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검지애 120화>
120화. 해남검문(2)
“악 대협,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악불군이 우두커니 서 있자, 남해영웅문까지 안내를 맡은 금사력이 급히 다가와 물었다.
“아! 예, 잠시 생각 좀 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악 대협께서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계시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악불군은 담수련의 호위에 조금의 허점도 없도록 하기 위해 지금까지는 잠시도 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랬군요. 그런데 떠날 때가 된 것입니까?”
“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상신녀 여협께서 타시는 백마는 마부들이 전혀 손을 댈 수가 없다고, 직접 오셔야 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녀석이 좀 까칠하지요?”
“악 대협은 출발 준비를 한다고 하더니 계속 여기에 있었던 거예요?”
그때 문이 열리며 가뿐한 경장 차림을 한 담수련이 밖으로 나오며 물었다. 중요한 답을 하지 않고 나와서 그런지 약간의 가시가 느껴지는 말투였다.
“막상 나와 생각하니, 제가 할 것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담수련의 입술이 살짝 나왔다.
면사로 가려 금사력은 전혀 볼 수 없었지만 악불군의 눈에는 그녀의 표정이 훤히 보이고 있었다.
‘입술이 나온 것을 보니 삐치신 것 같은데, 어떻게 풀어 드리나……?’
하지만 자신에게 천하제일의 영웅이 되라는 그녀의 말의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그저 곤혹스러울 뿐이었다.
* * *
“소가주님, 해남도에서 오 일째 배가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
언제나 느긋할 것 같던 철무정도 이번만은 태연하게 있지 못했다.
해남도를 왕래하는 여객선은 총 네 척이었다.
그중 한 척은 며칠 전 싸움으로 여러 곳이 파손되어 지금 포구에서 수리 중이었고, 나머지 세 척은 모두 해남도에 들어간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분명 여민웅과 철룡단 오십 명은 철룡세가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로 불리는 무력 집단이었다. 특히 여민웅의 무공은 세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그런데 하루면 돌아온다던 그가 오 일 전 해남도로 들어간 이후 연락이 완전히 끊겨 버린 것이다.
“그럼 해남도로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이냐?”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포구에 배도 많던데?”
“해남도 중간에 물살이 거센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합니다. 거기다 날씨가 변덕스러워 언제 폭풍우가 닥칠지 누구도 예상을 할 수가 없어, 그 배들로는 해남도로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그렇다 치고, 여 단주까지 나오지 않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느냐?”
짜증 섞인 표정으로 말하는 철무정에게 흑살마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소가주님, 여 단주님 성격상 배가 안 뜨면 협박을 해서라도 배를 띄울 분입니다. 그런데 오 일이나 돌아오시지 않는 것은 아직 악불군과 담수련을 찾지 못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철룡단은 추적술도 일가견이 있는 걸 알지 않느냐? 더구나 조그만 섬 안에서 숨을 데가 어디 있다고 아직까지 못 찾는다는 말이냐?”
“그렇긴 하지만, 해남도의 크기가 거의 호북성의 반 정도라고 하니 작은 섬은 아닙니다. 거기다 해남검문은 아주 호전적인 문파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여 단주의 무공은 나와 맞먹는다. 거기다 철룡단이 오십 명이나 따르고 있는데, 섬 안에서 대장 노릇하는 해남검문 따위가 어찌 상대가 되겠느냐?”
철무정이나 여민웅이나 중원 남쪽에 대한 지식이 무척 빈약함을 알 수 있었다. 더욱이 이들은 언어까지 잘 통하지 않는 이곳까지 내려올 일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철무정은 입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사실 속은 바싹바싹 타고 있었다. 여민웅의 성정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었다.
‘보고가 완전히 생활화가 되어 있는 분이 이렇게 긴 시간 연락을 안 할 리가 없는데…….’
거기다 그를 지금 더 다급하게 만들고 있는 일이 있었다. 전서구도 통하지 않는 이곳까지 이틀 전 철룡세가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탁자에 놓인 서찰을 다시 한번 펼친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흑살마검은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소가주님, 가주님께서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당장 귀환하라고 서찰을 보내신 것을 보면, 세가에 뭔가 일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생각됩니다. 벌써 이틀이나 지났습니다.”
“철룡단은 본 가의 최정예다. 거기다 여 단주는 아버님께서 최고로 신임하는 분인데, 어떻게 이대로 혼자 떠난다는 말이냐?”
“수하 이십만 남겨 주시면 제가 여 단주님께서 나오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흑살마검의 말에 철무정은 갈등 어린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았다. 그가 지금 못 떠나는 이유는 사실 여민웅보다는 담수련 때문이었다.
‘다 잡은 물고기를…….’
아쉬운 듯 중얼거린 철무정은 흑살마검에게 말했다.
“여 단주께서 악불군과 담수련을 잡아 오면, 어떤 시비도 벌이지 말고 즉시 최고 속력으로 세가로 복귀하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해남도는 대단히 더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이 짚으로 만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고, 심지어 웃통을 벗고 다니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그럼에도 모두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땀으로 덮여 있었다.
“악 대협께서는 전혀 땀을 흘리지 않으시는군요?”
금사력도 일류급 고수 치고는 상당히 강한 편이었지만, 너무 더운 날씨에 땀이 흐르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악불군은 북쪽에서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음에도 땀을 전혀 흘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만 땀을 안 흘리는군요?”
뜻밖에도 악불군은 자신이 땀을 흘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도 못하고 있었다.
‘엄청난 고수이긴 한데, 이따금 보면 자신이 고수인 것을 모르는 것 같단 말이야?’
악불군의 답에 뭐라 할 말을 잃은 듯 금사력은 어색한 웃음만 지었다.
그러나 그가 더 의아한 것은 담수련이었다.
그도 초절정 고수가 되면 주위의 기온의 영향을 안 받는다는 얘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걸음걸이나 풍기는 기운을 보면 그녀는 분명 무공을 모르거나, 안다 해도 상당히 낮은 수준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경장이라고는 하나 여인답게 속이 안 보이도록 옷을 꼭꼭 입었고 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두툼한 면사까지 쓰고 있었음에도 땀을 전혀 흘리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해남도에는 사람이 많이 사는 것 같습니다?”
남해 보루문을 떠나 반나절 가까이 해남도의 안쪽으로 향하던 악불군은, 생각 외로 가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자 의외라는 듯 물었다.
“예전에는 해남도 자체가 한 나라였습니다. 제법 군사력도 강해서 해적들이 감히 침범을 못했지요. 하지만 왕실이 멸망하고 각 지역의 호족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나서면서 해남도는 완전 몰락했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었군요.”
“호족들이 양패구상을 하고 치안이 무너지자 완전히 해적들 판이 됐지요. 그때 분연히 일어나 해남도를 다시 안정되게끔 만드신 분이 해남검문의 창시자이신 해룡왕 조사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해남검문의 총문주님은 남해삼십육검을 배출한 서른여섯 문파가 비무를 통해 뽑는다고 했는데, 보통 몇 년마다 비무를 하시나요?”
듣고 있던 담수련이 슬쩍 끼어들었다.
민생에 관심이 많은 악불군과는 다르게, 그녀는 정치에 관심이 있는 듯 묻는 질문부터가 달랐다.
“특별한 일이 없을 경우 오 년마다 새롭게 총문주님을 선출합니다. 하지만 그게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거의 백 년 가까이 총문주님은 남해영웅문에서 나왔으니까요.”
담수련은 이유를 물을까 했지만 곧 그만뒀다. 그 안에 어떤 사정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타 문파의 일에 너무 깊게 관심을 보내는 것도 결례이기 때문이었다.
“해남검문에서도 상당히 많은 고수분들을 배출하셨다고 들었는데, 왜 육지로는 안 나가시고 이 안에만 계신 건가요?”
“예전에는 본 문에서도 제자들에게 강호행을 시켰습니다. 협행도 하고 중원의 영웅호걸들과 친분도 쌓으라는 의미였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자들이 광동을 벗어나기도 전에 피살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요?”
“광동의 패자인 구천마성과 사이가 무척 안 좋았거든요. 그들은 북쪽으로 세력 확장을 하고 싶어 했는데, 정파인 해남검문을 뒤에 두고 북쪽을 공략하기가 껄끄러웠겠지요. 그때 구천마성과 두 번이나 대규모 전쟁을 벌였을 정도입니다. 그게 멈춘 것은 원나라가 침공을 하면서였습니다.”
“구천마성은 지하로 숨어 버렸으니 해남검문으로서는 세력 확장을 할 절호의 기회였을 텐데요?”
“상황상 유리한 조건이 형성된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원나라의 태양천이 광동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정말 파죽지세였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바다 덕분이라고 어르신들이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담수련은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의 구파일방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세가와 방파들이 지리멸렬하며 봉문을 하고 모두 지하로 숨을 정도였으니, 해남검문이 별다른 문제 없이 아직까지 활동을 할 수 있는 건 정말 바다가 막아주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것이었다.
“저기 산 보이시지요? 저 산 중턱에 남해영웅문이 있습니다.”
금사력은 멀리 보이는 한 산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멀리 높디높은 봉우리가 두 개의 커다란 산 중앙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봉우리의 정상 쪽은 구름이 덮고 있어 보이지 않았다.
“가히 장관입니다.”
“해남도의 자랑이자 성산(聖山)인 해룡봉입니다. 그 옆의 두 개의 산은 해룡봉을 보좌하는 쌍룡산입니다. 남해영웅문은 쌍룡산 중 우측에 있는 우룡산 중턱에 있습니다.”
“성산이라면 해룡봉엔 특별한 전설 같은 것이 있겠네요?”
“해룡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바닷물을 끌고 올라갔는데 바다 밑의 땅까지 같이 딸려 올라와 해남도를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실지로 폭풍우가 불어오는 날에는 해룡봉에서 용음(龍音)이 들린다고 하더군요.”
“해룡봉의 정상까지 보였으면 정말 멋있을 텐데, 구름에 가려 그게 좀 아쉽네요.”
담수련도 감탄의 표정으로 말했다.
“해룡봉은 정상을 우리 인간들에게 보여 주지 않습니다.”
“그럼 언제나 정상에 구름이 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실지로 저 정상까지 올라가 본 사람은 해룡왕 조사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요?”
“올라갈 길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올라가려고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스러운 산에 인간의 발이 닿으면 안 된다고 남해영웅문에서 막고 있으니까요.”
“그럼 해룡봉의 정상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겠군요?”
“저는 본 적은 없지만, 저 구름 안으로 들어가면 온갖 기이영초가 만발한 무릉도원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이영초?’
악불군과 담수련의 머리에 동시에 한 단어가 재빨리 잡혔다.
“진짜 신선이 사는 성산이 분명한가 보네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 더 올라가면 만년빙설이 봉우리를 덮고 있다고 합니다. 봉우리가 뾰족해서 바람까지 엄청 세게 불어, 보통 사람은 얼마 올라가지 못해 얼어 죽을 정도라고 하더군요.”
“그렇군요…….”
대답을 하는 담수련의 눈이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발견한 듯 반짝 빛났다.
새편작은 빙설초가 극양의 지역에 있는 극음의 장소에 핀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해룡봉 정상에 만년빙설이 있다면 새편작이 말한 장소에 아주 적합했다.
해남도는 진짜 더운 지역이었다. 뜨거움을 뜻하는 극양의 지역에 부합된다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극음이었다. 해남도 같이 더운 지역에서 극음의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을 그녀는 계속했었다. 그런데 만년빙설이라면 극음의 장소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올라갈 길도 없고, 성스러운 산이라고 사람의 발길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아무 잡음 없이 그곳을 올라가느냐가 관건이네?’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사 호, 정말 놀랍지 않냐?]
악불군과 담수련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르고 있던 구여풍이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악불군을 보며 말했다.
[저 까칠하기로 유명한 해남검문을 이렇게 간단히 휘어잡을 줄은 나도 몰랐다. 아무래도 내가 판단을 아주 잘한 것 같아.]
마진우 역시 감탄하듯 말했다.
이미 악불군을 경외하기 시작한 그들이었지만 갈수록 존경과 충성심까지 생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