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09화>
109화. 남해로 가는 길(2)
악불군의 단호한 말에, 마진우는 빙설초가 그에게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 갔다.
“해남에는 해남검문이라는 무림 문파가 있습니다. 중원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림에 대한 영향력은 작지만, 상당히 강한 문파입니다.”
“그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저희는 약초를 구하러 가는 것이지, 무림 세력과 시비를 걸려고 가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해남검문은 한 문파가 아닙니다. 해남도 전체에 걸쳐 있는 서른여섯 문파의 연합체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무림 문파 이전에 해남도의 호족 군벌이나 마찬가지여서, 치안은 물론 해적 소탕 등 관과 군부에서 하는 일까지 담당합니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해남도는 텃세가 너무 심한 곳으로, 외지인이 나타나는 무조건 그들의 감시망에 걸립니다. 그리고 해남도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은 무조건 그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밖으로 가져갈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럼 그들이 거절한다면 약초 찾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의미입니까?”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약초를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요.”
“해남검문에서 그런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기를 바라야겠군요.”
악불군의 말에 마진우가 당황하자, 듣고 있던 구여풍이 슬쩍 끼어들었다.
“방법이 하나 있긴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사실은 제가 해남도에서 살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구 호, 살행은 비밀이잖아?”
마진우가 급히 말했다.
백인막은 합공을 할 경우가 아니면 자신이 어디로 살행을 갔는지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지금 내가 방법을 말하지 않으면 해남도 전체와 맞붙을 태세인데 어떻게 가만있어? 그리고 지금 우린 두 분을 보호하는 계약 관계인데, 도움을 줘야 하지 않겠나?”
“그래요, 그렇게 우리 간에 신뢰가 생겨야 서로를 믿겠지요. 말씀해 보세요.”
담수련이 재빨리 끼어들어 마진우의 입을 막아 버렸다.
“해남파는 물론 해남도의 모든 사람들이 선천적인 뱃사람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해지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단히 거칩니다. 하지만 한번 관계를 맺으면 모든 것을 내줄 정도로 의리가 아주 강합니다.”
“그럼 그들과 친해질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금방 친해지기는 어렵습니다. 외지인에 대한 경계와 배척이 아주 심하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강한 자를 좋아합니다. 물론 그냥 강하기만 해서는 안 되고, 그들에게 경외심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닌데요?”
누군가를 이기는 것은 간단하다 강하면 되니까, 하지만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강하다는 것을 상대에게 다짜고짜 보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강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싸우거나 자신의 무공을 그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데, 경외심을 느끼기도 전에 거부감부터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파 깨기를 신청하십시오.”
“문파 깨기요?”
“낭인들이 자신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문파에 찾아가 벌이는 일종의 비무 신청인데, 문파의 명예가 걸렸기 때문에 사실상 생사결에 가깝습니다.”
“그런 것은 무관이나 받아주는 거지, 명색이 문파인데 받아주겠어요?”
“살행을 하기 위해 조사를 많이 했습니다. 그들은 싸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문파 깨기를 받아주는 유일한 문파이기도 하지요. 제가 살행에 사용한 방법도 문파 깨기였습니다.”
“좀 특이하군요?”
“해남검문이 그런 문파 깨기를 이용해 강해졌으니까요. 그래서 그들은 정식 비무를 한 경우 죽는 자가 나와도 원한을 가지지 않습니다.”
“정말이에요?”
“본 막의 정보는 아주 정확합니다. 제가 살행을 하기 전에 완전히 숙지한 내용입니다.”
구여풍의 말에 담수련은 악불군을 보며 물었다.
“이분 말 들었지?”
“예,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기는 것은 몰라도 어떻게 해야 경외를 받을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간단해.”
“간단합니까?”
“의리 있는 사람들은 남자다운 것을 좋아한다고 들었어. 우선 남자답게 행동하되 최대한 예의 있게 대해. 그리고 이길 때 절기를 사용해서 확실하게 이겨. 단, 절대 상처를 입혀서는 안 돼. 또한 이긴 후에도 무조건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겸손해야 해.”
“그게 통할까요?”
담수련이 자신 있게 말하자, 말을 한 구여풍조차 약간 의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다.
“아가씨의 말씀은 틀린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확고한 악불군의 말에 둘은 입을 닫았다. 오히려 담수련이 겸연쩍은 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자신의 말이 틀린 적이 없다는 악불군의 말은 분명 틀린 것이기 때문이었다.
“두 분 덕에 아주 좋은 정보를 얻었네요. 이제 배도 도착한 것 같으니 출발하지요.”
“그럼 저희들은 먼저 타겠습니다.”
둘은 우연히 같은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눈 사람처럼 반가웠다는 듯 인사를 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해남도로 가는 배는 하루에 딱 두 번만 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배가 방금 도착한 것이다.
* * *
“저것들, 진짜 배까지 타려는 모양입니다.”
“화나게 하는 데 재주가 있는 놈이군…….”
악불군이 뇌주포구에 올 때까지도 진짜 해남도로 가는 배를 타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그였다.
짜증스럽게 중얼거린 혈령사자는 파도치는 바다를 보며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그는 초원에서 전사로 키워진 자로, 땅에서는 무서운 것이 없었지만 물만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우리도 배를 탄다.”
그런데 악불군을 따라 배를 타는 무인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악불군이 이름을 밝히고 다니면서 다시 그를 뒤 쫓는 자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전과 다른 점은, 이번에 따르는 자들은 초절정 고수라는 것이었다.
* * *
해남도로 가는 배가 떠나고 반 시진쯤 지났을까…….
철무정과 여민웅이 오십 명이 넘는 무인들을 이끌고 포구에 도착했다.
포구가 보이는 주루에 철무정과 여민웅은 자리를 잡자, 흑살마검 율사기가 다가왔다.
철무정의 명으로 악불군의 행방을 쫓아온 그는 잠도 제대로 못 잔 듯 상당히 고생한 흔적이 역력했다.
“담수련과 악불군은 찾았느냐?”
“다행히 삼 일 전에 찾았습니다.”
“수고했다. 그럼 지금 어디 있느냐?”
“갑자기 배를 타는 바람에 놓쳤습니다.”
“배를 타? 왜?”
“그걸 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협행을 하듯 광동성 사방을 헤집고 다니더니 갑자기 이곳으로 왔습니다. 들킬까 봐 좀 멀찌감치 떨어져 미행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를 타는 바람에…….”
“그럼 너희도 따라갔어야 할 것 아니냐?”
“수하 둘이 간신히 타고 쫓아갔습니다.”
“고작 둘로 추격이 가능하겠느냐?”
“배가 만선이었습니다. 거기다 상당히 많은 고수들이 배에 타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소가주님과 단주님께 보고도 해야 해서…….”
“고수? 악불군과 담수련을 쫓는 자들이더냐?”
“그런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혈랑무도 있었습니다.”
“혈랑무가 여기까지 추적해 왔다는 말이냐?”
“예.”
“금령군주가 다급하긴 한 모양이군. 지금 한 손이 아쉬울 텐데 여기까지 보내고……. 그래, 어디로 가는 배를 탄 것이냐?”
“해남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해남도? 도대체 이놈이 담수련을 데리고 어디를 가는 거야?”
철무정의 검미가 바짝 좁혀졌다.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에, 생각지도 못한 목적지였다.
“혹시 담무룡과 해남검파 간에 무슨 약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듣고 있던 여민웅이 말했다.
“만약 그랬다면 대공 전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 이들의 행동은 금령군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흑살마검.”
“예! 소가주님.”
“다음 배는 언제 있다고 하더냐?”
“내일 새벽에 하나 떠나고 정오쯤에 또 하나 떠난다고 했습니다.”
“그럼 내일 새벽 배를 탄다.”
철무정의 말을 들은 여민웅은 당장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해남도는 소가주님께서는 가실 수 없습니다.”
여민웅의 말에 철무정이 인상을 구기며 반박했다.
“여 단주, 그게 무슨 소립니까? 여기까지 만 리 길을 보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 겨우 잡았는데, 나보고 여기서 돌아가라는 말입니까?”
“돌아가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해남도는 제가 철룡단 반만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여 단주!”
“가주님께서 제게 내리신 명의 일 순위는 소가주님의 안위였습니다. 해남도는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입니다. 만약에라도 위험한 상황을 조우할 경우 도망 갈 길이 전혀 없다는 말이지요. 전 소가주님의 안위를 가지고 모험을 할 수 없습니다.”
강한 여민웅의 어조에 철무정의 표정이 변했다. 하지만 철무정이라 해도 원나라의 귀족 출신인 여민웅의 의견을 묵살할 수는 없었다.
“소가주님, 해남도에서 나오는 배는 전부 이 포구를 들르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직접 들어가지 않으신다 해도 악불군과 담수련은 독 안 든 쥐나 마찬가지입니다.”
둘의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지는 것을 느낀 흑살마검이 그동안 알아낸 정보를 급히 말했다.
“해남도에서 다른 곳으로 가는 배는 없단 말이냐?”
흑살마검의 말에 철무정이 확실하냐는 듯 물었다.
“제가 이곳 어부들에게 분명하게 들은 말입니다.”
“그럼 여 단주님만 믿겠습니다. 둘 다 반드시 생포해서 데려오셔야 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철룡단은 무적입니다.”
* * *
“난 절강에 살면서도 한 번도 바다는 본 적이 없어. 그래서 바다는 도대체 어떤 걸까, 동정호 같을까 궁금했거든. 그런데 오늘 보니까 바다는 어떤 단어로도 묘사 안 된다는 말이 이해가 가네.”
갑판의 난간에 서서 바다를 보는 담수련의 얼굴에는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감탄이 가득했다.
“전 어렸을 적 할아버님과 함께 바다 구경을 한 적이 있습니다. 비록 배를 타고 이렇게 나오지는 못하고 산 위에서 보기만 했지만 그 넓디넓음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바다는 왜 갔는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려면 넓게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거대함에 비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도 스스로 느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래야 겸손함도 배운다고요.”
“이따금 듣는 거지만 소군의 할아버님은 참 대단하신 학자였던 것 같아.”
“제가 당시는 어려서 잘은 모르지만 지금 생각하면 당신의 한마디 한마디가 지금의 저를 만든 금과옥조나 다름없는 듯합니다.”
자랑스러워하는 악불군의 말 속에 깔린 짙은 슬픔을 느낀 담수련은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의 말에서 거의 동시에 역병으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마저 굶주림으로 잃었던 어린 악불군의 절망적인 상황이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악불군을 생각할 때 이따금 자신도 모르게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을 흘리는 데에는 그의 어릴 적 불행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소군은 정말 강한 남자인 것 같아. 나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정말 살기 힘들었을 거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그녀의 옆모습을 슬쩍 보았다.
담수련의 말대로 삶의 희망을 잃었던 그때, 그를 다시 살아가게 만든 사람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의 눈에 비쳤던 담수련의 커다란 눈망울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지금까지 버텨 온 힘은 오로지 아가씨 덕분입니다.”
“나도 소군이 없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야. 소군이 육 관에 들어가서 하나하나 통과한 후 나를 찾아올 때마다 얼마나 기뻤는데……. 그런데 지금은 매일 내 옆에 있어서 너무 좋아.”
담수련은 악불군이 언제 오나만 기다리던 때를 잠시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도 그때가 머리를 스쳤다.
잠룡세가의 육 관은 정말 지독할 정도로 수련생들을 괴롭혔다. 절기를 가르치지 않으면서 강한 무인을 만들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수련밖에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너무 심한 수련을 견디지 못해 다음 관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탈락하는 수련생도 부지기수였고, 이따금은 죽는 자들도 나왔다.
하지만 악불군은 그 모든 것을 견뎌 낼 수 있었다.
관을 통과하면 담수련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힘듦이 풀렸었다.
‘저도 아가씨랑 계속 같이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담수련을 보는 악불군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따뜻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