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7화>
107화. 협행(2)
‘그들 네 명의 합공을 막아 내려면…….’
악불군은 생사투를 벌이고 온 날에는 언제나 그 당시 상대가 공격한 수법을 복기하며 자신이 사용한 수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는지를 연구했다.
옆에서 본 사람들은 악불군이 이겼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만, 악불군은 자신이 위험했던 순간들도 꽤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간은 담수련이 말한 협공에 대한 대응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해법이 의외로 만만치가 않았다.
백사호리와 사망염귀 등 네 명이 자신을 공격하는 여러 가지 상황을 상정해,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수법을 모두 동원해 가며 수련했다. 하나 항상 한둘의 공격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방법밖에 없는 것인가……?’
고심하던 악불군은, 결국 사용하고 싶지 않던 방법을 끄집어내기로 했다.
바로 배교비전의 수법이었다.
배교비전에는 기괴망측한 수법이 수십 가지 이상 적혀 있었다.
가장 많은 수법이 사술이었는데, 거의 기문둔갑에 가까운 수법인지라 용도에 맞게 물건을 만들어야 했고, 이미 준비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악불군의 성정에 전혀 맞지 않는 수법들이었다.
하지만 그중 몇 가지는 그의 흥미를 상당히 돋웠는데 암기술과 보법이었다.
특히 보법은 사실상 은잠술과 잠입술에 가까워, 그동안 그가 배운 것과는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무공이었다.
악불군이 수련하는 모습을 멀리서나마 계속 보고 있던 구 호가 갑자기 사 호를 보며 말했다.
[사 호, 저것 좀 봐 봐.]
한잠 자려고 누웠던 사 호는 귀찮은 표정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구 호가 가리킨 방향을 보더니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계속 같은 수련만 하는데 뭘 보라는 거야?]
사실 악불군의 수련은 보는 사람조차 지루할 정도로 특이한 점이 없었다. 계속 알 수 없는 자세만 바꾸는 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검조차 휘두르지를 않았다.
[방금 갑자기 사람 수가 다섯 명으로 보였어.]
[다섯?]
사 호는 악불군을 자세히 보더니 구 호를 보며 말했다.
[피곤하냐? 그럼 네가 먼저 자라.]
[그게 아니라니까! 또 나타났다. 봐 봐!]
구 호가 급히 말하자, 사 호는 다시 악불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너답지 않게 왜 이래? 나 성질 더러운 거 알지?]
사 호가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다시 자리에 눕자, 구 호의 인상이 구겨졌다. 그의 눈에 악불군의 신형이 또다시 다섯 개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거 절대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야……. 만약 저것도 무공이라면?’
잠시 생각하던 구 호의 눈이 커졌다.
지금의 악불군의 무공도 자신의 무공으로는 십 초를 견디기 어려울 것 같은데, 만약 신형이 다섯 개로 변해 공격한다면…….
과연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 그런 상황에서 일 초나 견딜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경악을 한 것이다.
* * *
“소군, 아까부터 무슨 생각해?”
작은 현의 객잔에 딸린 주루에 들른 담수련은 앞에 앉은 악불군의 얼굴을 슬쩍 살피며 물었다.
말을 타고 오는 동안에도 악불군은 계속 말이 없었다.
“아무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왜 계속 말이 없어?”
“제가 그랬나요?”
“한 식경은 말 안 했어!”
담수련이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하자 악불군은 죄송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랬습니까? 제가 아가씨 말에는 다 대답을 한 걸로 아는데……?”
“그러니까! 대답만 하고 말을 안 했다니까?”
“예? 그게 차이점이 있나요?”
담수련이 느끼는 대답하고 말하고의 차이점을 악불군은 몰랐다.
“몰라!”
담수련이 삐친 듯 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돌리자, 악불군은 그런 그녀가 마냥 귀엽기만 한지 미소를 지며 말했다.
“알았습니다. 다음부터는 대답만 하지 않고 꼭 말을 하겠습니다.”
“대답하는 것하고 말하는 것하고 뭐가 다른데?”
“…….”
푹 치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질문에 악불군은 잠시 답을 못했다.
“봐, 차이점도 모르면서!”
담수련이 다시 삐친 표정을 짓자 악불군이 급히 답했다.
“압니다. 글자 수가 다릅니다.”
“호호호호~”
악불군의 대답에 담수련이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자, 이미 들어올 때부터 그녀와 악불군을 힐끔거리던 손님들은 그녀의 청아한 웃음소리에 넋이 빠진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담수련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챈 듯 급히 입을 막고는 악불군을 슬쩍 쳐다보았다.
“아가씨께서 웃으시니까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대답이 아니고 말입니다.”
담수련이 당황한 눈으로 쳐다보자 악불군은 환한 미소를 지며 답했다.
‘이거 큰일났네……. 요즘 증상이 더 심해지는 것 같아.’
근래 악불군을 보며 가슴이 두근거리는 현상이 부쩍 심하자, 담수련은 얼굴이 발개져서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며 좀 더 그녀에게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악불군이었다.
배교비전의 무공을 익히며 홀로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아, 그녀에게 소홀하지 않았나 반성한 것이다.
더구나 배교의 무공은 마도조차 천시하는 역천의 무공이었다. 운기조식도 정종심법과는 완전히 반대라고 할 정도로 딴판이었고, 그 수법 역시 대단히 비겁하고 잔혹했다.
악불군이 평소보다 수련하는 시간을 더 쓰게 된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런데 보법과 암기술을 수련하면서 악불군은 약간의 혼란에 빠졌다.
분명 그가 아는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방문좌도의 무공인데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마도의 무공에 가까운 잠룡세가의 무공이 아니라 소림내경일지선의 정종 무공 원리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발견된 것이다.
특히 신형을 늘리는 분신술은 자신이 아는 무공과 접목할 경우 대단한 위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계속 그 접목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 중이었다.
두근거림을 간신히 진정시킨 담수련은 슬쩍 화제를 바꿨다.
“소군.”
“예.”
“지금 이 주루에 내가 몇 번 본 사람들이 네 명이나 있어. 아무래도 또 미행을 하는 자들이 붙은 것 같아.”
“알고 있습니다. 제가 확인한 자들만도 이십 명이 넘습니다.”
“어떻게 할 거야? 마 대협께서는 명령만 내리면 몇 명은 죽여 줄 수 있다고 하던데?”
사 호의 본명은 마진우였고 구 호는 구여풍이었다. 며칠 전부터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들을 본명으로 부르고 있었다.
“아가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난 저들이 소군의 명성을 높이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위험만 없다면 그냥 두고 봤으면 싶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잠시 생각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의 명이라 따르고는 있습니다만,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제 명성에 왜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전에 말했지만, 명성이 높아지고 함부로 덤비면 큰일난다는 인식이 퍼져야 우리를 귀찮게 하는 자들이 더 줄어든다고.”
“오는 족족 혼을 내서 보내면 굳이 제 이름을 알리지 않아도 피하지 않을까요?”
“모든 일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 법이야. 난 그중에서 소군의 명성을 높이는 게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한 거고.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식사는 그만하시려고요? 조금만 더 드시지요?”
담수련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악불군이 급히 말했다.
“배 찼어.”
“그래도 조금 더 드시는 것이…….”
“소군은 왜 자꾸 내게 많이 먹이려고 해? 뚱뚱한 여자가 좋아?”
뚱뚱한 여자가 좋냐는 질문에 악불군은 당황한 표정으로 급히 답했다.
“전 단지 아가씨 건강을 위해 드리는 말입니다. 다른 뜻은 전혀 없습니다.”
“소군이 뚱뚱한 여자를 좋아한다면 더 먹을게.”
또다시 여자라는 말이 나오자 악불군은 더 이상 답을 못했다. 담수련을 여자로 생각한다는 자체가 그에게는 금기였기 때문이었다.
* * *
“혈염구혼.”
목소리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혈염구혼 같은 초절정의 고수를 떨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 지금 단지 이름만 불렸음에도 혈염구혼은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 있는 자가 바로 무림 마도의 절대자인 구천마성의 성주 구천마황이기 때문이었다.
“용서하십시오.”
혈염구혼은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그놈이 이기어검을 사용했다고?”
“예, 제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명의 호법과 장로를 죽이고 혼자 도망쳐 온 것이냐?”
“성주님. 이번 일은 혈염 호법께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제가 죄를 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때 계속 말없이 있던 만통광심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는 구천마황이 가장 신임하는 구천마성의 군사였다. 구천마성이 지하로 숨어 세력을 키우며 다음을 도모하는 계획도 그가 짠 것이었다.
“네가?”
“예, 화룡세가에서 귀령문을 없애는 일에 화룡철기단 같은 최고의 정예를 백 명이나 보낼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덕에 화룡세가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깨달았습니다.”
“자세히 말해 봐라.”
“화룡세가에서 강서성에 매우 공을 들이고 있다는 의미지요. 그들은 지금 오룡세가에서 빠질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원나라가 밀리니까 태세 전환을 해서 살아남겠다는 발버둥이라고 봅니다.”
“이미 오룡세가는 중원의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
“사람들은 호남의 화룡세가를 배신자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름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요. 문파 이름을 바꿔 강서에 새로이 개파하는 방식을 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다시피 강서는 우리가 북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교두보다.”
“이제 화룡세가의 계획을 알았으니 거기에 맞춰 저희도 계획을 바꾸면 그만입니다.”
“그럼 악불군이라는 놈을 그냥 두자는 말이냐?”
“그자는 지금 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협객 놀이에 푹 빠져 있습니다. 귀령문에서 부딪친 것도 우연으로 보입니다.”
“우연이건 아니건 감히 본 성을 건드린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은 져야겠지.”
“혈염호법과 당시 그자의 싸우는 광경을 본 수하들의 보고를 바탕으로 그자의 무공 수위를 분석해 본 결과, 장로님 세 분이 합공을 하면 제거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저는 혈염 호법께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드리고 싶습니다. 두 분의 장로님과 함께 보내시면 그자의 목을 잘라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만통광심의 말에 구천마황은 혈염구혼을 보며 물었다.
“만통광심이 네게 기회를 한 번 더 주라고 하는데, 성공할 수 있겠느냐?”
“장로 둘을 붙여 주신다면 반드시 제거하겠습니다.”
“좋다, 허락한다.”
혈염구혼이 구사일생했다는 듯 몸을 일으키자 만통광심이 부언을 했다.
“혈염 호법님, 절대 자존심을 내세우시면 안 됩니다. 반드시 합공을 하셔야 합니다.”
구천마성은 자신들에게 적대시한 자를 절대 용서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원칙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실수가 될지는 아직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 * *
“해남도가 정말 멀다.”
이틀을 또 남쪽으로 내려온 담수련은 산 중턱에 서더니 계속 이어지는 산들의 연속을 보며 중얼거렸다.
“힘드십니까?”
“힘들긴? 난 멀어서 좋기만 한데.”
“예?”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어찰단도 없고 오룡세가도 더 이상 만날 일 없고, 무엇보다 소군과 매일 같이 있고.”
담수련은 사실 소군만 옆에 있다면 어디를 가든 편했다. 그래서 아침에 깨자마자 그녀가 하는 첫 마디는 언제나 소군이었다.
그의 대답을 들어야만 모든 것이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을 듣는 악불군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그녀의 생명에 위험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에 해남도로 방향을 틀기는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의 임무는 그녀를 종리화에게 무사히 데려다 주는 것이었다.
그 말은 결국 그녀를 노리는 자들이 우글거리는 북쪽으로 다시 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바로 담무룡이 신신당부한, 천하의 영웅을 찾아 담수련과 혼인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담무룡에게 입은 은혜가 하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그의 명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그 사명이 그를 너무나 답답하게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 답답함의 이유를 몰랐다.
“진짜 경치 좋다.”
담수련의 말대로 겹겹이 쌓인 산의 풍경은 마치 그림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악불군은 담수련의 목소리에서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시나요?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있으십니까?”
그녀의 눈에는 맑은 눈물이 한 방울씩 흘러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