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16화 (116/472)

<천검지애 116화>

116화. 문파깨기(2)

비무 후, 악불군과 담수련은 완전한 귀빈이 되어 있었다.

객방도 문주들이 왔을 때나 열린다는 귀빈청에 준비가 되었고, 음식도 말 그대로 산해진미가 나와 악불군과 담수련이 오히려 곤란해할 정도였다.

“아가씨 말씀을 따르기를 아주 잘한 것 같습니다.”

“예전에 아버님께서 그러셨어. 무림인들은 강함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그런데 소군이 비무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줘서 인정을 넘어 이런 존경까지 받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더구나 우리만의 인맥까지 만들었잖아?”

“예, 역시 아가씨의 말만 따르면 모든 것이 술술 풀리는 것 같습니다.”

악불군의 칭찬에 담수련은 기분이 좋은 듯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모습이 또 예쁜지 악불군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걸렸다.

“참! 소군, 비무할 때 마지막 수법, 혹시 배 타고 오면서 깨달음 얻어서 펼친 거 아니야?”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의 눈이 커졌다.

“아가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것까지 눈치채셨습니까?”

그러자 담수련의 턱이 조금 더 올라갔다.

“피! 난 소군에 대해 모르는 거 없거든!”

“정말 아가씨는 저보다 저를 더 잘 아시는 것 같습니다.”

순간 담수련이 미묘한 눈으로 악불군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악불군의 얼굴에 당황함이 스쳤다. 자신이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

“……!”

둘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둘은 동시에 입을 닫았다. 가슴이 거침없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가슴 떨림, 또 시작이야…….’

담수련은 얼굴이 뜨거워짐을 느꼈지만 이번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악불군의 눈을 또렷이 주시했다.

‘내가 왜 이러지? 아가씨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네…….’

악불군은 그녀의 눈을 보면 볼수록 가슴이 두근거리자 고개를 살짝 돌렸다.

“왜 눈을 피해?”

“제, 제가요? 하하! 제가 왜 아가씨 눈을 피하겠습니까?”

“지금 나를 똑바로 못 보고 있잖아?”

답이 궁해진 악불군은 급히 화제를 돌렸다.

“우리가 크게 도와준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대접이 너무 융숭한 것 같아 좀 불편하지 않습니까?”

“왜 말을 돌려?”

“하하! 제가 감히 어떻게 말을 돌리겠습니까? 다만 의아해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생전 하지도 않던 헛웃음까지 보이자 담수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

‘문제?’

악불군은 뭐가 문제인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이상한 불안감을 느꼈다.

“예, 그럼 그 문제는 다음에 다시…….”

“무슨 문제인지는 알아?”

“예?”

“그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며? 그럼 어떤 문제인지 알 것 아냐?”

분명 화제가 바뀔 것 같았는데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자 악불군은 어색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아가씨.”

“왜?”

“혹시 제가 실수한 것이라도…….”

“몰라!”

‘빨리 빙설초를 찾아야겠어. 아가씨의 성정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것 같아.’

방금까지 즐거워 하다가 갑자기 삐치는 담수련의 변화에, 악불군은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른 소리만 하는 자신 때문임을 전혀 감지 못하고 악불군은 오음절맥에서 오는 부작용으로 판단하고 있었으니……

“아가씨, 이거 드셔 보십시오.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인데 맛이 아주 좋습니다.”

악불군은 그녀가 입술을 내밀고 있자, 조심스럽게 해산물 요리 하나를 그녀 앞으로 밀며 말했다.

“배불러.”

“그래도 빙설초를 찾으려면 많이 돌아다녀야 할지도 모르는데 배는 좀 채워 두시는 것이…….”

담수련은 악불군을 슬쩍 보더니 표정을 풀었다. 사실 그녀도 왜 자신이 삐쳤는지 모르고 있었으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든 것이다.

“해남검문이 왜 우리에게 이렇게 잘하나 의아하다고 했지?”

악불군은 그녀가 드디어 화제를 바꾸자 급히 맞장구를 쳤다.

“솔직히 우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데 이렇게까지 대우해 주니, 의아하기는 하지요.”

“아버님께서 말하시기를 무림 세력이 잘해 줄 때는 이용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하셨어. 아마 소군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으니까 이러는 걸 거야. 물론 우리가 쓸모가 없다고 판단되면 대접은 순식간에 변하겠지.”

“그렇겠지요?”

“응, 그리고 소군은 나한테 정말 잘해 주고 있어. 실수한 것 없으니까 걱정 마. 그리고 괜히 투정 부려서 미안해.”

“아닙니다. 전 아가씨께서 이러실 때 제일 귀엽…….”

그녀가 풀리자 기분이 좋아진 악불군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하다가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왜 계속 말 안 해?”

담수련은 악불군이 ‘귀엽’까지 하고 입을 닫자 계속 말하라는 듯 눈짓을 하며 말했다.

“누가 오고 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그들의 방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악 대협.”

잠시 후, 밖에서 장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십시오.”

악불군이 문을 열자 장철은 담수련에게 포권을 하고는 죄송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식사 중이신데 제가 방해를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아니에요. 다 먹었습니다.”

“그럼 다행입니다. 문주님께서 두 분을 모셔 오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런 건 아니고 남해영웅문에서 연락이 온 모양입니다.”

“혹시…… 빙설초에 대한 소식인가요?”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총문주님께서 남해영웅문으로 직접 오실 수 있냐고 연락이 왔다 하니, 빙설초에 대해 뭔가 아시는 것이 있으니 초대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순간 악불군과 담수련의 얼굴이 밝아졌다.

남해 보루문에 비치된 해남도의 지도를 보고는 상당히 곤혹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생각 외로 해남도가 대단히 커서였다.

“그럼 당연히 가야지요.”

* * *

오늘도 포구의 부둣가를 살피던 하유청은 또다시 배에 노란 깃발이 보이자 검미를 찌푸렸다.

“뭐야? 이틀 연속 왜 이러는 거야?”

잠시 후 배가 포구에 정박하자, 언제나처럼 선원 몇 명이 다리를 포구에 대더니 하유청에게 급히 달려왔다.

“하 대협!”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일인가?”

“무림인이 탔습니다.”

“무림인이 탄 것이 처음이더냐? 어제도 무림인이 탔었다.”

“그, 그게 아닙니다. 최소한 오십 명이 넘어 보이는데, 마치 전쟁이라도 할 것처럼 살벌합니다.”

“어디 소속인지는 알겠느냐?”

“모르겠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복색이었습니다. 그런데 보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고수였습니다.”

“길 사제!”

“예, 사형.”

“빨리 가서 또 무림인들이 들어왔다고 사부님께 보고해라.”

“또입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지요?”

“난들 알겠느냐? 근래 이런 적이 없는데, 오는 자들이 심상치 않다고 하니 준비는 하는 것이 좋겠지. 빨리 가라.”

“예!”

길혁규가 급히 사라지고, 하유청이 손을 들어 뭔가 손짓을 하자 제자들이 검을 빼 들고는 일렬로 포구 앞에 섰다.

‘또 어떤 놈들이기에 사색이 된 걸까?’

하유청은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해남도를 오가는 배의 선원들은 대부분 해남검파에서 약간이라도 무공을 배운 자들이었다. 특히 그에게 달려온 선원은 거의 일류급의 무공을 지닌 자였다.

그런 그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라고 한다면 대단한 고수임이 분명했다.

드디어 손님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긴장한 표정으로 주시하던 하유청은, 커다란 외투를 걸치고 수십 명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여민웅을 보자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지기 시작했다.

척 보기에도 그가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아니었다. 더욱이 그를 호위하고 있는 수십 명의 무인들 역시 제자들이 상대하기는 무리로 보였다.

하지만 적이 강해 보인다고 피하는 것은 해남검문이 아니었다.

하유청은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나는 해남검문의 하유청이라고 합니다. 해남도는 무림인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을 불허(不許)합니다. 어디서 오신 분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배를 타고 돌아가셔야겠습니다.”

“떼를 지어? 지금 내게 말한 것이냐?”

여민웅은 중원의 거대 문파들도 모두 제압한 원나라의 귀족 출신이었고 철룡세가에서도 최고위직이었다. 더욱이 그는 태양천 출신이었다.

그런 그에게 해남검문은 눈에 낀 눈곱만큼이나 하찮은 것일 뿐이었다.

챙! 챙! 챙……!

여민웅의 반응을 본 제자들은 즉시 검을 뽑았다.

“해남도는 해남검문이 다스립니다. 우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다면 죽음뿐입니다.”

하유청의 외침에 여민웅의 입가에 살소가 그려졌다.

“손톱에 낀 때보다 못한 놈이 약간의 잔재주만을 믿고 감히 내 앞에서 위세를 떨다니, 너야말로 죽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구나!”

여민웅은 조용히 말했지만 포구 전체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심지어 단지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기에 주위의 물건들이 흔들리고 땅에서는 먼지들이 날릴 정도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주위에 있던 상인들과 선부들은 다급히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다가는 억울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여민웅의 몸에서 뿜어지는 압력을 직접 받고 있던 하유청의 얼굴이 탈색되어 갔다.

‘사부님께서 빨리 오셔야 하는데…….’

하유청은 입술이 바짝 말라가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들이 공격을 한다면 그들은 모두 전멸할 것이 분명했다.

* * *

“제가 빙설초에 대해 문의하면서 악 대협과 천상신녀 여협에 대해 말씀을 드렸더니, 남해 영웅문에 한번 들러 주셨으면 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해남도는 평생에 한번 들르기도 어려운 오지입니다. 이왕 오신 김에 총문주님도 만나 뵙고 친분을 쌓아 두시면 여러모로 좋을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다만 지금 빙설초를 구하는 일이 시간을 다투는 일이…….”

[소군, 왜 자꾸 거절만 해? 간다고 그래.]

“……이긴 하지만, 해남도까지 와서 해남검문의 총문주를 안 뵙고 가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악불군은 빙설초를 찾는 일이 가장 급선무이건만 담수련은 전혀 아닌 듯했다. 그리고 담수련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악불군은 즉시 말을 바꿨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번 내 뱉은 말을 절대적으로 지키고 말을 바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그였지만, 담수련의 말은 자신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였다.

“제가 이미 해남도에서 나는 약초에 대한 목록도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고, 어차피 해남도에 관한한 모든 것을 안다고 할 수 있는 분이 남해 영웅문에 계시니, 가시면 분명 빙설초를 찾는 데 도움을 받으실 겁니다.”

“문주님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을 것입니다.”

차운명은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들었다는 듯 커다랗게 파안대소를 하며 말했다.

“하하하! 악 대협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분이 아주 좋습니다. 해남검문이 비록 남해의 끝에 붙어 있는 오지이긴 하지만 한번 친분을 맺으면 끝까지 가는 의리가 있습니다. 저는 악 대협과 저희의 이런 우의를 오랫동안 이어 갔으면 합니다.”

“당연합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연락을 주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한 도울 것입니다.”

고수와 친분이 많은 문파는 저절로 그 위상이 올라간다. 차운명은 악불군이 지금은 홀홀단신에 가깝지만 후일 대단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해남검문에 분명 도움이 될 게야.’

차운명은 만족한 미소를 지며 말했다.

“차가 식습니다. 빨리 드십시오.”

그때였다.

금사력이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문주님!”

“무슨 일이냐?”

“포구를 지키는 길 사제가 다급하게 달려왔습니다.”

“포구에 또 일이 벌어진 것이냐?”

“오늘 광동에서 배가 들어왔는데, 대단한 무림인들이 대거 들어온 모양입니다. 하 사형께서 급히 원군을 청해 왔습니다.”

차운명과 장철의 표정이 굳어졌다.

중원이 하루도 편할 날이 없다고 하지만 해남도만은 그 혼란에서 벗어나 있었다.

총문주의 명으로 거의 삼십 년 넘게 해남검문이 육지에 발을 디디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틀 연속, 대규모의 무림인 난입이라니……

“장 장로가 가 보셔야겠소이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력이는 제자들 백 명을 빨리 준비시켜라.”

“예!”

금사력이 급히 사라지자 담수련이 악불군의 팔을 툭 치며 전음을 보냈다.

[소군, 아무리 봐도 우리가 사달인 것 같아. 도와주겠다고 말씀드려.]

“문주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가서 도와도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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