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10화>
110화. 바다(1)
[혈랑무가 이 배에 탔습니다.]
그때 악불군의 귀로 구여풍의 전음이 들려왔다.
[확실합니까?]
[본 막과 혈랑무는 여러 차례 공동 살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특징을 잘 압니다. 분명 혈랑무입니다.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구천마성의 인물로 보이는 자들도 다수 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모른 척하시고 저희들 가까이 오면 누구인지만 살짝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무슨 일 생겼어? 누가 전음을 보낸 것 같은데?”
“아가씨께서는 전음도 들으십니까?”
“호호! 내가 무슨 재주로 전음을 들어. 소군에게 변화가 생기니까 알지.”
“제게 변화가 생깁니까?”
악불군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음이란 것이 비밀을 요하기 위해 하는 것인데, 자신에게서 변화가 생겨 상대가 눈치를 챈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 내 생각에 다른 사람들은 절대 그 변화 눈치 못 챌 거야.”
악불군이 걱정을 하는 듯하자 담수련은 자신 있게 말했다.
“아가씨, 이제 들어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습니다.”
담수련은 하늘을 한 번 보더니 손뼉을 탁 쳤다.
“내가 바다의 폭풍우에 대해 적혀 있는 책을 봤는데, 그게 진짜 엄청나대. 우리 들어가지 말고 직접 한번 몸으로 부딪쳐 보자.”
“안 됩니다.”
“왜에~?”
“바람이 심한데 여기서 비까지 맞으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소군이 비 안 맞게 해 주면 되잖아?”
“우산으로 막는다 해도 이렇게 사방이 다 뚫린 곳에서는 다 막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도 이번에 대자연의 신비를 직접 한번 체험하고 싶은데…….”
담수련이 간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악불군은 더 이상 안 된다고 할 수 없었다.
‘안 되는데…….’
어려서부터 담수련의 그 눈빛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일을 해서 담무룡에게 큰일이 날 뻔한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의 간절한 눈빛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악불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처럼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에서 우산은 쓸모가 없었다.
방법을 생각하던 악불군의 머리에 한 수법이 생각났다. 아직 싸움에서 사용해 본 적은 없지만 연습은 상당히 많이 했던 수법이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제가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되면 그땐 선실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알았어.”
담수련은 너무 선선히 약속을 했다.
‘바로 답을 하시는 것을 보니, 이번 약속도 지키시지 않을 것 같구나.’
중얼거리는 악불군의 얼굴에는 그러건 말건 무조건 귀엽다는 표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 * *
배는 대단히 컸다. 그러나 해남도로 보내는 많은 물품은 물론 말과 소 같은 가축들까지 많이 실려 있다 보니, 사람들이 쉴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다.
나름 선실에 선을 그어 사람이 앉을 공간을 구분해 놓았지만, 양민과 상인들은 구석에 바짝바짝 붙어 않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 덩치가 큰 몇몇 왈패들은 제법 큰 공간을 차지하고 앉아 술까지 먹고 있었다.
이상한 점은, 분명 상당히 많은 수의 무림인들이 탔는데 선실 안에는 무림인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자님, 예상 밖으로 악불군과 담수련을 쫓는 자들이 많습니다.]
상인 복장을 한 채 구석에 앉아 있던 혈령사자는 대주의 보고를 받자 인상을 찌푸렸다.
[몇 명이나 될 것 같더냐?]
[최소 삼십 명은 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무공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놈이 정말 그 정도로 고수인가……?’
배에 탄 고수들, 그중에는 그를 능가할 것으로 보이는 초절정 고수도 있었다.
악불군을 제거하려 왔다면 지금 이 배는 아주 좋은 장소였다.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그들의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물러서서 주시만 하고 있었다.
혈랑사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처음 악불군에 대해 추격을 하라는 명을 받고 그는 상당한 불만을 표했다.
어찰단에서도 최고 간부에 속하는 그에게 무공도 제대로 못하는 담수련과 일개 호위 무사인 악불군을 제거나 생포도 아닌 감시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당한 고수들에 대한 소문은 애당초 그는 믿지 않았다.
이십대의 호위 무사 출신이 전대 백대고수인 신마급의 마두들을 제거했다는 것은 그의 상식선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을 추격하면서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강서를 지나 광동에 들어서면서 계속되는 악불군에 대한 무용담은 헛소문으로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 내용이 너무 세세했고, 실지로 추적하면서 도착한 곳에서 시체들을 직접 보기도 했다.
더구나 몇몇 시신들에 난 상처들은 너무 깨끗하고 간결해서 그조차도 그런 상처는 만들 수 없어 보였다.
[지금 악불군과 담수련은 어디에 있느냐?]
[중간 갑판에 있다가 지금은 뱃머리 쪽으로 이동을 했습니다.]
[뱃머리 쪽에 혈영무가 몇 명이나 있느냐?]
[두 명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그놈이 눈치는 채지 못하겠지?]
[모를 것입니다.]
[우선 다른 놈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리도 움직인다. 모두에게 경거망동하지 말고 감시만 잘하라고 해라.]
[예!]
대주가 다시 밖으로 나가자 혈랑사자는 눈을 감았다. 지금 배 안은 조용했지만 사실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는 우선 힘을 비축하기 위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 * *
[공자님, 오른 쪽 옆에 있는 두 명의 상인이 혈랑무입니다.]
마진우의 전음에 악불군은 슬쩍 옆을 보았다. 두 명의 상인이 들릴 정도로 장사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서 있었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또 다른 자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혈랑무가 아니더라도, 다른 무림인들이 사방에서 공자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해남도에서 공격을 하는 것은 해남검문 때문에 위험하니 이 배에서 기습할 확률이 높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몇 명은 저희보다 더 강한 것 같습니다.]
[저들이 저를 공격한다 해도 두 분은 싸움에 끼지 말고 아가씨만 보호하십시오.]
[곧 비가 올 것 같은데, 선실로 들어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 보니 안 될 것 같군요. 이자들은 양민들이 다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를 않는 자들입니다. 제가 선실로 들어가면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 수 있습니다.]
악불군의 말은 둘에게 또 다른 충격으로 들려왔다. 그들 역시 살행을 할 때 무공을 모르는 양민들이 다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 알겠습니다. 아가씨는 확실하게 보호하겠습니다.]
마진우는 당황한 말투로 말을 끝냈다.
* * *
그때, 또 다른 한 무리가 설왕설래를 하고 있었다.
“저놈이 아주 한가하게 바다를 보고 있는데, 지금 기습하면 어떻겠습니까?”
구천마성의 장로인 포영신사가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고 있는 혈염구혼을 보며 재촉했다.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라. 저 한 놈에게 본 성의 호법 셋이 죽었다. 무엇보다도, 이번에 또 실패하면 우린 성주님께 죽는다.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상황에서 공격해야 한다.”
“이러다 해남도에 도착하면 공격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장로인 귀염마도 역시 당장 공격을 하지 않는 것이 좀 불만인 듯 말했다.
호법들을 셋이나 죽였다고 해서 엄청난 고수일 거라고 생각하고 왔는데, 막상 악불군을 보니 호법들이 당한 이유가 이해할 수 없는 그였다.
“지금 이 배에 우리가 모르는 놈들이 최소한 이십 명이 있다. 무공이 만만치 않아. 그놈들의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우리가 먼저 공격을 시도하는 것은 하책일 뿐이다. 더군다나 해남도에 도착하려면 최소한 두 시진은 더 가야 한다. 기다려라.”
혈염구혼은 담수련과 함께 선두의 난간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계속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저놈을 두려워하는가……. 빈틈이 저렇게 많거늘, 어찌 공격할 곳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 * *
해상의 날씨는 변덕스러웠다. 광동을 출발할 때 그렇게 청명하던 날씨는, 점점 구름이 짙어지더니 축축한 바람이 먼저 불기 시작했다.
“소군, 저거 봤어?”
담수련은 배를 향해 몰려오는 검은 구름 사이에서 번쩍하며 떨어지는 벼락을 보자 감격한 듯 소리쳤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떨어지는 벼락은 정말 장관이었다.
“돛을 내려라!”
검은 구름이 점점 가까워지자 뱃사람들의 움직임이 다급해졌다. 항해 중 갑자기 맞닥뜨리는 폭풍우는 그들에게는 가장 위험한 변화이기 때문이었다.
“……?”
담수련은 악불군이 자신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의아한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를 부르지 못했다.
악불군의 눈이 강한 바람에 휘말리는 구름과 그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벼락들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거였구나…….’
지금 악불군은 구름 사이를 뚫고 바다까지 이어지는 벼락의 줄기를 보며,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었다.
“소군, 왜 그래?”
담수련은 약간 불안한 듯 그의 소매를 잡아끌며 말했다.
그의 얼굴에 언젠가 쓰러졌을 때의 표정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딴생각을 했습니다.”
소매를 잡아 끄는 기척에,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악불군은 담수련을 보며 말했다.
“또 어디 아픈가 해서 깜짝 놀랐잖아.”
“이제 그런 일 없을 거라니까요.”
담수련은 악불군을 자세히 보더니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나 때문에 중요한 깨달음을 놓친 것은 아니야? 저번에도 쓰러졌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무공이 강해졌잖아? 방금 그런 표정이 보였는데…….”
막상 악불군이 멀쩡한 표정으로 묻자, 그녀는 자신이 큰 실수를 한 것이 아닌지 불안해졌다.
“깨달음이 그렇게 자주 오나요? 그리고 제겐 아가씨의 말씀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순간 담수련은 자신의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가장 중요히 여기는 깨달음보다 자신이 중요하다는 말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요새,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소군이 언제나 내 옆에 있는데 왜 자꾸 보고 싶고, 뭔가 부족한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모르겠어…….’
그녀는 악불군의 눈과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바다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그냥 비가 아니라 폭풍우 같네? 출발할 때 뱃사람 말은 날씨가 그다지 험하지는 않을 거라고 했는데? 소군, 들어가야 할까?”
“비 오는 바다를 경험해 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는 싶은데, 가벼운 비가 아닌 것 같아. 괜히 내 고집 때문에 소군만 힘들면 안 되잖아?”
“전 안 힘듭니다. 아가씨께서 하고 싶으면 하세요.”
조금 전까지 비 맞으면 건강에 해롭다며 말리던 악불군이 오히려 하라고 권하는 상황이 의아한 듯, 담수련은 악불군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악불군이 계속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담수련은 급히 고개를 다시 돌렸다.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지만, 악불군 역시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무슨 짓이야……. 아가씨를 그렇게 계속 빤히 보고 있다니, 쯧! 악불군, 정신 차려라!’
자책하는 악불군과 얼굴이 발개진 담수련. 다행히 다가오는 먹구름이 둘의 얼굴을 가려 주고 있었다.
“선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아무래도 폭풍우 같습니다. 위험합니다.”
그때 위험한 물건들을 밧줄로 묶던 선원이 다가와 말했다.
“우린 괜찮으니 일 보십시오.”
“그래도 위험하실 텐데……?”
악불군의 등에 메인 검을 본 선원은 더 이상 말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 * *
갑작스런 폭풍우는 모든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꽤 큰 배였지만 망망대해에서는 어떤 배도 조각배일 뿐이었다.
배가 넘어갈 듯 흔들릴 때마다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고, 동물까지도 힘든지 꿱꿱거렸다.
“사자님! 자, 자, 잠깐 나와 보십시오.”
정좌를 하고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혈랑사자의 얼굴은 상당히 괴로워 보였다.
초원의 전사로 무서운 것이 없는 그였지만, 바다의 폭풍우에 흔들리는 배가 만드는 멀미만은 견디기가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난리냐?”
“지금 선실 밖에서…….”
보고하는 대주는 무엇에 그렇게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