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18화 (118/472)

<천검지애 118화>

118화. 전투(2)

하나, 둘…….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마주한 악불군의 신형의 수가 여러 개로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놈이 설마 분신술을?’

그가 아는 분신술은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첫 번째는 환진(幻陣)이었다.

환진은 환각을 유도하는 진으로 그 안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환영에 시달리게 되는데, 그중 하나가 사람을 여럿으로 나눠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이형환위나 금강부동신법 같은 전설의 보법을 이용해 신형을 눈으로 볼 수도 없을 만큼 빨리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상대로 하여금 여러 명으로 바뀐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실지로 본 사람은 없는 말 그대로 전설의 수법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진의 안이 아니었고, 악불군이 펼치는 보법은 절대 전설의 보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또 한 가지 분신술이 있다는 것은 몰랐다. 바로 배교의 사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좋아. 몇 명이고 상관없다. 모두 죽인다!’

여민웅은 분신술로 만들어진 악불군의 속도가 현저히 느리고 공격 역시 약화되었음을 느꼈다.

분신술을 사용함으로써 상대를 혼란케 할 수는 있었지만, 능력이 분산되면서 하나하나는 오히려 약해진 것이다.

여민웅 같은 초절정 고수에게는 상대하기가 더 편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쾅!

콰쾅!

여민웅은 다섯으로 변한 악불군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분명 넷은 허상이고 하나만이 실상일 것이었다.

그리고 분신된 허상들은 그의 공격을 제대로 받아 내지 못하고 그의 일장에 그대로 사라졌다.

“네놈이구나!”

여민웅은 드디어 마지막 하나 남은 악불군에게 최후절초를 펼쳐 나갔다. 마지막 남은 그가 실제 악불군이라는 확신에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펑!

그의 장은 악불군의 가슴을 뚫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허상이었다.

그는 급히 방어 형태로 수법을 바꾸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한순간의 판단 착오에 의한 방심은 생사투에서 독이었다.

거기다 상대는 천륭검보를 익힌 악불군이었다.

“대단한 무공입니다.”

“크윽!”

몸을 돌리는 순간 바로 앞에 서 있는 악불군을 보자 여민웅은 급히 장을 뻗었다. 공격과 방어를 겸비하는 일수였다.

분명 대단히 빠른 반사 신경이었고 수많은 싸움으로 단련된 임기응변이었지만, 광(光)의 수법으로 뻗친 악불군의 검을 피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천륭검보에는 몇 가지 빠른 수법이 있었다. 내려칠 때의 섬(閃), 내디딜 때 사용하는 신(迅), 그리고 찌를 때의 광(光)이었다.

그중 가장 빠른 것이 광이었다.

광을 시전할 기회만 포착된다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수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 나 여민웅이 너 따위 놈에게…… 이……럴 수는 없는데…….”

여민웅은 자신의 가슴에 깊숙이 박힌 악불군의 검을 양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자신이 당했다는 사실이, 가슴에 검이 박힌 상황에서도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단주님!”

장철을 보호하는 금사력과 싸우고 있던 홍유철은 여민웅이 당하자 대경한 듯 소리치며 악불군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여민웅과 싸우면서 또 한 번 무공이 늘어 난 악불군은 아무렇지 않게 홍유철이 달려오는 방향을 향해 장을 뻗었다.

펑!

여민웅의 장보다는 위력이 약했지만 그것은 분명 마혼구폭이었다.

홍유철은 악불군의 장에 의해 그대로 튕겨나갔다. 그리고 떨어지는 그를 금사력이 놓치지 않고 달려가 검을 등에 박아 넣었다.

여민웅과 홍유철의 죽음으로 사기가 완전히 떨어져 버린 철룡단은 급속하게 전력이 약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이라도 치겠건만, 이곳은 절해고도인 해남도였다.

그 순간, 모두를 경악하게 할 상황이 벌어졌다.

누군가의 눈짓을 신호로 이십 명이 넘는 자들이 동시에 자신의 목을 자신의 검으로 그어 버린 것이다.

그것을 본 악불군의 얼굴이 침중하게 변했다.

패할 것 같다고 스스로 자살을 하게 만드는 조직이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금사력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장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몸에 입은 내상으로 인한 고통보다 사방에 시체로 변해 누워 있는 제자들의 죽음에 더욱 괴로웠다.

죽고 다친 사질과 제자가 수십 명이었다. 해남검문 사상 해남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는 최악으로 기록될 참사였다.

혈겁만이 아니었다.

여민웅의 장에 의해 포구는 대파됐고 주위 땅들도 곳곳이 심하게 파여, 다시 제 구실을 하려면 며칠은 걸릴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재정 상황이 열악한 해남도로서는 무림인들의 싸움으로 양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도 큰 문제였다.

“장로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입가에 묻은 피까지 닦는 것을 잊은 듯 주위를 보며 울분을 참고 있던 장철은, 악불군이 무거운 표정으로 다가와 묻자 허리까지 숙이며 포권을 했다.

자신보다 어리고 배분도 낮은 악불군에게 최고의 공경을 보낸 것이다.

“장로님,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오늘 악 대협께서 안 계셨다면 아마도 본 문은 크나큰 혈겁에 빠졌을 것입니다. 오늘 본 문은 악 대협께 구명지은과 함께 본 문까지 지켜 주신 최대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고작 제 인사 정도는 그 은혜에 비해 약소하다고 생각합니다.”

“구명지은에 저희 전체가 감사드립니다.”

시신을 수습하던 다른 제자들도 악불군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똑같이 허리를 숙이며 포권을 했다.

‘아! 영웅. 나의 소군이 영웅이 되어 가고 있어.’

전장에 떨어져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담수련이 감격에 차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살짝 어려 바다의 햇빛에 반짝거리고 있었다.

* * *

“소군, 아까 나 울었다.”

남해 보루문에 돌아온 악불군과 담수련은 우선 귀빈청으로 돌아갔다. 너무 많은 제자들이 죽거나 다쳐 그들이 왔다 갔다 하기에는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잠깐 안 본 사이에 담수련이 울었다는 말에 악불군은 깜짝 놀라 물었다.

“우셨다고요? 감히 어떤 자가 우리 아가씨를 울린 겁니까?”

“왜? 때려 주게?”

“당연하지요. 아가씨를 울렸는데 제가 가만 두면 말이 되겠습니까?”

“소군은 절대 못 때려.”

“절대요? 누군데 절대 못 때립니까?”

“날 울린 사람이 소군이거든. 아까 정말 감동했어.”

담수련은 말해 놓고는 악불군이 멍한 표정을 짓자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활짝 미소를 지었다.

“범인이 저라면 저라도 맞아야지요. 어떻게 때려줄까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피! 자기가 자기를 어떻게 때려?”

“이렇게 주먹을 쥐고 그냥 확 때리면 됩니다.”

악불군이 진짜 주먹을 쥐고 자신의 얼굴을 때리려 하자 담수련이 그의 손을 잡으며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나한테 소군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데 소군을 때려? 만약 소군을 때리면 소군이라도 용서 안 할 거야.”

순간 악불군의 검미가 꿈틀했다.

자신의 팔을 잡고 말하는 그녀의 너무 귀여운 모습에 잠시 말을 못했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거 큰일이군. 내가 무공이 너무 비정상적으로 빨리 성장한다 싶더니, 그 부작용인가?’

근래 가슴이 뛰는 증상이 갑자기 잦아지자 악불군은 알게 모르게 불안해졌다. 무엇보다 만약 주화입마라도 걸린다면 담수련을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화입마에 걸리면 최소 불구, 나쁘면 목숨까지 위험하건만 그것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담수련의 보호부터 생각하는 그였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

악불군이 자신을 보면서 답이 없자 담수련이 물었다.

답이 늦는 순간 자신도 이해 못하는 그 문제라는 것을 들고 나올까 걱정이 된 악불군이 급히 답했다.

“소군이 소군을 때렸는데 소군이 중요해서 소군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아가씨의 말이 좀 복잡해서 생각을 했습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좀 복잡하긴 하네. 호호호!”

자신이 말하고도 재미있는지 청아하게 웃던 담수련은, 지금 남해 보루문의 상황을 기억해 내고는 급히 입을 막고는 주위를 살폈다.

“왜 그러십니까?”

“지금 수많은 제자들을 잃고 큰 슬픔에 잠겨 있으실 텐데, 내가 실수로 웃었잖아.”

담수련의 자신의 실수를 크게 통감하는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그 문제 때문에 가슴이 아픕니다. 거기다 오늘 싸운 자들은 변복을 하기는 했지만 철룡세가의 무공을 사용했습니다. 저희를 추격해 온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악불군의 말에 담수련의 표정도 심각하게 변했다.

지금 악불군의 도움으로 적들을 제거했다고 은인이니 하면서 극 공경을 하고 있지만, 만약 그들이 자신들 때문에 해남도로 온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변할지 자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 일어난 참사가 우리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하지?”

잠시 생각하던 악불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이따금 사용하는 방법입니다만…….”

“무슨 방법? 거짓말은 할 수 없으니까, 묻지 않으면 모른 척하는 거?”

“아가씨께서 그것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내가 그랬지! 소군에 대해서 난 모르는 것이 없다고. 어렸을 때부터 내게 거짓은 말하지 않았지만 숨기는 것은 많다는 거 다 알고 있었거든!”

“그건 아닙니다만…… 죄송합니다.”

“나도 소군이 그런 이유는 이해하니까 됐어. 하지만 이 일은 달라. 영웅이 될 사람이 무언가를 숨기다가 다음에 저분들이 알면 배신감을 느낄 수도 있어.”

“그럼 어떻게 할까요?”

“정면 돌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거야. 그리고 솔직하게 진정을 가지고 사과를 해.”

담수련의 말에 악불군은 갈등하는 눈빛을 보였다.

영웅이니 뭐니 하는 것을 떠나 당연히 모든 것을 다 밝히고 상황이 뜻하지 않게 이렇게 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것이 그의 성정상 맞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반드시 구해야 할 빙설초가 있었다.

담수련은 악불군이 무엇을 고민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소군.”

“예.”

“사실대로 말했다가 빙설초를 못 구하게 될까 봐, 그게 걱정돼?”

“제가 있는 한, 못 구할 일은 없습니다. 다만 일이 복잡해져서 늦어질까 걱정은 좀 됩니다.”

악불군은 만약 이 문제로 해남검문이 막는다면 전쟁까지 불사할 생각이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 일은 절대 안 생기니까.”

여러 가지로 꼬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담수련의 머리는, 일이 순리대로 잘 풀릴 거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가씨. 이제 손을 좀 놓아 주셔야겠습니다.”

“손?”

담수련은 조금 전에 악불군이 스스로를 때리는 척하자 그의 손을 잡았었다. 당연하게도 지금까지 손을 놓지 않았고, 아예 다정한 연인처럼 오히려 꼭 잡고 있던 중이었다.

“어머~ 이게 왜 아직도 여기 있지?”

악불군의 말에 자신의 손을 깨달은 담수련은 깜짝 놀라 손을 뺐다.

‘이게 무슨 실수야……. 어떻게 계속 잡고 있으면서도 몰랐을까?’

담수련의 얼굴이 빨개지자 악불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손잡아 주신 것은 저도 좋았습니다. 다만 지금 문주님이 오셔서.”

“소군도 좋았어?”

“예?”

어떻게 말하다 보니 또 이상한 말을 한 것을 느낀 악불군의 얼굴이 곤혹스러워졌다. 다행히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해 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악 대협. 차운명입니다.”

악불군은 재빠르게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거기에는 차운명과 장철 그리고 두 명의 또 다른 장로들이 서 있었다.

악불군은 그들이 너무 공손히 포권을 하자 급히 맞 포권을 하며 말했다.

“문주님께서 어찌 직접 오셨습니까?”

“오늘 악 대협께서 본 문을 큰 위기에서 구해 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감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좀 늦었습니다.”

“별 말씀을요! 당연히 그러셨어야지요. 저도 남해 보루문에 이런 참사가 벌어진 것에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차운명과 두 장로는 악불군이 오늘 싸움에서 이기어검을 사용했다는 것과 초절정 고수를 십 초 만에 제거했다는 말을 듣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비무만으로도 정말 대단하다고 감탄했는데, 그것은 실로 진신절기의 십분지 일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우선 앉으세요. 사실은 제가 문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인사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던 담수련이 모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는 그 와중에도 악불군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과 표정 등을 세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도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미 그들의 눈과 행동에서 악불군에 대한 경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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