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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검지애-111화 (111/472)

<천검지애 111화>

111화. 바다(2)

혈랑사자는 인상을 구기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선실 밖으로 나가는 순간 강한 비바람에 인상을 구겼다.

커다란 파도가 옆을 치면서 배는 사람이 서 있을 수도 없을 만큼 심하게 요동을 치고 있었다.

저녁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꽤 남았음에도 이미 사방은 한밤중처럼 새까맸다.

“도대체 뭘 보라는 거냐?”

“저기 선두…….”

혈랑사자가는 대주가 가리킨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번쩍!

그때 알맞게 번개가 치면서 배를 선명하게 비췄다. 이내, 혈랑사자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 갔다.

비단 놀란 자들은 혈랑사자만이 아니었다.

이 층 갑판에 숨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혈염구혼과 두 장로는 물론이고, 악불군을 몰래 지켜보던 모든 무림인들 중에는 경악을 넘어 부르르 떠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저, 저놈이 정녕 저 정도로 고수였다는 말이야? 도대체 내공이 얼마나 되기에…….”

비바람과 강한 파도를 헤치고 지나가는 배의 선두는 요동이 가장 심했다. 그런데 악불군과 담수련은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듯, 그 심한 요동 속에서도 똑바로 선 채 바다를 보고 있었다.

모두가 놀란 것은 둘의 몸 근처에서 비가 튕겨 나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호신강기를 익힌 자라면 일 갑자의 내공만 있어도 악불군처럼 떨어지는 비를 튕겨 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보슬비 정도였다.

지금 같은 폭풍우 속에 떨어지는 장대비를 호신강기로 막아 내려면 최소한 내공이 이 갑자 이상은 되어야 했다. 더욱 그들을 기함하게 한 것은, 지금 장소가 땅이 아니라 격하게 요동치는 배 위라는 것이었다.

[사자님, 저 정도 내공 수위면 우리가 대적하기에는 너무 강한 것 같습니다.]

혈랑대주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소문이 너무 확대된 것이 아니라 축소된 것이었어. 저 정도의 무공이면 태양천의 고수들이 직접 나서기 전에는 우리 어찰단으로는 생포는커녕 제거도 어렵다. 군주님께서 뭔가 잘못 알고 계시다.’

혈랑사자는 급격하게 전의를 잃고 말았다.

[수하들에게 전부 선실로 후퇴하게 해라.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금한다.]

[알겠습니다.]

혈랑사자는 이미 어찰단 최고 간부 중 하나였다.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고 일을 벌이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까지 걸고 싶지 않은 자들은 또 있었다.

[혈염 호법, 지금 저자가 보이는 신위는 말씀하신 것보다 더 강해 보이지 않습니까?]

포영신사의 말을 들은 혈염구혼의 표정은 이미 상당히 굳어져 있었다.

[제가 봐도, 우리 셋이 협공을 한다 해도 승리할 확률은 반도 안 될 것 같습니다.]

귀염마도 역시 아까와는 달리 자신을 잃은 듯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갈등하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악불군과 담수련은 눈앞에 벌어진 자연의 광란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리고 있었다.

“정말 자연의 힘을 보면 인간들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알 것 같아.”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 말씀대로 보기를 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호신강기도 배웠어?”

“호신강기요?”

“응, 난 소군이 우산을 구해 올 줄 알았어. 그런데 지금 내공만으로 비를 막고 있잖아. 이런 거는 호신강기를 이용하는 것이라고 들었거든?”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지금 사용하는 수법은 소림내경일지선을 통해 기를 발산하는 방법을 스스로 체득한 것을 시험해 본 것이었다.

아마 무림인들이 악불군이 단지 소림내경일지선의 지식만으로 이런 수법을 펼쳤다는 말을 듣는다면 아마 대경실색을 할 것이었다.

이미 악불군이 스스로 무공을 창안해 내는 종사급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덕분에 또 하나 배운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대답에 담수련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악불군이 진짜 호신강기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아버지께서 소군의 능력을 과소평가한 것 같아.”

“제가 과소평가할 능력이나 있겠습니까?”

“소군조차 스스로의 능력을 모르잖아? 내가 무공은 익히기 어려운 체질이라 높지는 않지만 무공에 대한 상식은 꽤 많아. 지금 소군의 무공이 느는 과정은 솔직히 비정상이야. 하지만 나쁜 것은 아니야.”

‘어느 쪽이 진짜 아가씨인지 정말 헷갈릴 정도군.’

담수련의 말을 들으며 악불군은 피식 웃었다. 어떤 때는 너무 순진한 소녀 같은 행동을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모르는 것이 없는 지자의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었다.

* * *

악불군과 담수련이 해남도로 향하는 동안 천하의 상황은 더욱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원나라와 반군 간의 전쟁이 수시로 벌어질 뿐 아니라, 반군과 반군 간의 전쟁도 대규모로 벌어졌다. 전쟁이 빈번해지면서 생활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굶어 죽었고, 역병까지 번져 시체를 보는 것이 일상사가 될 정도였다.

“공자님, 총단에서 서찰을 왔습니다.”

태극검자와 뭔가를 숙의하고 있던 백천학은 양지운의 목소리를 듣자 손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자 문이 누군가 연 것처럼 스르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양지운은 공손한 자세로 백천학에게 서찰을 건냈다.

서찰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비문으로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태극검자가 궁금한 듯 물었다.

“원나라가 물러난 지역에 군소방파가 우후죽순처럼 세워지고 있다고 합니다.”

“숨었던 중원 무림인들이 드디어 모습을 나타내는 모양이군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원나라에 부역한 무림 세력들을 징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에 세력 다툼부터 시작한 모양입니다.”

“지금 돈 나올 곳이 별로 없으니 좋은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세력 다툼은 필연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래서 우선 호남 북부만이라도 제갈세가를 재건하여 장악을 하도록 하라는 지시입니다.”

“제갈세가를 구심점으로 삼으라는 것이군요?”

“호남 북부가 원래 제갈세가의 구역이었으니까요.”

태극검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웅회에 가입한 문파들은 원나라가 물러난 뒤 정파 간의 쓸데없는 소모전과 시비를 줄이기 위해, 멸문하기 직전에 장악하고 있던 구역을 인정해 주기로 약조를 맺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웅회에 가입하지 않은 문파들이 문제였다. 특히 사파와 마도는 중원을 수복한 후에도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 자명했다.

“그리고 호남과 호북의 경계에 있는 동악현에서 남개방과 궁가방 간에 대규모 전쟁이 있었다는 정보가 들어와 있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궁가방과 남개방은 원래 한 문파였지만 둘로 갈라진 후 둘의 사이는 철천지원수로 변해 있었다.

특히 개방의 적통 싸움은 일 갑자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었다.

“궁가방이 큰 피해를 입고 북쪽으로 도망을 쳤다고 합니다. 다만 남개방 역시 피해가 만만치 않아 추격은 못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승리를 했다니 다행이군요. 양 단주님.”

“예!”

“총단에서 반란군 간의 우선순위를 결정한 모양입니다.”

백천학의 이어지는 말에 양지운과 태극검자는 궁금한 얼굴로 백천학을 쳐다보았다.

영웅회에서는 가장 세력이 큰, 세 곳의 반란군을 모두 돕고 있었다.

그들은 직접적인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어찰단 등의 암살 시도를 막고 세력권 내에 있는 원나라의 첩자 및 부역 무림인들을 처단하는 도움을 주고 있었다.

“유복통이 몰락했으니 결국 장사성을 택하겠군요?”

“총단에서는 주원장을 제일 순위에 올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주원장을요? 주원장은 곽자흥 덕에 크기는 했지만, 집안이 너무 한미하고 현재 군세도 가장 약하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양지운은 총간의 결정이 의아한지 반문했다.

“총단의 분석에 따르면, 유복통이 사라진 지금 진우량이 가장 강한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원나라에서 관직을 맡은 적이 있고, 지금도 원나라와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는다는 정보가 있습니다.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태극검자와 양지운도 동의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천학은 다시 말을 이었다.

“장사성은 순수한 중원인으로 믿을 만하지만, 지금 그의 군대들이 양민들을 약탈하는 등 많은 피해를 주어 민심이 따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군대만은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도록 군령으로 정해, 군대를 완벽하게 통제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총단에서는 그것을 높게 산 듯합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갈 대협께 이미 연락이 갔을 겁니다. 그렇다고 총단에서 장사성이나 진우량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지금과 똑같이 그를 돕습니다. 단, 주원장과 전쟁을 벌이게 될 경우 주원장을 공격하는 것은 불허합니다.”

주원장을 돕는 무림 세력은 장사성이나 진우량의 군사를 공격할 수 있지만 다른 쪽은 할 수 없다면 주원장에게 대단히 유리한 전개가 될 것은 자명했다.

“장사성 장군이나 진우량이 알아서는 안 되겠군요?”

“당연히 알아서는 안 됩니다.”

원나라가 중원에서 쫓겨난다면 다음 황조는 지금 말한 세 군벌 중에서 나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들도 진우량이나 장사성 그리고 주원장이 영웅회만이 아닌 다른 무림 세력과도 끈이 이어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를 중점적으로 도울지까지 결정이 되었다면 이제 변수는 없겠군요?”

태극검자의 말에 백천학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원나라는 망하고 새로운 황조가 탄생하는 것에 변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다만…… 무림의 재편 과정 중에 변수는 있을지도 모르지요.”

말하던 백천학이 잠시 말을 끊었다가는 다시 이어 갔다.

그의 머리에 갑자기 악불군의 모습이 스쳐 갔기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천하 정세가 재정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 쟁쟁한 영웅들의 얘기를 하는 중에도 악불군이 떠오른 것을 왜일까?

백천학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 *

자신의 이름이 점점 영향력 있는 무림인의 머리에 각인이 되고 있는 줄을 악불군은 예상이나 했을까…….

아쉽게도 악불군에게 그런 것은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담수련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명성이란 스스로 높이고 싶다고 해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드디어 폭풍우를 벗어난 배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둘은 여전히 선두에 서서 바다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는 상황은 처음 배가 출발할 때와는 완연히 달라져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북적거리던 선두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들 주위로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었다.

심지어 선원들조차 근처로 갈 때는 허리를 깊이 숙여 경의를 표하며 일을 할 정도였다.

‘너무 멋있어…….’

바다를 보는 척하며 담수련은 힐끔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폭풍우가 지나고 다시 나타난 해는 더욱 빛났다.

그리고 그 반짝이는 햇빛을 받으며 그녀의 옆에 뒷짐을 지고 꼿꼿하게 서 있는 악불군의 모습은 그녀가 매일 보던 모습과는 또 다른 멋이 있었다.

그녀는 그동안 한 번도 궁금한 적이 없던 것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소군.”

“예.”

“세가에 있을 때 여자들한테 인기 좋았지?”

“여자들이요? 전 여자들을 만난 적이 없는데, 인기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지요.”

악불군은 그녀의 질문의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가 안 가는지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자들을 왜 만난 적이 없어? 잠봉단만 해도 다 여자잖아?”

“잠봉단원은 여자가 아니라 그냥 잠봉단원이지요.”

“여자는 여자잖아?”

“저는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여자를 어떻게 한 번도 여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을 수 있는 거야?”

“여자로 생각했어야 하는 겁니까? 그럼 이제부터 여자라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니, 꼭 그럴 필요는 없고. 그럼 난?”

“아가씨요?”

“나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

“하늘같은 아가씨를 감히 제가 어떻게 여자로 생각하겠습니까?”

“정말로 나도 여자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거야?”

“…….”

담수련의 목소리가 살짝 달라지자 악불군은 자신이 뭔가 잘못 대답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악불군이 답을 못하자 담수련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이내, 그녀의 입에서 조그맣게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바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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