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14화>
114화. 해남검문(2)
사실 지금 상황은 원래 그녀의 계획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른 지자들과 다른 점이 있었다.
각 문파의 머리 역할을 하는 기존의 군사들은 한번 계획을 짜면 반드시 거기에 맞추려고 하는 고집이 있었다. 자신의 계획과 분석에 대한 자부심과 수정에 따른 어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타나는 사람과 변화하는 상황에 맞춰 계획을 계속 수정했다. 그만큼 머리가 더 빨리 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해남검문 소속 남해 보루문의 일대제자 하유청이다. 배에 타고 있는 어찰단과 구천마성에 알린다! 우린 배에 올라가 너희들을 색출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너희들이 배에서 내리는 순간, 우리는 반드시 너희를 죽일 것이다.”
“저 젖비린내 나는 놈이 감히!”
하유청의 외침을 듣고 있던 귀염마도가 대노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혈염구혼을 보며 말했다.
“혈염 호법, 어린놈들에게 저런 치욕적인 언사까지 들으면서 참으실 겁니까?”
“귀염 장로, 지금 나가면 저놈들을 제거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오. 하지만 해남도는 어떻게 빠져나갈 생각이오? 아시겠지만 해남검문은 지독한 놈들이오. 아마 우리가 죽을 때까지 추적을 할 것이고, 우린 먹고 자지도 못하면서 쫓길 것이오.”
혈염구혼의 말에 귀염마도는 입을 닫고 말았다. 몇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다 이제야 겨우 활동하기 시작한 상황에서 이런 식으로 값어치 없는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때 다시 하유청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제 다시 하선을 시작한다. 상인들과 양민들은 배에서 내리고, 모두가 내리면 배는 즉시 광동으로 다시 출발할 것이다. 배에서 내리지도 말고 보이지도 마라. 그럼 우리도 너희들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것으로 할 것이다.”
하유청의 마지막 말은 혈염구혼을 비롯한 구천마성인이나 혈랑사자를 필두로 한 혈염무에게는 대단히 치욕적인 말이었다.
배에 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가만히 있으면 살려 보내 주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대로 뛰어나가 모조리 죽이고 배를 탈취해 해남도를 벗어나는 생각도 할 만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미 악불군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악불군이 해남검문을 돕는다면 그것 역시 여의치 않을 것이 분명했다.
“하선하라!”
결국 그들은 하유청이 다시 하선을 명할 때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신녀님의 생각이 맞았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찰단이나 구천마성의 인물들이 한 명도 내리지 않고 배가 떠나자, 장철은 매우 기쁜 얼굴로 담수련에게 포권을 하며 말했다.
지금 천하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육지에서 뚝 떨어져 있는 해남도는 상대적으로 아주 평온한 편이었다.
그런데 오늘 만약 어찰단이나 구천마성과 싸움이 벌어졌다면, 그들이 이기건 지건 해남도 역시 혼란의 와중에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구천마성은 원나라의 압박에 지하로 숨기 전까지 해남검문을 심하게 압박했었다. 이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이번 싸움은 그들에게 해남도를 공격할 명분을 안겨 줄 수도 있었다.
“저들이 이렇게 조용히 물러난 것은 그만큼 해남검문의 강함을 알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사부님, 제가 악 대협과 신녀님께 본 문에서 머무는 게 어떠신지 여쭸습니다.”
듣고 있던 하유청이 슬쩍 끼어들자 장철이 아주 잘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해남도에 계신 동안 두 분께서 본 문에 머무신다면 저희가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악 대협의 명성이 지금 한창 높아지고 있는 것은 나도 알지만, 해남검문이 저렇게 쉽게 마음을 여는 자들이 아닌데…… 아주 특이하지 않냐?]
장철의 안내를 받으며 사라지는 악불군과 담수련의 모습을 보며 마진우가 의아하다는 듯 구여풍에게 말했다.
[우리가 그동안 맡은 살행 중에 악 대협만큼 강한 자가 없었을까?]
[있었지. 특히 혈해사계의 혈해 오귀를 암살할 때 백인막 특급 살수가 열 명, 일급 살수가 이십 명이나 갔어. 그때 육 호, 칠 호, 십 호, 십이 호가 죽었고 일급 살수는 전멸했지.]
[백인막 최대의 실패였지. 사 호, 너도 죽을 뻔했잖아?]
[그런데 생각하기도 싫은 그 얘기는 왜 해?]
[솔직히 너무 무리한 청부였지만 우리가 살행을 포기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악 대협은 혈해 오귀보다 더 무서운 상대는 아니었음에도 포기했고, 오히려 우리의 후견인으로 삼자고 막주님께 청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냐?]
구여풍의 말에 마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구여풍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그런 결정을 한 것이 굉장히 특이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주 특이하네. 내가 죽는 것이 두려워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야.]
[그래 그거야! 저분 굉장히 특이한 분위기를 풍겨. 해남검문 역시 저분에게서 풍겨 나오는 뭔가에 매료된 것은 아닌가 싶다.]
마진우와 구여풍은 담수련의 뒤에서 거의 완벽하게 그녀를 호위하며 움직이고 있는 악불군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그렇고, 악 대협의 담 소저에 대한 호위는 너무 도가 지나친 것 같지 않아?]
[그러게? 여기 노릴 자가 어디 있다고 잠시도 경계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 역시 참 특이해.]
* * *
“하하하! 아주 통쾌하구먼. 어찰단과 구천마성이 본 문의 외침 한마디에 해남도에 발도 딛지 못하고 돌아간 것은, 우리 해남검문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천하에 각인시킨 셈이지.”
남해 보루문의 문주인 차운명은 보고를 받자 기분이 아주 좋은 듯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모두 천상신녀 여협의 조언 덕분이었습니다.”
장철의 말에 차운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담수련을 보며 다시 말했다.
“두 분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감히 해남도에 발을 디딘 것도 모를 뻔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천상신녀께서는 어느 문파 출신이신지?”
“전 특별한 문파는 없어요. 무공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고요.”
“그럼 두 분 사이는?”
‘우리 사이?’
차운명의 질문에 담수련이 갑자기 입을 닫았다.
그동안 악불군과 계속 붙어 있으면서 가장 의지하는 그였지만, 막상 어떤 사이냐고 묻자 스스로도 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악불군은 분명 자신이 모시는 아가씨라며 자신이 호위 무사라는 사실을 강조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악불군을 자신의 호위 무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어쩌면 담무룡 때문에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가장 믿고 의지하는 오빠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문제는 지금은 오빠라는 생각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를 한 번에 설명할 합당한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다.
“제가 모시는 분입니다. 전 아가씨의 호위 무사이지요.”
담수련이 말을 하지 않자 악불군이 급히 끼어들었다.
‘하여간에 내가 생각한 것하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답하네…….’
“악 대협께서 신녀 여협의 호위 무사라고요?”
듣고 있던 남해 보루문의 간부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짜 호위 무사라는 의미가 아니라, 제가 무공이 약해서 악 대협께서 저를 보호해 주시고 계십니다. 저로서는 너무 감사할 뿐이지요.”
결국 담수련이 무마를 시도했다.
“하하하! 그러셨군요? 악 대협 같이 떠오르는 신성이 호위 무사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해남도에는 어쩐 일로 오신 것인지?”
담수련은 드디어 본론을 말할 때가 됐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제가 의술을 좀 알아요. 그런데 상당히 위중한 환자분이 계신데 꼭 필요한 약초가 해남도에 있다고 해서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러시더군요. 해남도에서 무언가를 가지고 밖으로 나가려면 해남검문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요. 그래서 문주님께 부탁을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해남도에 그런 약초가 있습니까? 사람을 구하기 위한 약초라면 당연히 허가해 드려야지요. 그런데 어떤 약초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빙설초라는 약초입니다.”
“빙설초요?”
차운명은 반문하며 장철을 쳐다보았다. 들은 적이 있냐는 표정이었다.
“제가 해남도에서 나는 약초나 해산물 등 거의 모든 특산품은 다 안다고 자부하는데, 빙설초는 처음 들어봅니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데?”
둘의 대화는 악불군과 담수련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해남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해남검문의 한 축인 남해 보루문의 문주가 모른다면, 진짜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둘의 대화나 표정으로 미루어 거짓을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인가요?”
담수련이 약간 실망한 목소리로 묻자 차운명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본 도에서 나는 모든 특산품에 대한 목록은 현 해남검문의 대표인 남해영웅문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가 모르는 것도 다 있을 것이니 제가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이번 일로 본 문이 큰 도움을 받았는데, 그 정도야 당연히 해 드려야지요.”
* * *
포구는 이미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선원들은?”
포구에 도착한 해우회 회주 엄기덕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이불을 덮고 있는 배의 선장을 만나자 가장 먼저 선원들의 안전부터 물었다.
“다행히 몇 명만 다치고 나머지는 무사합니다.”
“휴우! 다행이구나.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아냈느냐?”
“예, 해남도에 도착해서…….”
선장은 해남도 포구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아주 위험한 항해를 했구나. 그런데 오는 도중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어찰단과 구천마성이 서로의 정체를 알자마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선장의 말에 엄기덕은 상황 파악이 즉시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마도이지만 중원 문파인 구천마성과 원나라의 무림 감시 기구인 어찰단은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거기다 혈염구혼을 비롯한 장로들은 하찮은 해남파에 치욕을 당한 일로 인해 대단히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것은 혈랑사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배에 다른 손님은 전혀 없으니, 둘의 충돌은 어쩌면 예정된 것일지도 몰랐다.
물론 담수련이 거기까지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싸움은 어떻게 됐느냐?”
“엄청난 고수들이었습니다. 저희는 안전한 곳으로 몸을 피하느라 누가 이기고 졌는지조차 보지 못했습니다.”
“안에 올라간 아이들 말로는 살아 있는 자들이 없다고 하던데?”
“아닙니다. 분명 살아 있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구가 가까워지자 몸을 날려 사라졌습니다.”
“알았다. 정말 수고 많았다. 가서 쉬거라.”
‘결국 여기까지 천하의 혼란이 덮쳐오는 것인가……?’
선장이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뜨자 엄기덕은 심각한 표정을 한 채 중얼거렸다.
* * *
아침 식사를 마친 악불군과 담수련은 차운명으로부터 같이 차를 마시자는 초대를 받았다.
대나무 정자에 마련된 다과정은 아주 정갈했다.
“차향이 정말 좋네요?”
담수련은 차를 들고 향기를 한번 맡더니 감탄한 듯 말했다.
“해남도에서만 나는 해남차입니다. 냄새는 좋은데 맛은 중원의 차에 비해 좀 진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어디를 가나 각 지역의 특성이 있는 법이지요.”
“두 분께서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해남검문은 아주 호전적인 문파입니다. 무공 역시 대부분이 실전적인 무공위주이지요.”
“들은 바 있습니다.”
“해남검문이 서른여섯 문파의 연합 세력이란 것도 아십니까?”
“예.”
“처음 해남검문을 창시하신 해룡왕 조사께서는 서른여섯 명의 제자에게 각기 문파를 창시하게 한 후, 오 년에 한 번 비무를 통해 총 문주를 뽑으라고 하셨습니다. 경쟁이 없는 문파는 결국 도태된다는 지론이셨지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여러 비무들을 여기서는 인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호전적이라는 소문이 붙은 것이지요.”
“그랬군요?”
“악 대협의 명성이 광동을 넘어 해남도까지 울리고 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그래서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무슨 부탁이신지?”
“제 제자들과 비무를 한번 해 주십시오.”
“비무요?”
악불군은 생각지도 않은 제안에 놀라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