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13화>
113화. 해남검문(1)
중년 무인은 악불군의 앞에 서더니 포권을 했다.
“저는 해남검문 남해 보루문의 하유청이라고 합니다. 성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보자마자 이름을 묻는 것은 분명 실례였다. 하지만 무림인들이 처음 만난 자리에서 이름을 묻는 것은 다반사였다.
상대가 누구인지, 배분은 어떻게 되는지 등을 알아야 호칭이 자연스럽게 정해지기 때문이었다.
“저는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하유청은 악불군이라는 이름을 듣자 눈이 커졌다. 이미 악불군의 명성은 광동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당연히 하유청도 악불군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하하! 현 시대의 진정한 협객으로 불리는 천호무적검 악 대협께서 해남도에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하유청은 커다랗게 웃으며 다시 포권을 했다. 그는 진정으로 반기는 것 같았다.
[소군, 잘하면 일이 좀 수월해질 것 같은데?]
[그러게 말입니다.]
담수련과 악불군은 긴장이 좀 풀린 듯 전음을 나누었다.
“진정한 협객이니 천호무적검이니 하는 것은 그냥 호사가들이 붙여 준 허명일 따름입니다. 전 그 정도로 대단한 무인이 아닙니다.”
담수련이 시킨 대로 겸손의 극치를 보여 주는 악불군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하유청에게 큰 호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대단한 명성을 짧은 시간에 얻은 사람이 나이도 젊은데 겸손하군. 진정한 협객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소리는 아닌 것 같구나.’
하유청은 악불군이 해남도에 시비를 걸려고 오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자 긴장이 좀 풀리기 시작했다.
“해남도에 아시는 분은 계십니까?”
“없습니다.”
“그럼 숙식은 어떻게 하실 예정이신지요?”
“우선 가까운 객잔에 짐을 풀 생각입니다.”
“같은 무림인으로 이렇게 친분을 갖게 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악 대협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본 문파에 모시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글쎄요? 아가씨,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불군이 담수련을 보며 묻자 하유청은 놀란 눈으로 담수련을 쳐다보았다. 그는 사실 처음부터 담수련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래, 하 대협 말씀대로 가깝게 지내야 친분도 생기는 거니까 신세 좀 지지, 뭐.”
담수련이 선선히 허락하자 하유청이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악 대협께서 모신다고 알려진 천상신녀이시군요.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천상신녀요?”
담수련은 자신에게까지 명호가 붙은 것은 몰랐는지 놀라 반문했다.
“천상에서 내려온 신녀와 같이 아름다우신 분이라서 그렇게 부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겐 좀 과분한 명호 같네요. 그런데 하 대협.”
“예, 말씀하십시오.”
“저희가 타고 온 배에 원나라의 어찰단이 타고 있어요.”
순간 하유청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정말입니까?”
“악 대협, 누군지 알려 드려요.”
악불군은 담수련이 자신에게 대협으로 칭하고 존대까지 하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뜻을 짐작하고는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직 배에서 내려오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약 이십 명 정도의 어찰단이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악불군은 혈랑사자를 비롯한 혈랑무들이 어떤 복색을 하고 있는지 자세히 알려 줬다.
“감히 어찰단 놈들이 해남도에 들어오다니!”
“어찰단만이 아니에요. 구천마성의 마인들도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마진우와 구여풍에게 해남검문에 대해 들은 후, 여러 상황을 가정해 봤다.
뿐만 아니라 그에 맞춰 여러 가지 대응책도 생각해 뒀다.
한데 지금 상황은 생각했던 상황 중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펼치리라 생각했던 상황이었다. 내리자마자 해남검문의 제자와 이렇게 친분을 틀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해남검문은 어찰단과 구천마성 모두 철천지원수였다. 어찰단은 해남도를 점령하기 위해, 광동의 패자였던 구천마성은 해남검문을 복속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해남도를 공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입니까?”
“몇 명이나 왔는지는 저도 파악을 못했지만, 혈염구혼이란 자는 분명히 있었습니다.”
혈염구혼은 악불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변장을 했지만, 천륭검보를 익힌 악불군은 이미 한 번 싸웠던 그의 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혀, 혈염구혼이라고요?”
하유청은 혈염구혼이라는 말에 얼굴이 확 변했다. 진짜 그라면 자신을 비롯해 지금 있는 제자들로는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유청은 급히 길혁규를 오라고 손짓을 했다.
“부르셨습니까, 사형!”
“빨리 사부님께 구천마성의 혈염구혼이 왔다고 전해라.”
“혈염구혼입니까?”
“빨리 시간 없다.”
“예!”
길혁규가 급히 몸을 날려 사라지자, 하유청은 다시 대화를 나누었던 선원을 불렀다.
“예!”
“당장 하선을 멈추게 하게.”
선원은 묻지도 않고 배로 달려가며 소리쳤다.
“하선 금지! 하선 금지!”
[아가씨,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 같은데요?]
하유청은 얼굴을 사색을 한 채였고, 모든 제자들이 무기를 빼 들며 포구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 사이 선원들이 배에서 내려져 있던 다리를 거둬들이는 장면을 보며 악불군이 약간 걱정되는 목소리로 전음을 날리자, 담수련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받았다.
[해남검문에서 어찰단과 구천마성을 이렇게 두려워한다는 것은 우리의 가치가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야.]
[저희의 가치요?]
[구 대협이 그랬잖아. 해남검문 사람들을 설득하려면 경외를 받아야 한다고.]
[그러긴 했지요?]
[문파 깨기로 강함을 보여 준다면 대단하다 하는 경탄을 불러올 수 있지만 경외까지는 어려울 수 있어. 아무래도 패배하면 마음의 상처를 줄 수 있거든. 하지만 구천마성과 어찰단을 막는 것을 도와준다면 강한 것도 보여 주고 신뢰까지 얻을 수 있어.]
[아가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하시다니……. 전 방금 아가씨께서 어찰단과 구천마성에 대해 말씀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단한 심모원려이십니다.]
[나도 이런 상황은 확률이 낮아서 기대도 안 했는데, 확실히 명성이 높아지니까 여러 이점이 있네.]
[그러게 말입니다. 아가씨께서 명성을 높여야 한다며 자꾸 제 이름을 알릴 때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지금 보니 아가씨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내가 계획을 잘 세워도 능력이 없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된 것은 다 소군의 탁월한 능력 덕분이지, 뭐.]
악불군의 칭찬은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거의 아부 수준이었다. 하지만 악불군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담수련은 그의 칭찬이 너무 좋았다. 악불군이 빈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빈말이래도 그녀는 악불군의 칭찬은 무조건 좋았다.
* * *
[사자님, 해남검문 놈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느지막이 내린 후 천천히 악불군을 미행할 생각을 하던 혈랑사자의 표정이 굳어졌다.
만약 해남검문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깨달았다면 반드시 죽이려 들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판단을 못하고 당황하기는 구천마성 쪽도 마찬가지였다.
[혈염 호법, 상황이 예기치 않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혈염구혼의 표정도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까지 허둥댈 수는 없었다.
[아직 저들의 움직임이 우리 때문이라는 것은 모르오. 우선은 모른 척 상황을 지켜봅시다.]
[해남도에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지에서라면 저 정도 놈들은 그냥 단숨에 죽여 버리고 떠나면 끝인데…… ]
포영신사의 말대로 지금 이곳이 해남도만 아니면 그들이 이렇게 긴장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여긴 도망칠 곳도 없는 섬이었고, 섬 안의 도민들은 전부가 해남검문의 편이었다.
여기서 싸움이 난다면 그들은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결국 지칠 때까지 싸우다 죽게 될 것이 분명했다.
* * *
“사부님!”
한 노인이 오십 명 가까운 무인들을 이끌고 나타나자 하유청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어찰단과 구천마성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노인은 하유청을 보자 다급히 물었다.
“아직 배 안에 있습니다. 제가 급한 대로 하선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럼 직접 본 것은 아니더냐?”
“예,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럼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사실은…….”
하유청은 한쪽에 서 있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슬쩍 보더니 상황을 설명했다.
“저분이 천호무적검 악 대협이라는 말이냐?”
설명이 끝나자 노인은 악불군 쪽으로 보며 반문했다.
“예, 옆에 계신 여협이 천상신녀이십니다.”
노인은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다가가더니 포권을 했다.
“노부는 남해 보루문의 장로인 장철이라 합니다. 중원 무림의 떠오르는 신성이신 악 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 운이 좋군요.”
악불군은 급히 포권을 하며 말했다.
“해남검문의 높은 명성은 누누이 들어왔습니다. 전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천상신녀예요.”
담수련은 악불군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급히 직접 명호를 댔다. 악불군은 몰라도 자신은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천하제일미녀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많이 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잠룡세가 출신이라는 것을 안다면 간신히 조성한 우호적인 관계는 그대로 깨져 버릴 것이 분명했고, 악불군의 명성조차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잠룡세가에 대한 중원 무림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 지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비한 여협으로 불리는 천상신녀를 이 해남도에서 뵙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영광이라고 하시니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유청이에게 어찰단과 구천마성의 혈염구혼이 저 배에 타고 있다고 하셨다는데, 확실한 것입니까?”
“확실합니다.”
악불군의 확신에 찬 대답에 장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 들킬 거짓말을 악불군이 할 턱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들을 압박해서 싸우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무슨 말이신지?”
담수련의 말에 장철의 의아한 듯 물었다.
“제 말을 오해는 마세요. 혈염구혼은 구천마성의 호법으로, 전대 백대고수에서도 상위에 있던 자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악 대협 말이 그와 비슷한 무공을 지닌 자가 둘이 더 있다고 했어요. 거기다 어찰단도 최정예인 혈랑무가 왔어요. 괜히 그런 자들과 싸워서 자식 같은 제자들이 다치거나 하면 안 되잖아요?”
“그자들이 해남도에 나타났단 사실만으로도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참는다면 천하의 조롱거리가 될 것입니다.”
구천마성의 혈염구혼만도 벅찬 판에 그와 비슷한 무공을 지닌 자가 둘이나 더 있다면, 분명 지금의 싸움에서 자신들은 전멸을 피하기 힘들었다. 애초에 해남검문은 각 지역에 흩어져 있어, 그들이 소식을 듣고 달려오려면 하루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루면 남해 보루문이 멸문 당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평범한 문파들끼리의 국지전이었다면 피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상대는 어찰단과 구천마성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은 해남검문의 문파였다.
결코 그들과의 싸움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해남도에 발을 디딘 후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해남도에 발도 못 붙이고 그대로 돌아간다면 오히려 그들이 조롱을 받겠지요?”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습니까?”
담수련의 말에 장철이 솔깃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한번 해 보시겠어요?”
담수련은 조그맣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의 말을 듣던 장철의 표정에 감탄의 기색이 나타났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게 나갔다가 그들이 예상과 달리 오히려 공격을 시도하면 어떡하지요?”
“소문 못 들으셨나 봐요? 혈염구혼은 이번에 멸문한 귀령문을 돕기 위해 세 명의 호법과 같이 왔다가, 세 명은 악 대협께 죽고 혼자 간신히 도망을 쳤습니다. 저희가 옆에 버티고 있는 이상, 절대로 공격 못할 것입니다.”
담수련은 이후의 상황을 이미 다 그리고 있다는 듯 술술 대처 방법을 말하고 있었다.
“악 대협께서 저희 해남검문을 도와주시겠다는 것입니까?”
“해남검문은 협을 숭상하고 의리를 중시한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악불군의 말에 장철은 자신이 생긴 듯 하유청을 보며 말했다.
“신녀께서 하신 말씀, 다 기억하겠지?”
“예, 기억합니다.”
“그럼 가서 그대로 시행해라.”
“예!”
담수련은 제자들을 이끌고 배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하유청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