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19화 (119/472)

<천검지애 119화>

119화. 해남검문(1)

모두 앉자 담수련은 침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가 호남에서부터 강서와 광동을 지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여러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저희도 두 분의 협행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 일어난 혈사가 저희들 때문에 일어난 것 같아 저희의 마음이 무척 무겁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담수련의 말에 모두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신지요?”

장로 중 한 명이 물었다.

“저희가 양민들을 괴롭히는 사파들을 제거하는 와중에 여러 세력과 척을 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해남도에 나타났던 자들이 저희를 추격해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언뜻 들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을 마친 담수련은 모두 말이 없자 약간 긴장된 표정으로 침을 꿀떡 삼켰다.

만약 이들이 악불군과 담수련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단한다면 상황이 무척 복잡해질 수 있었다.

“……천상신녀 여협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모든 무림 세력들은 자신의 세력권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를 쫓아 왔건, 해남도에 발을 디딘 이상 저희의 일이 된 것이지요. 누구를 쫓아왔으니 ‘네 책임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림 문파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해남검문이 바다의 정기를 받은 사내 중의 사내들의 문파라고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문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송구하면서도 감사합니다.”

“도움은 우리가 받았고 수많은 제자들이 악 대협덕에 구명지은을 받았는데, 감사하다니요. 이제 해남검문은 악 대협의 일이라면 우리의 일처럼 도울 것입니다.”

순간 담수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가 가장 걱정하고 있는 문제가 악불군의 뒤를 받쳐 줄 세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백인막을 받아들인 것도 악불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거대 세력의 조력까지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이럴 경우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이 없으면 약속은 흐지부지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악 대협과 해남검문은 이제 혈우(血友) 관계가 되었다고 봅니다. 저희도 해남검문에 위험이 닥치면 언제든지 도움을 드릴 것을 약속하겠습니다.”

순간 차운명의 얼굴이 밝아졌다.

악불군 같은 고수와 혈우 관계를 맺으면 해남검문으로서는 손해날 것이 전혀 없었다. 더욱이 원나라가 물러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광동으로 세를 넓힐 계획을 가지고 있는 그들로서는 엄청난 우군을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천상신녀 여협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희로서는 또 한 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해남검문은 두 분의 집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든지 예고 없이 찾아오셔도 저희는 언제나 환영할 것입니다.”

중원인이지만 실지로는 변방 취급을 받으며, 누백 년을 중원 무림의 주류로 발돋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던 해남검문.

무림인들의 지탄과 저주를 받던 담무룡의 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온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 있는 담수련.

둘의 협력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둘의 결과가 악불군에게 달려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 * *

“이게 정말일까?”

해남검문의 총문주이자 남해영웅문의 문주인 형운호는 차운명이 보낸 서찰을 읽고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 문주님께서 거짓 보고를 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해남검문의 군사격인 장로 주호택은 서찰을 받은 후 몇 번이나 내용을 읽어 보았다. 다른 사람이 보냈다면 믿지 않고 헛소문이라고 치부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보낸 사람은 남해삼십육검의 일인이자 남해 보루문의 문주인 차운명이었다. 그는 절대 거짓을 써서 보낼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내용이 너무 황당하지 않은가? 겨우 이십 대의 청년이 이런 무공을 보인다는 것이 가능한가?”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넘칩니다. 그동안 무림에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기재들이 나타나 무림의 역사를 바꿔 버린 예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이 악불군이라는 청년이 그러한 일대종사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나?”

“문주님께서 이미 초대를 하셨으니 곧 이곳에 들를 것입니다. 그때 직접 보시고 판단을 하시지요.”

‘이렇게 강한데, 한 여인의 호위 무사를 자처하고 거기다 겸손하기가 그지없다고까지 하니……. 정말 내가 천하의 영웅을 보는 기회를 잡은 것일까?’

생각을 정리한 형운호는 악불군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 장로.”

“예.”

“이 청년이 찾는 약초가 빙설초라고 했지?”

“예.”

“알아보았나?”

“일 갑자 전에 본 도에 와서 빙설초를 가져간 분이 한 분 계셨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구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한 분? 누구인가?”

주호택이 극존칭을 하자 형운호는 의아한 듯 물었다.

“성모궁의 봉황성모께서 가져가셨습니다.”

“성모께서?”

형운호는 깜짝 놀란 듯 급히 반문했다.

“예.”

광동 남부는 물론 해남까지 어우르는 남해의 진정한 절대자는 남해성모궁의 봉황성모였다.

어떤 일에도 관여한 적이 없고 다만 존재할 뿐이었지만, 급박한 위기가 닥쳐오거나 해결이 불가능한 사건이 생겼을 때 거의 모든 세력들은 성모궁을 찾아갔다.

“빙설초와 성모궁이 연관이 있다면 우리 마음대로 빙설초를 줄 수도 없지 않은가?”

“지금 빙설초가 어디에 있는지도 저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문제도 우선 악 대협을 만나 본 후에 판단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알았다. 차 문주께 다시 연통을 해서 내가 빨리 악불군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라.”

“이미 초대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날짜를 지정하지 않았지 않느냐? 그럼 언제 올지 어떻게 알겠느냐? 최대한 빨리 방문해 달라고 전해라.”

“예!”

해남검문은 대륙의 최남단에 있어 무림에 대한 영향력은 적었지만 그 세력은 거대 문파들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큰 힘을 갖춘 큰 문파였다.

그런 문파의 수장이 아무 세력도 없는 악불군을 만나기 위해 재촉한다는 것은, 악불군의 위상이 이미 예전과는 완연히 달라졌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 * *

“아가씨, 빙설초에 대해 알려 줄 생각이면 그냥 알려 줘도 되는데, 굳이 우리를 그쪽으로 오라는 이유가 뭘까요?”

“처음에는 소군의 명성이 높아지니까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 때문에 오라고 했을 거야. 무림인들은 직접 보고 판단하는 것을 선호하지, 소문을 그냥 믿지는 않는다고 하니까. 하지만 빨리 와 달라고 재촉한 것은 또 달라. 철룡세가와의 싸움에 대해 들었을 거고, 이젠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적이냐 아니면 친구냐를 가늠하기 위해서 부른 걸 거야.”

“해남검문은 아무리 문주들과 친해도 총문주와 사이가 틀어지면 적이 된다고 하던데, 남해영웅문에서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소군.”

“예.”

“지금 소군은 빙설초에 몰두해서 다른 생각은 전혀 하지를 않고 있는 것 같아.”

“설마 그러겠습니까?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은 합니다.”

“아무리 생각을 많이 뭐해? 빙설초를 구하는 것이 무조건 일 순위면서.”

“아가씨, 제 임무는 아가씨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보호에는 아가씨의 건강까지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해남도까지 온 목적이 빙설초인데, 그것이 일 순위가 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담수련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악불군을 보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소군은 야망도 없어?”

“저도 사내인데 어찌 야망이 없겠습니까?”

“어떤 야망인데?”

“아가씨를 보통 사람처럼 건강하게 만들어, 가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천하의 영웅과…….”

“그게 뭐가 야망이야. 그런 것은 그냥 임무일 뿐이야!”

“제게 아가씨는 임무가 아닙니다. 정확히는 제 목숨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씨를 지키는 일이 제 야망입니다.”

‘아이! 진짜 답답해 죽겠어.’

담수련은 내가 죽으면 그땐 어떡할 거냐고 큰 소리로 묻고 싶었다. 심지어 지금 찾고 있는 빙설초 역시 증상을 완화하고 시기를 좀 늦출 뿐, 자신이 십 년 안에 죽을 확률은 거의 십 할이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악불군이 얼마나 낙담하고 슬픔에 빠질지 알기 때문에 계속 말을 돌려 말하다 보니, 핵심을 전달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소군.”

“예.”

“나도 소군이 옆에 있어서 너무 좋아.”

“저도 좋습니다.”

“내 말 끝날 때까지 말하지 마!”

저도 좋다는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자 담수련은 깜짝 놀라 강하게 말했다.

“알았습니다.”

“나도 좋지만, 그건 오로지 내 욕심이잖아?”

“아가씨의 욕심이 아니라 제 욕심입니다.”

“끝날 때까지 말하지 말랬지?”

“죄송합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그였지만, 지금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은 따를 수가 없었다.

그가 자꾸 딴소리를 하고 그녀의 말을 끊는 이유였다.

“난 소군이 천하의 영웅이 되었으면 좋겠어.”

“전 영웅 같은 것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영웅의 재목도 아니고요. 전 아가씨를…….”

말하던 악불군은 그녀가 자신을 노려보자 말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다른 사안은 무조건 들으면서 왜 이 말은 안 들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제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가주님께서 제게 신신당부한 일입니다.”

“그래서 아버님 명대로 천하제일 영웅을 찾아서 나랑 혼인을 시켜 주려고? 정말 그러고 싶어?”

“가주님의 명이 이치에 맞지 않다면 저도 따를 생각은 없습니다. 아가씨의 행복이 먼저니까요. 하지만 천하제일의 영웅이라면 아가씨와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난 영웅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한다고!’

담수련은 버럭 소리를 지르려다가 갑자기 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자, 나오는 말을 꿀꺽 삼켰다.

“그럼 소군이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면 되겠네?”

“…….”

담수련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마디는 순간 악불군의 모든 사고를 정지시켰다. 심지어 몸까지 마비시켰다.

언감생심(焉敢生心), 한 번도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왜 말을 안 해?”

담수련은 악불군이 마치 얼어붙은 듯 말이 없자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악불군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그녀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께서 하시는 말씀이 끝날 때까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뭐래? 그럼 지금까지 한마디 할 때마다 대꾸한 것은 뭔데?”

“그래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제부터는 아가씨 말이 끝날 때까지 말하지 않겠습니다.”

“좋아! 나 이제 할 말 다 끝났으니까 말해 봐.”

담수련은 자신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악불군이 아무 말 없이 일어서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다시 말했다.

“말하라니까 왜 일어나?”

“별로 할 말도 없었습니다. 아가씨께서 하실 말도 다 끝나셨다고 하니 이제 출발 준비를 하려고요. 그럼 잠시 쉬고 계십시오.”

‘저 바보!’

악불군이 나가자 담수련은 두 손으로 이마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붉은 사과처럼 빨개져 있었다.

순간 머리에 떠오른 말을 하긴 했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것 같자 부끄러움이 밀어 닥친 것이다.

“아이 씨! 소군이 내가 혼인하고 싶어 미친 여자인 줄 아는 거 아냐……? 창피하게.”

그녀가 혼자 고민하고 있을 때.

밖으로 나온 악불군도 머리가 복잡한 상태였다.

출발 준비를 한다고 나왔지만 그는 담수련의 방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 보고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라고……?’

담무룡은 천하제일의 영웅을 찾아 담수련과 짝을 지어 주고, 자식을 낳으면 그중 아들 한 명은 담씨 성을 전해 주라고 했었다.

분명 거기에는 너는 안 된다는 말은 없었다.

악불군은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그 감정은, 자신이 계속해서 묻어 두고 있던 어떤 욕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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