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8화>
108화. 남해로 가는 길(1)
악불군이 깜짝 놀라자 그녀는 급히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 괜찮아.”
“갑자기 눈물을 흘리시면서 괜찮으시다니요? 말씀해 보세요.”
‘나 경치 같은 거 하나도 안 보여. 소군만 보여. 그리고 소군만 생각하면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고 해.’
그러나 담수련은 자신의 생각을 입으로 말하지는 못했다.
그 말이 소군을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괜찮다니까.”
“그래도…….”
“소군은 내 걱정만 하지 말고 자신에 대해서도 한 번 걱정을 해 봐.”
“제가 걱정할 일이 뭐가 있나요? 저는 아가씨만 편하고 행복하면 그걸로 만족입니다.”
“……바보.”
담수련은 악불군의 품 안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을 억지로 참으며 중얼거렸다.
둘을 가로막고 있는 신분의 벽.
가엾은 두 남녀는 언제쯤 그 벽을 허물 수 있을까……
* * *
금잔화의 명을 받고 잠시도 쉬지 않고 강서 남부에 도착한 혈랑사자는 둘의 행적을 듣고 다시 광동으로 내달렸다.
하지만 광동은 넓었고 그들을 위한 정보망은 축소되어, 악불군을 찾는 것이 간단치가 않았다.
다행인 것은 혈랑무가 추적술에 관해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악불군과 담수련이 있었다는 곳에 간신히 도착하면 이미 다른 곳으로 사라지기가 일수였다.
“이놈들 도대체 어디를 가는데 이렇게 정신없이 쏘다니는 거야?”
그가 금잔화에게 받은 명은 악불군과 담수련이 어디를 가는지, 또 누구를 만나는지를 확실하게 알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악불군의 동선은 특정한 목적지가 있는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저희도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악불군이 제거한 마적단만 벌써 네 곳이고, 사파들도 세 곳이나 그들에게 멸문을 당했습니다. 이건 예전 정파들이 협행을 한다며 아무 곳이나 돌아다니던 행태와 너무 비슷합니다.”
혈랑무의 대주인 찬두려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혈랑사자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담무룡은 그렇게 아낀다는 담수련을 잠룡세가에서 몰래 빼돌렸다.
한데 그녀가 아무와도 접선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강호를 배회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비단 그의 생각뿐 아니라, 대공의 지낭이라 할 수 금잔화의 판단도 그러했다.
“혈랑사자님, 혹시 우리를 혼란하게 만들기 위한 이들의 수작이 아닐까요?”
“혼란? 무슨 의미냐?”
“지금 담수련이 나온 후, 담수운에 대한 추적이 거의 멈췄습니다. 당연히 담수운을 만날 것이니 담수련만 잡으면 그를 저절로 찾아낼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찬두려의 말에 혈랑사자의 검미가 좁아졌다.
찬두려는 금잔화를 따르는 혈랑무의 대주 중 유난히 판단력이 좋은 자였다.
그렇게 때문에 금잔화는 담수운과 종리화를 추적하던 찬두려를 혈랑사자에게 붙여 상황 판단을 돕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말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혈랑사자였다. 하나,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만, 금령군주님께서 그 정도를 짐작 못하실 분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판단이나 분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연놈을 찾는 것이 급선무다.”
“사자님, 드디어 찾았다고 합니다.”
그때 혈랑무 한 명이 급히 뛰어 들어오며 보고했다.
“쥐새끼 같은 놈! 드디어 잡았군.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오상촌 객잔에 머물고 있다고 합니다.”
“가자!”
“그런데…….”
“뭐냐?”
“뜻하지 않은 세력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뜻하지 않은 세력?”
“혈랑무 대원의 보고에 따르면 구천마성의 인물 같다고 합니다.”
“구천마성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이냐?”
“구천마성의 호법들을 악불군이 죽였다고 하더니, 사실이었던 모양입니다.”
“간신히 잡았더니 또 방해자가 나타났군. 구천마성은 만만한 상대가 아닌데…….”
잠시 생각하던 혈랑사자는 조금 신중해야겠다고 판단했는지 다시 말했다.
“객잔에 들었다면 오늘은 거기서 묵겠군?”
“그럴 것 같습니다.”
“혈영무 두 명을 객잔의 손님으로 들어가게 해라. 단 어떤 행동도 하지 말고 상황만 살피라고 해.”
“알겠습니다.”
* * *
“소군도 이제 가서 쉬어.”
객잔의 방에 들어가려던 담수련은, 악불군이 계속 밖에 서 있는 것이 미안한지 빨리 들어가라는 듯 손짓을 했다.
악불군의 방은 담수련의 방 바로 옆이기에 사실 꼭 문 앞에서 경계를 하지 않아도 큰 문제는 없었다.
“아가씨께서 잠이 드시는 것을 봐야 제 마음이 편합니다.”
담수련은 악불군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
“난 왜 소군에게 짐만 되는 걸까?”
“그게 무슨 황망한 말씀이십니까? 아가씨께서는 제게 짐이 아니라 힘이십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악불군이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는 이미 넘칠 만큼 받은 터라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잠룡세가 안에서는 악불군이 밤새 자신을 지켜 준다는 것이 정말 든든하고 좋았다.
하지만 강호에 나와 노숙도 하고 하다 보니, 악불군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절감할 수 있었다.
“소군은 언제나 내 옆에 있을 거지?”
“아가씨께서 가라고 하셔도 그 명령만은 들을 생각이 없습니다. 전 아가씨 옆에 영원히 있을 것입니다.”
“고마워. 진짜 소군이 없었다면 난 어떻게 살았을까 불안할 정도야.”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자, 빨리 들어가셔서 주무십시오.”
이미 며칠째 계속 말을 타고 남하하고 있었다. 그런데 둘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체력상 한두 시진도 계속 말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
더욱이 오음절맥이 더욱 심화되어 뇌까지 활성화 된 지금, 그녀의 체력은 더 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지금 며칠째 말을 타고 남하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잘 버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체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그들은 왜 그런 비상식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는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도 악불군도 담수련의 오음절맥이 악화되지 않을 수 있는 중요한 이유를 새편작에게 듣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담수련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 선 악불군은 본격적으로 다시 배교 비전의 무공들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은밀잠영이라는 보법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은밀잠영은 보법이긴 하지만 특별히 넓은 공간이 필요 없었다. 몸을 숨기는 수법이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큰 효용성이 있는 수법 같은데, 어떤 효용이 있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배교 비전에 있는 구결대로 몸을 움직인 악불군은 통로의 어두운 곳으로 신형을 옮겨 벽에 붙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통로에 두 명의 무림인들이 나타났다. 객잔에 방을 얻은 혈랑무였다.
그들은 손님인 척 대화를 나누며 들어오더니, 주위를 한번 둘러보고는 객방 통로에 아무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슬쩍 악불군과 담수련의 방 앞에 서서 잠시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들의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던 악불군의 모습이 그제야 스르르 나타났다.
‘이놈들 봐라……. 이제 우리 방 앞까지 겁 없이 와? 죽여 말아?’
그들의 방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은 우선은 조용히 지나가기로 했다.
‘그래, 사방이 양민이고 아가씨도 잠 드셨는데 오늘은 봐주지. 그런데 정말 나를 못 본 거야?’
신기하단 표정을 지은 악불군은 왜 수법의 이름이 은밀잠영인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 * *
해남도로 떠나는 배를 탈 수 있는 곳은 뇌주포구뿐이었다. 해남도의 사람들이 원체 배타적이고 거칠어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대단히 경계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인에 대한 배척이 아주 강해서, 광동을 장악했던 구천마성조차 해남도는 건드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해남검문의 세력이 만만치 않기도 했지만, 그 성정이 지독해서 전부 죽을 때까지 버틸 확률이 많아서였다.
그러나 섬에 사는 사람들은 상당히 많아서 해남도로 들어가는 상인들로 뇌주포구는 언제나 인산인해였다.
“회주님! 포구에 무림인들이 많이 나타났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선원들의 모임인 해우회의 회주 엄기덕은 해남검문의 기명제자로 상당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해남도로 가는 배의 선원들은 대부분 해남검문의 기명제자이거나 해남도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무림인들이 얼마나 나타났는데 그러냐?”
엄기덕은 의아한 듯 물었다.
“아이들 말로는 적어도 수십 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수십 명?”
엄기덕은 깜짝 놀란 듯 반문했다.
해남검문의 거센 텃세에도 불구하고 무인들은 꾸준히 해남도로 들어갔다.
광동성의 무인들 사이에서는 해남검문의 삼십육 문파 중 다섯만 이겨도 중원에서 일류 고수급은 된다는 소문이 있었다.
해남검문은 중원의 다른 문파와 달리, 단순 비무가 아닌 문파 깨기란 형태로 비무를 받아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무공을 시험해 보기 위해 해남도를 찾는 것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죽거나 불구가 되어 나오곤 했다. 그래도 자신들의 명성을 올리고자 하는 욕망과 자신의 진정한 실력을 알고자 하는 낭인들은 계속 해남도를 찾았다.
하지만 이렇게 수십 명 가까운 무림인들이 나타난 것은 일갑자 전, 구천마성에서 해남검문에 복속을 강요하며 뇌주포구에 백 명이 넘게 몰려 온 이후 처음이었다.
“예, 그런데 한 가지 의아한 것은 아주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조용해? 그건 또 무슨 말이냐?”
“무림인들이 나타나면 언제나 시끌벅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오늘 나타난 자들은 자신들이 무림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고 합니다. 혹시 해남도를 기습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어떤 미친놈들이 고작 수십 명으로 해남도를 친다더냐? 그 정도 수로 해남도를 제압하려면 모두가 백대고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게다.”
“그렇겠지요?”
“그래도 조심은 하는 것이 좋겠지. 아이들한테 계속 감시하라고 하고, 그들이 만약 배까지 탄다면 몇 명이나 탔는지 내게 즉시 보고하게 해라.”
“알겠습니다.”
‘요즘 북쪽이 난리라더니, 그 여파가 설마 여기까지 미치는 것은 아니겠지?’
수하가 나가자 엄기덕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 *
“목적지가 해남도라고요?”
뇌주포구의 한 주루에 들른 담수련은 마진우와 구여풍에게 합석을 하자고 권했다.
자리에 앉고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에게서 나온 말은 해남도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달라는 것이었다.
“예, 저희들이 뭔가 찾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해남도에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악불군이 대신 답하자 둘은 의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해남도에 아는 사람은 있습니까?”
“처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당연히 없습니다.”
“살수 집단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살행할 곳의 상황과 장소 분석입니다. 본 막에서 해남도에도 살행을 갔던 살수들이 있으니 해남도에 대해 아는 것이 있긴 합니다. 그런데 찾는 것이 무엇인지요?”
마진우의 반문에 악불군은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어찌할지 의견을 구한 것이다. 그러나 담수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선선히 목적을 말했다.
“빙설초를 구하기 위해서예요.”
“빙설초요?”
마진우가 처음 들었다는 듯 구여풍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도 금시초문이라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빙설초 자체가 무림인들이 원하는 공력을 올려 주는 효능 같은 것이 있는 약초가 아니다 보니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몇 가지 증상에는 아주 중요한 약초지요.”
“그 약초가 해남도에 있다는 것입니까?”
“확실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믿을 만한 분이 하신 말이니 찾는 시도는 해볼 만하다고 봐요.”
“그럼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말이십니까?”
“지금은요. 하지만 단서는 있어요.”
“어떤 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해남도에서 뭔가를 찾는 다는 것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만만치 않다는 말은 어렵다는 의미겠지요?”
“예.”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첫째로, 해남도가 대단히 큰 섬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한 지점을 모르고 해남도 전체를 무조건 뒤진다면 수년은 걸릴 것입니다.”
“섬이 그렇게 큰가요?”
담수련이나 악불군은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놀란 눈으로 물었다.
“예, 그러나 문제는 더 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더욱 그렇지요. 계속 말씀해 보십시오.”
어떤 어려움이 있다 해도 담수련을 구할 수 있는 빙설초를 악불군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