말까지 달라 광동어를 모르면 대화조차 할 수 없었다.
“이놈이냐?”
그때 투박한 목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무인들이 주위에 나타났다.
“예, 두목. 저놈입니다.”
수하가 악불군을 가리켰지만 두목의 눈은 담수련에게 꽂혀 있었다. 그는 혀로 입술을 한 번 훔치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네놈이 감히 내 수하들을 건드린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저 계집을 두고 도망친다면 내가 눈감아 주지.”
하지만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들이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쳐다보지도 않았다. 마치 그들이 온 것 자체를 모르는 듯했다.
“이, 이놈들이 감히…… 억!”
반응이 없자 대둔도를 꺼내 들며 소리치던 두목은 발에서 갑작스런 고통을 느끼자 비명을 지르며 발밑을 보았다.
“아아악!”
두목은 자신의 발등을 뚫고 올라온 검을 보자 눈이 동그래졌다. 하지만 곧 검이 회전을 하자 엄청난 고통을 참지 못하고 이번에는 길게 비명을 질렀다.
두목이 피를 철철 흘리며 땅바닥에 주저앉자 수하들은 당황한 듯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으악!”
뒤로 물러서던 수하 중 한 명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후다닥 뒤를 쳐다본 수하들은, 그곳에 아무도 없자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이어 또 다른 수하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자 모두는 후다닥 산 밑으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저자들 데리고 가.”
그때 땅에서 한 인영이 스르륵 나타나더니, 도망치는 수하들을 막고는 말했다.
“봐, 내가 저자들의 조건을 받아들이기 잘했잖아? 세상에는 독불장군은 없어. 그리고 전부 소군이 나서는 것도 피곤하고.”
수하들이 부상당한 자들을 부축하고는 모두 사라지자, 그들의 뒤에 한 중년인이 나타났다.
“깨끗하게 처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백인막의 사 호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악불군의 대답을 들은 그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사 오와 구 호는 광동성을 넘는 경계에서 악불군에게 걸리고 말았다. 귀령문의 혈투 이후 열흘이나 지난 후였다.
둘은 열흘 동안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막주에게는 가지고 다니던 전서구를 날려 자신들의 생각을 알렸다.
그러니 걸렸다기보다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 악불군은 단호했다. 따라오면 죽인다고 했으니 이제 죽어야겠다고 검까지 뽑았다. 만약 담수련이 말리지 않았다면 정말 죽었을지도 몰랐다.
악불군은 사 호에게 백인막이 처한 상황을 들은 후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담수련을 호위하는 문제만도 복잡한데, 그런 일에 연루되어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담수련이 구세주가 되었다.
그들의 말을 들은 담수련의 뇌는 맹렬하게 상황 판단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는 뜻밖에도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했다.
악불군은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지만 생각 외로 쉽게 승낙을 했다. 사 호와 오 호는 그때, 담수련이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실세일 수도 있겠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악불군보다 담수련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의 요청을 승낙하는 대신 한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일이 완전히 무마될 때까지 자신들의 호위 청부를 맡아 달라고 한 것이었다.
살수 조직에는 두 가지 청부가 있었다. 하나는 살인 청부였고, 또 하나는 호위 청부였다. 둘은 완전히 다르면서도 일맥상통한 면이 있었지만, 백인막은 호위 청부는 맡은 적이 없었다.
사 호는 시간을 좀 달라고 한 후 며칠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 전 호위 청부를 받아들이겠다며 나타났다.
“표정이 왜 그래?”
담수련은 악불군의 표정이 무겁자 슬쩍 물었다.
“가주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족속들 중 하나가 살수 조직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이 배신을 할 경우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도 알아. 그런데 소군.”
“예.”
“우리가 저자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저들은 다시 우리를 노렸을 거야. 그리고 내 판단이 맞다면 저들은 지금 대단한 위기를 느끼고 있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사람이 절실하단 거야.”
“저도 그것은 느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천하제일의 살수 조직인 백인막을 무슨 힘으로 보호해 주겠습니까? 거기다 저들은 정파와는 원수지간 아닙니까?”
“백인막 정도의 조직이라면 어느 정도 형세 판단이 나왔을 거야. 지금 원나라가 밀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곧 그동안 숨었던 중원 무림 세력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거고, 곧 그들의 천하가 될 거야.”
“그러니까 말입니다.”
“소군은 한 가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뭐 말입니까?”
“우리도 중원 무림인들에게는 원수라는 거.”
말하는 담수련의 표정은 처연했고, 듣는 악불군의 표정은 굳어졌다.
중원 무림의 최대의 원수는 오룡세가였다. 그리고 담수련은 그 오룡세가의 일원인 잠룡세가의 천금이었고, 그는 그녀의 호위 무사였다. 잘못하면 천하 전체가 그들을 쫓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백인막 역시 같은 처지라면 그 자체로 협력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이른바 동변상련(同病相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