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12화 (112/472)

<천검지애 112화>

112화. 모이는 사람들

속칭 새외로 불리는 청해에서 가장 큰 호수인 청해호.

호수의 주변을 따라 형성된 도시는 새외 최대의 환락가이자, 이곳을 지나는 상인들과 유목민들의 젖줄로 불리는 곳이다.

언제나 취객들의 고함과 기녀들의 호객하는 소리로 시끄러운 이곳이 쥐죽은 듯 조용했다.

새외의 절대자들이 오늘 청해호 도시에서 만난 것이다.

각기 다른 복색을 갖춘 세 무리의 무림인들이 경계하는 커다란 주루 안, 엄청난 기를 뿜어 대는 세 명의 절대자가 원탁에 앉아 있었다.

각기 자신의 지역에선 가히 신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염화마제께서 우리를 은밀하게 이곳으로 부르신 이유가 있을 텐데 말해 보시지요?”

대막의 신이라 불리는 대막혈혼사의 사주인 대막혈존이 괴이한 형태의 모자를 쓰고 있는 노인을 보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신강의 신으로 불리는 천외신교의 교주인 염화마제였다.

“귀하신 두 분께서 여기까지 와주신 점에 대해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먼저 입을 연 대막혈존과 포달랍궁의 수좌인 천수활불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말했다.

“우리가 일 갑자 전에 새외 연합을 만든 후, 나름 강력한 우의를 견지해 왔습니다. 회주이신 교주께서 부르셨는데 당연히 와야겠지요.”

서장의 신으로 불리는 천수활불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며 합장을 했다.

“얼마 전, 태양천에서 제게 서찰을 보냈습니다.”

태양천이라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급격하게 굳어졌다.

“뭐라고 합니까?”

“도움을 청하는 서찰이었습니다.”

“도움이라……?”

천수활불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읊조렸다.

“그동안 우리가 그들에게 바친 재물만 해도 황금으로 탑을 쌓아도 될 겁니다. 그런데 또 무슨 도움이랍니까?”

대막혈존의 목소리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번은 좀 다른 도움입니다. 인원 동원을 원했습니다.”

“인원 동원이라니? 설마 예전과 같은 동원령을 내리겠다는 겁니까?”

대막혈존이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일 갑자 전, 아직 원나라가 중원을 정복하기 전에 새외 무림은 태양천에 의해 처참한 굴복을 당했다. 태양천은 새외 무림을 굴복시킨 뒤 총동원령을 내렸다.

물론 겉으로는 도움을 청하는 방식이었지만 이미 굴복을 한 그들로서는 거절을 할 수 없었으니 강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동원된 이천 명이 넘는 새외 무림인들 중 살아 돌아온 자는 이백여 명에 불과했다.

태양천은 중원 무림인들과의 전쟁에 언제나 새외 무림인들을 선봉에 세웠다. 그렇지 않아도 앙숙이었던 새외 무림과 중원 무림은 그 일로 완전 원수가 되어 버렸다.

이미 태양천과의 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은 새외 무림은 중원과의 전쟁에 이용을 당하면서 아예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일 갑자가 지난 지금에야 간신히 예전 성세의 반쯤 회복을 한 터였다.

“당시 우리 새외 무림은 태양천의 칼받이 신세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절대 따를 수 없습니다!”

“지금 중원에서 반란이 일어나 원나라가 밀린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 또다시 우리를 이용해 전세를 바꿔 보려는 얄팍한 수를 쓰려는 모양인데, 그들의 뜻대로 해 줄 수는 없습니다.”

대막혈존과 천수활불의 성토에 염화마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당연합니다. 전 그들의 부탁을 거절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뜻을 정면으로 거절한다면 만만치 않은 후환이 따를 것은 자명합니다.”

천수활불이 현실적인 문제를 말하자 염화마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서 두 분을 이곳으로 모십 겁니다. 태양천에게 우리 새외 연합이 얼마나 단단하게 뭉쳐 있는지를 보여 주는 거지요.”

“교주님께 가지고 계신 복안을 자세히 말해 보시지요.”

“십 년 전부터 원나라의 새외에 대한 지배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상당히 많은 나라에서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모두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미 파샤 쪽과 서역 쪽은 원나라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제 태양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두 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원나라는 쇠퇴하고 있지만 태양천은 여전히 강합니다.”

“원나라의 기마병은 정말 대단했지요. 하지만 이제 그 위대한 기마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태양천에 무릎을 꿇은 것은 태양천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 기마병이 그들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태양천은 우리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하신 이유가 있습니까?”

“중원의 무림인들이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습니다.”

“교주님. 태양천이 군림은 했지만, 말살시키려던 중원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상당한 자율도 주었습니다. 교주님 말대로 그들이 지금 중원과의 싸움에 정신이 없다면, 우선 아무 답도 주지 말고 상황을 좀 더 두고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대막혈존의 말에 염황마제는 고개를 저었다.

“전 지금 태양천에 반기를 들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

“태양천은 우리와 다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 새외 무림의 일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원 무림은 다르지요. 천 년이 넘게 우리를 핍박하고 무시하고 진짜 주적은 중원 무림입니다.”

“빈승은 교주님의 말의 의미를 잘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설마 태양천과 중원 무림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설마 그런 바보같은 생각을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까? 전 태양천에서 동원령은 거절을 하되 도움은 주려고 합니다. 단, 조건을 붙일 생각입니다.”

“조건이라면?”

“사천과 감숙을 우리에게 넘기라는 조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움직임은 태양천이 아닌 우리가 스스로 정한다고 하는 겁니다.”

“태양천이 그런 조건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지금 다급한 쪽은 태양천이지, 우리 새외 연합이 아닙니다. 원나라는 이미 끝났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없이 태양천 홀로 중원 무림과 싸운다면 이긴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이긴다 해도 엄청난 타격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확고하게 의견을 개진한다면 분명 우리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숙과 사천이 우리에게 넘어온다면 새외의 천 년 염원을 이루는 일이기는 한데……?”

대막혈존은 불안과 탐욕이 혼재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감숙에는 마룡세가가 있고 사천에는 태룡세가가 있는데, 그들이 쉽게 자신들의 세력을 포기하겠습니까?”

천수활불은 연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래서 저는 우리에게 더 좋다고 봅니다.”

“그게 무슨?”

“사천과 감숙은 당가와 청성파 그리고 공동파까지 지금 숨어서 반원을 하는 무림 세력이 많습니다. 반군의 기세가 점점 강해지면 그들이 모두 궐기를 할 것입니다. 그 싸움은 마룡세가와 태룡세가에서 담당하겠지요. 우리는 약간의 고수들만 보내어 체면치레를 하며 천천히 움직이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양패구상할 때쯤 진격하는 거지요.”

염황마제의 말에 천수활불과 대막혈존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만약 그의 말대로만 된다면 큰 희생 없이 감숙과 사천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두 지역을 발판으로 중원까지 쳐들어갈 수도 있어 보였다.

“포달랍궁은 교주와 함께할 것이오.”

잠시 생각하던 천수활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대막혈혼사가 빠질 수는 없지요.”

“감사합니다. 최종 승자는 우리 새외 연합이 될 것이오!”

염화마제는 술잔을 높이 쳐들며 외쳤다.

극도의 혼란에 빠진 천하에 또 하나의 혼란을 몰고 올 태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새외 무림의 가세는 악불군에게 어떤 영향을 주게 될까……

하지만 아직까지 악불군은 천하의 움직임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 * *

해남도의 관문이 남해포구.

해남검문의 제자들이 포구 앞에 서서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검문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사형, 배에 노란 깃발이 걸려 있습니다.”

해남검문의 일대제자인 하유청은 사제인 길혁규의 보고에 벌떡 일어섰다.

“확실하냐?”

“예!”

“제자들에게 전부 전투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라고 해라.”

“예!”

‘무슨 일인데 노란 깃발을…….’

해남도를 오가는 배의 선원들은 모두 해남도 출신이었다. 그들은 배에 탄 사람들을 계속 주시하며 수상하거나 뭔가 위험이 느껴지면 도착하기 전에 깃발을 올려 포구를 지키는 해남검문의 제자들에게 알렸다.

노란 깃발은 수상한 자들이 많이 탔다는 의미로 전투준비를 명하게 되어 있었다.

드디어 배가 포구에 도착했다.

우선 선원들 몇 명이 먼저 내렸다. 그들은 뜻하지 않은 폭풍우를 거친 탓인지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먼저 내린 선원 중 한 명이 급히 하유청에게 달려가더니 서찰을 하나 내밀었다.

“회주님께서 보내신 서찰입니다.”

“엄 사형이?”

하유청은 검미를 찌푸리며 서찰을 펼쳤다.

엄기덕이 이런 식으로 직접 서찰을 보내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이었다.

“심각하냐?”

서찰을 읽은 하유청이 물었다.

“예전에 볼 수 없는 많은 수의 무림인들이 나타나 회주님께서 걱정이 되시는 모양입니다.”

“그럼 배에 노란 깃발을 올린 것도 이들과 연관이 있느냐?”

“생각보다 많은 무림인들이 배에 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는 도중 갑작스러운 폭풍우가 불었습니다.”

“해남도로 오는 뱃길은 변덕스러우니, 그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더냐?”

“그런데…….”

선원은 자신이 본 놀라운 광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폭풍우로 배가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호신강기로 빗물을 다 튕겨 냈다는 말이냐?”

“호신강기인지 아닌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대단히 강한 빗줄기였음에도 둘의 몸에는 물기 하나 없었습니다.”

“분명 젊은 남자와 여인이었느냐?”

“예.”

“젊단 말이지……?”

하유청은 젊다는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말한 상황은 젊은 사람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직접 보았다는데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리면 누구인지 내게 알려 주거라.”

“예.”

인사를 한 선원은 배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선원들이 사람들을 하선시키기 시작했다.

“백설아, 힘들었지?”

말들을 태우는 곳으로 간 담수련은 보고 싶었다는 듯 백설의 목을 껴안으며 물었다. 백설도 반갑다는 듯 머리를 담수련의 어깨에 비볐다.

“이놈은 무척이나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악불군이 자신이 타는 말의 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그 말은 꼿꼿하게 서 있는 백설과 달리 폭풍우에 기진맥진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지쳐 보였다.

“내리자마자 좀 쉬게 해 줘야 할 것 같아.”

“예.”

둘이 말을 끌고 나오자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후다닥 비켜섰다. 누구도 그의 앞을 막거나 먼저 내리려고 하지 않았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태어나서 누군가에게 공경을 받은 적이 없는 악불군은 그들 사이를 지나면서 약간 겸연쩍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담수련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당당하게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교만함이나 우월감이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귀족의 자태가 저절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저자로군.’

하유청은 사람들의 행동을 보자 선원이 말한 젊은 고수가 누구인지 당장 알아볼 수 있었다.

[사제.]

하유청은 길혁규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저기 백마를 끌고 나오는 여인과 청년에게 무례를 범하지 말라고 모두에게 주의를 시키게. 그리고 해남검문의 규율이 얼마나 엄정한지 알 수 있도록 절도 있게 행동하고.]

[알겠습니다.]

길혁규는 다른 제자들에게 일일이 주의를 주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린 악불군은 삼십 명은 넘어 보이는 무인들이 포구의 길 양쪽에 도열해 있는 것을 보자 혀를 살짝 찼다.

‘생각보다 절도가 있어. 말단 제자들 같은데 이 정도면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 있다고 봐도 되겠구나.’

[소군, 아무래도 저자들 우리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

[우선 피할까요?]

[피한다고 될 것 같지가 않아.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부딪쳐.]

[알겠습니다.]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자신들을 주시하는 중년 무인을 슬쩍 쳐다보았다.

중년 무인은 악불군이 자신을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