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15화>
115화. 문파깨기(1)
“저희 해남검파는 섬에 갇혀 있다 보니 실제 저희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어, 외부의 무림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문파깨기라는 파격적인 비무까지 인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것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전 약초를 구하기 위해 온 것이지, 해남검문과 무공을 비교하기 위해 온 것이…….”
악불군이 거절하려는 순간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그래요. 문주님께서 이렇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는데 거절을 한다면 예의가 아니겠지요. 안 그래요, 악 대협?”
“예, 저도 해남검문과 비무를 하려고 온 것은 아니지만 문주님의 부탁이시니 들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하에서 악불군이 자신의 마음을 전광석화처럼 바꾸게 할 수 있는 단 한 사람.
담수련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비무는 어떤 식으로 하나요?”
“해남검문은 실전 비무만 합니다.”
실전 비무는 진검을 들고 진짜 실전처럼 하는 비무로, 약간의 실수로 상대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었다.
“좀 위험하지 않을까요?”
“위험하긴 하지만 그걸로 원한을 품거나 하는 일은 해남검문에는 없습니다.”
“좋아요. 그럼 말 나온 김에 당장 하지요. 저희도 따로 알아볼 것이 좀 있으니까요.”
‘어쩌시려고 자꾸 저러시나?’
악불군은 담수련이 너무 적극적으로 나서자 약간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새편작은 그녀에게 되도록 깊은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 * *
“소가주님, 해남도에서 배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철룡단 단주 여민웅을 새벽 배로 떠나보내고 마땅치 않은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철무정은, 흑살마검의 보고에 고개를 돌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배가 들어올 시간이 아니잖아?”
“두 시진이나 일찍 온 것입니다. 그런데 배가 엄청 부서지고, 배 안이 완전 시체와 피로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왜?”
“배 안에서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은 확실한데, 아직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지금 이곳 선원들의 모임인 해우회에서 출입을 막고 조사 중이라고 합니다.”
“싸움이라……?”
잠시 생각하던 철무정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담수련이나 악불군이 있을지 모르니 조사해야겠다.”
* * *
악불군이 해남도에 있는 동안 중원에는 또 다른 혼란의 태풍이 서쪽에서부터 불어오기 시작했다.
마룡세가에 밀려 거의 존재감도 없이 조용하던 혈해사계가, 갑자기 중원 무림의 정기를 살린다며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사파의 절대자로서 악과 피로 점철했던 혈해사계의 무림 정기 운운은 모든 사람이 코웃음을 칠 일이었지만, 그 파급력은 만만치 않았다.
감숙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마룡세가의 열두 개 지가가 하룻밤 사이에 멸문한 것이었다.
쾅!
마룡세가의 가주인 사도중명은 극도의 분노를 견디지 못하고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가주의 대노에 주눅이 든 간부들은 머리를 조아릴 뿐이었다.
“가주님, 이미 감숙의 반을 잃었습니다. 빨리 반격을 시작해야 합니다.”
군사인 조도욱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다.
“조 군사!”
“예!”
“넌 군사라는 놈이 혈해사계의 기습에 대해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냐!”
“저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혈해사계를 없애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조도욱의 말에 사도중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지로 조도욱은 혈해사계를 없애지 않으면 분명 뒤통수를 맞을 것이라고 경고해 왔다.
“이이익!”
사도중명은 그의 말에 분노에 찬 침음성을 터뜨렸다.
그 역시 몇 번이나 혈해사계를 없애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서는 힘에 부쳤다.
때문에 제룡회가 모일 때마다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혈해사계와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오룡세가는 마룡세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이 내세운 이유는 대공의 허락부터 받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혈해사계는 당시 무림을 지배하던 사대 절대 세력 중 유일하게 원나라에 협조적인 곳이었기에, 대공은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더욱이 혈해사계는 최대한 납작 엎드려 원나라의 비위를 거스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이 원나라가 흔들리자 단숨에 뒤통수를 친 것이다. 거기다 예전보다 더욱 강한 전력이었다. 치욕을 견뎌 가며 암중으로 세력을 키워 온 것이다.
“조 군사.”
“예!”
“그래, 네 말대로 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혈해사계를 없앨 계획을 마련해라.”
“존명!”
“모두 나가고 천독마의는 기다려라.”
전부 나가자 사도중명은 염소수염을 기른 노인을 보며 물었다.
“비류는 어떻게 됐느냐?”
“상처가 너무 깊습니다. 예전처럼 완치되려면 여섯 달은 족히 걸릴 것 같습니다.”
사도중명의 안면 근육이 꿈틀했다.
“혈독불사마공을 시전해라.”
“예?”
“혈독불사마공을 시전하라고 했다.”
“가주님, 혈독불사마공은 미완성의 무공입니다. 소가주님께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혈독불사마공은 육백 년 전 중원 무림을 피로 물들였던, 금지된 마교의 마공이었다.
마룡세가에서는 감숙의 절대자가 된 후, 전설로 회자되는 마교의 총단이 있는 십만대산을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결국 십만대산은 찾지 못했지만 마교의 무공이 숨겨져 있던 동굴을 찾아냈다.
대부분의 마경은 상당히 훼손이 되었고 마교만의 비문으로 쓰여 있어 해독할 수 없었지만, 혈독마경은 독초와 독물들의 그림을 바탕으로 상당 부분 복원해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혈독불사마공은 부작용이 너무 심했다.
우선 독을 너무 흡취하기 때문에 모습이 대단히 추악하게 변했다. 당연히 여인을 가까이 할 수 없었고, 더욱 큰 문제는 마공이 점점 완성이 될수록 이지를 상실해 간다는 점이었다.
“일개 호위 무사 놈에게 당했다. 이대로 깨어나면 세상의 조롱밖에 당할 것이 없다. 내 아들이라면 당한 것은 반드시 갚아 주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 편이 본가를 위한 최고의 무기가 되는 것이니 그 아이에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사도중명은 놀랍게도 자신의 아들까지도 소모품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음 대 세가를 이끄실 소가주님이십니다.”
“비류는 태생이 지는 것을 싫어했다. 강해진다면 받아들일 게다. 그리고 내겐 아직 아들이 다섯이 더 있다. 다음 대는 그놈들 중에서 고르면 된다.”
지독히도 차가운 사도중명의 말에, 천독마의는 고개만 조아릴 뿐이었다.
악불군을 노리는 괴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 *
악불군의 첫 비무 상대는 하유청이었다.
그가 자원했기 때문이었다.
“악 대협께 한 수 배우겠습니다.”
“한 수라니요? 제가 나이도 어리고 후배입니다. 배운다면 당연히 제가 배우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먼저 말씀드리지요. 저희 해남검문의 검은 대부분 쾌검입니다. 그리고 시작은 발검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뜻밖에도 자신의 무공의 특징을 먼저 말한 하유청은, 허리를 낮추고 가장 빠르게 튀어 나갈 수 있는 자세를 취했다.
악불군은 검을 빼 들고는 정면으로 세웠다. 검이나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기본적인 기수식이었다.
반 각 정도 시간이 흘렀다.
차운명을 비롯해 모두는 비무를 통해 뭔가를 배우겠다는 듯 잠시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반각이 넘기 시작하자 모두의 얼굴에 의아함이 나타났다.
하유청은 일대 제자 중 가장 강한 축에 들었다.
특히 속전속결을 좋아해서 제자들 간 비무를 할 때 가장 빨리 승부를 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가 반각이 지나도록 공격을 안 한다는 것이 그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공격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고 있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는 하유청의 얼굴을 본 차운명은 불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분명 해남도는 매우 더운 지역이었다. 하지만 하유청 같은 고수가, 초식을 나누기도 전부터 땀을 흘린다는 것은 비정상적이었다.
하유청의 얼굴에 흐르는 땀이 점점 심해지자, 그제야 다른 제자들도 뭔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다.
“이얍!”
점점 심해지는 압력을 더 이상 견디다가는 비무다운 비무는 해 보지도 못하고 쓰러질 것 같자, 하유청은 젖 먹던 힘까지 끌어올리며 공격을 시도했다.
그의 말대로 발검부터 악불군의 몸까지 다가오는데 걸린 시간은 진짜 찰나였다.
“저놈이 언제 저렇게 늘었지?”
하유청의 사부인 장철의 입에서 감탄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제자였지만 이렇게 빠른 공격을 펼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나타난 광경은 또 다른 의미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 이게…….”
하유청은 너무 놀란 듯 말까지 더듬었다.
해남도의 검은 중원의 검보다 반 자 이상 길었다. 그에 반해 악불군의 검은 보편적인 검보다 짧았다.
변화를 꽤하는 방식의 비무라면 검이 짧다 하여 반드시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서로 찔러 가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긴 검이 유리했다.
그러나 하유청의 검은 악불군의 목을 간발의 차이로 비껴갔고, 악불군의 검은 하유청의 목젖에 딱 걸려 있었다.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던 하유청은 검을 거두며 포권을 했다.
“악 대협께서 사정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하유청이 물러나자 또 한 청년이 연무장에 뛰어들었다.
“남해 보루문 일대제자 금사력이라고 합니다. 악 대협께 다시 한번 가르침을 부탁하겠습니다.”
그는 남해 보루문에서 해남검문의 총문주를 정하는 비무 대회에 나가기 위해 준비 중인, 최고수 중 한 명이었다.
“사력아! 어찌 허락도 받지 않고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 것이냐? 악 대협, 저놈이 한 수 배우고 싶은 열망에 큰 결례를 한 것 같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차운명의 질책에 금사력은 급히 악불군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계속 자신보다 약한 상대하고만 비무를 하다 악불군의 무공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왔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제가 비무를 하기로 약속을 했는데 무슨 무례가 되겠습니까?”
말을 마친 악불군은 포권을 하더니 아까와 똑같은 자세를 취했다.
“제가 감히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상당히 거칠게 공격을 해도 되겠습니까?”
“실전 비무이니 당연히 그러셔도 됩니다.”
악불군의 말이 떨어지자 금사력은 검을 들어 비스듬히 눕혔다.
‘시간을 끌면 안 돼.’
금사력은 하유청이 허점을 노리다가 심력에서 밀려 오히려 제대로 된 공격도 못하고 당했다고 판단하고는, 행운파의 수법으로 악불군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바다의 파도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는 행운파는 상대의 공격을 교묘하게 피하는 보법으로, 해남검문의 모든 문파가 익히는 절기였다.
악불군의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차운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분명 똑바로 서 있는 것 같은 악불군의 신형이 그의 눈에 여러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지금 허상을 보나?’
초절정 고수인 남해삼십육검의 한 명답게 초절정의 안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껌벅일 정도였다.
하나 그것도 잠시, 순간 금사력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금사력은 시작부터 남해 보루문의 최고 절기 척파십팔검을 펼쳤다.
검은 거대한 파도가 덮치듯 물결을 이루며 악불군을 향해 덮쳐 갔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 뭔가 번쩍했다.
그것은 마치 거친 파도를 단번에 뚫어 버리는 벼락을 보는 듯했다. 악불군이 계속 수련을 하면서도 완벽한 오의를 깨치지 못하던 섬(閃)이었다.
다섯 걸음이나 뒤로 밀려 간 금사력은 하얘진 얼굴로 검을 거두며 말했다.
“악 대협의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의 안목이 넓히는 커다란 경험을 하게 해 주신 점 또한 감사드립니다.”
짝! 짝! 짝! 짝!
차운명이 일어서며 박수를 치더니 모두에게 소리쳤다.
“오늘 큰 배움이 있었기를 바란다. 귀중한 가르침을 주신 악 대협께 감사의 인사를 드려라.”
“악 대협께 감사드립니다!”
연무장을 둘러싸고 있던 제자들은 차운명의 말이 끝나자 포권을 하며 크게 외쳤다.
‘정말 멋있어……. 이대로만 가면, 내가 죽는다 해도 소군은 무림의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단번에 남해 보루문의 경탄과 존경을 획득하는 악불군을 보며, 담수련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할 따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