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05화 (105/472)

<천검지애 105화>

105화. 백인막

천하의 혼란은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다.

치안이 무너지면서 약한 사람은 강한 사람에게 약탈을 당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살인이나 강도는 비일비재할 정도로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국이었다.

그런 탓일까? 술이나 동전 한 푼만 주면 자신이 아는 재미난 얘기를 풀어내는 호사가들은 요근래 얘기할 것이 없어 영웅의 이야기에 목말라했다.

그런 그들에게 악불군이라는 새로운 신성은 아주 좋은 안주가 되었다.

악불군의 이야기는, 어찰단과 마도의 고수들을 죽이고 경천지색의 미녀를 보호하고 있다는 신비까지 겹쳐, 모든 사람에게 궁금증을 안겨 줄 좋은 소재였다.

뿐만 아니라 호사가들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얘기에 자신들의 짐작과 예측까지 덧붙어 점점 엄청난 영웅처럼 회자되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은 담수련을 모시고 해남도를 향해 계속 남진하고 있었다.

“저희 좀 살려 주십시오!”

관도라고는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통행하는 사람이 없었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다며 걸음을 옮기던 그 순간이었다.

관도 옆 숲에서 온몸에 피를 묻힌 한 청년이 사색이 되어 달려오더니, 악불군의 말 앞에 엎어지며 처절하게 애원했다.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계속 걸음이 느려지고 있어 애가 타는 판에 또 일이 생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담수련이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마적단들이 마을을 덮쳤습니다. 지금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무사님들이 좀 구해 주십시오. 저희 어머니께서도…… 으흐흐흐흑!”

청년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악불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자식 앞에서 부모를 죽이거나 부모 앞에서 자식을 죽이는 자들을 대단히 증오했다. 그것은 사람을 몇 번을 죽이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담수련도 노한 듯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이분과 함께 가자.”

악불군은 청년을 잡아 끌어 자신의 뒤에 태웠다.

“어디요.”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순식간에 악불군과 담수련이 먼지만 남기고 사라지자, 두 명의 중년인이 스르륵 나타났다.

“구 호, 저분들 목적지가 있긴 있는 것 같아?”

“글쎄. 목적지가 있다 해도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지금까지 오면서 눈에 거슬리는 것은 다 끼어드니 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자신들에게 전혀 이익이 없는 일에 오로지 측은지심(惻隱之心)만으로 저렇게 움직이는 무림인을 본 적 있냐?”

사 호의 말에 구 호 역시 뭔가 느낀 것이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정파는 대부분 위선자라고 생각했는데, 저 두 분은 아닌 것 같아. 그런데 둘이 주종관계인 것은 맞는 것 같냐? 내가 보기에는 연인 같은데? 네가 보기엔 어때? 주변에 여인들 많았잖아?”

사 호는 살수행이 없을 경우 대부분의 시간을 기루에서 보내며 여인들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악 대협의 극진함은 단지 주종관계로는 설명이 안 되긴 해. 그리고 저 소저 역시 대하는 것이 절대 아랫사람에게 하는 것 같지 않고. 하여간에 특이한 사람들이야.”

“놓치겠다. 뛰자.”

“그래.”

사 호와 구 호는 말이 만들어 낸 흙먼지를 따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 *

청년과 도착한 마을은 삼십 호 정도가 사는 아주 작고 가난한 동네였다. 정겨웠을 그 공간은, 곳곳이 불타고 시체가 널려 있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짓을?”

담수련은 피를 흘리고 죽어 있는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의 시체를 보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곧 눈에서는 닭똥같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가씨께서 눈물을 흘리신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모습에 가슴이 아픈지 입술을 꽉 물었다.

“어머니! 어머니! 우아아악! 이놈들 다 나와!”

악불군과 같이 온 청년은 노모를 안은 채 절규했다.

“소군, 난 이자들 용서할 수가 없어.”

악불군에게 고개를 돌린 담수련은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분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광동은 마적이 많기로 유명한 곳입니다. 우선 해남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제가 없애겠습니다.”

악불군도 마적들의 행위에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담수련의 몸이 먼저였다.

그 이야기에 담수련은 평소 악불군을 대할 때 부드럽고 친절한 표정이 아닌, 그녀 스스로도 모른 채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찌나 차갑게 느껴지는지 악불군은 말을 하면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새편작의 말대로 그녀가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정도였다.

“소군, 저분을 봐. 어머니를 잃으시고, 슬픔과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괴로움에 절규하고 있어. 소군이 나를 아끼는 마음과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자식이 부모를 아끼는 마음, 어느 것이 더 절실할까?”

“아가씨, 그건…….”

“알아. 모든 마적들을 다 처치할 수는 없어. 하지만 이번만은 용서할 수 없어. 그리고 이 넓은 광동에서 하필이면 우리와 저 청년이 만났을까?”

“……그럼 이번만입니다. 이들을 징치하고 나면 곧장 해남도로 가셔야 합니다.”

“알았어. 약속할게.”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오는 동안 약속을 이미 여러 차례 했지만, 어려운 사람만 보면 그냥 가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벌써 시비가 열 차례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아가씨의 약속은 이제 좀 믿기지 않습니다.”

“피! 정말 그럴 거야? 다른 사람들에게는 난 약속하면 꼭 지켜.”

“저도 압니다. 그런데 저하고의 약속은 잘 안 지키시잖아요?”

“그거야 소군만은 내가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담수련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말에, 순간 악불군은 평생 약속을 어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만큼 기분이 좋았다.

“알겠습니다.”

악불군의 대답을 들은 담수련은 울고 있는 청년을 보며 물었다.

“복수를 하고 싶으세요?”

“그 악마 같은 놈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겠습니까?”

“가요. 복수가 얼마나 한을 씻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평생 가지고 살 억울함은 풀어 줄 거예요. 소군, 태워.”

“예!”

“그자들 찾을 수 있겠지?”

“마적들은 말을 타고 다닙니다. 백설이가 다른 것은 몰라도 말은 정확하게 찾아냅니다. 백설아 찾아.”

푸루룩!

악불군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백설이 푸룩거리더니 앞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거, 호위가 살행보다 훨씬 어려운 것 같지 않냐?”

간신히 쫓아왔는데 도착하자마자 악불군과 담수련이 또 다른 곳으로 달려가자, 사 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난 호위는 놀고먹는 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힘드네.”

둘을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전속력으로 둘의 뒤를 쫓아갔다.

* * *

“오 호!”

“예!”

“사 호에게서 전서가 도착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자를 찾았다고 하는구나. 한데 그자가 우리가 청부를 받아 죽이러 간 자라는구나. 네 생각은 어떠냐?”

백인막주의 말에 오 호는 즉답을 하지 못했다. 질문은 부드럽게 하지만 답이 마음에 안 들면 추상처럼 변하는 막주의 성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왜 말을 안 해?”

백인막주는 대답이 늦자 살짝 짜증스러운 말투로 변했다.

“그자의 무공이 대단히 높은 것은 사실입니다.”

“무공이 높은 자를 우리의 후견인으로 삼을 생각이었다면 십대고수를 찾아갔을 것이다. 내가 바란 것은 사람 하나가 아니라 세력이었다. 악불군 이자가 아무리 무공이 높다 해도 천하를 혼자 상대할 수는 없는 법. 이자를 받쳐 주는 세력이 있더냐?”

“여인으로 구성된 삼십 명 정도의 수하는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여인? 하하하하!”

백인막주가 갑자기 파안대소를 터뜨리자 모두의 표정이 굳어졌다. 지금 상황에서 웃는 것은 절대 좋아서 웃는 것이 아님을 모두는 알기 때문이었다.

웃음을 멈춘 백인막주는 오 호를 노기 어린 눈으로 보며 물었다.

“그래, 그 여인들로 이루어진 수하들의 무공은 어느 정도더냐?”

“……저희 서너 명으로도 다 죽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게 세력이냐?”

“아닙니다.”

“사 호는 그렇다 치고, 구 호는 상당히 신중한 놈이 어찌 똑같이 동조를 하고 있다는 말이냐! 당장 이놈들에게 귀환하라고 해라.”

그때 잠자코 있던 부막주가 끼어들었다. 그는 백인막의 모든 살행을 계획하고 배분하는 핵심 두뇌로, 군사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백인막에서 막주의 마음을 바꾸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막주님, 제 생각에는 잠시 두고 보는 것이 어떨까 생각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너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저희 백인막의 전력은 제법 큰 문파라 해도 하루면 없애 버릴 정도입니다.”

“그래, 본 막주가 힘이 없어 후견 세력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 호와 구 호가 그것을 모를까요?”

“당연히 알겠지.”

“그런데 왜 악불군을 후견인으로 하자고 제안을 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원나라가 하남성까지 밀렸습니다. 호북까지 반란군이 점령한 것이지요. 이대로 간다면 무림인들이 중원을 수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이미 다 아는 얘기를 왜 또 하는 거냐? 짜증나게.”

“정파가 다시 예전 세력을 찾는다면 분명 본 막을 공적으로 몰아 처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심지어 마도와 사파조차도 원나라에 부역한 무림 세력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세력이 우리의 후견 세력이 되어 주겠습니까?”

부막주의 말에 백인막주는 검미를 찌푸렸다.

맞는 말이었다. 지금 백인막을 돕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무림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도박이었다.

“원나라가 물러난다고 해도 혼란이 금방 정리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사파건 정파건 죽이고 싶은 자들이 많아진다. 본 막을 필요로 하는 세력이 분명 있을 것이다.”

“정파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마도와 사파는 우리를 이용만 하다가 배신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사 호와 구 호는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사 호와 구 호의 판단을 믿어 보자는 것이냐?”

“어찰단에서 저희에게 살인 청부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철룡세가와 마룡세가 그리고 태룡세가까지 그들을 잡으러 나왔습니다. 그에 더해, 십삼 호의 정보가 맞다면 금자 만 냥을 준다는 수배 전단까지 뿌렸다고 합니다. 전 그자가 그럼에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턱수염을 쓰다듬던 백인막주는 오 호를 보며 물었다.

“우리가 그 악불군이라는 자를 제거하려면 어느 정도의 전력을 움직여야 할 것 같더냐?”

“본 막의 특급 살수 이십 명과 일급 살수 백 명은 투입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오 호의 말에 백인막주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정도면 백대고수 중 상위에 있는 자들도 제거할 수 있는 전력이었기 때문이었다.

“살행을 시도도 못했다면서 너무 대단하게 평가하는 것 아니냐?”

“사 호와 구 호 그리고 저희까지 모두 네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이끄는 일급 살수 사십 명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음에도 손을 쓸 수 없었습니다. 과하게 평가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과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예, 그리고 제 눈으로 직접 이기어검을 시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위력과 빠르기는 저희 네 명의 합공을 무력화시키는 데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사 호가 막주님께 이번 청부 건을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한 것은, 피해가 너무 막심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라고 사료됩니다.”

오 호의 말에 백인막주는 태사의에 등을 대더니 생각에 빠졌다. 일다경이나 지났을까? 드디어 결정을 내린 듯 힘없이 말했다.

“천하제일의 살수 집단인 백인막이 애송이한테 목숨을 맡긴다? 내가 백인막의 막주가 된 지 어언 일 갑자가 다 되어 가는데, 이렇게 자신 없는 결정은 처음이다. 하지만……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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