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21화 (121/472)

<천검지애 121화>

121화. 해남검문(3)

“단주님!”

우여곡절 끝에 겨우 천화궁 소속의 기녀와 선이 닿은 추국은 며칠을 은밀하게 움직인 끝에 한 잡화점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보고 싶던 종리화를 만나 그 앞에 부복할 수 있었다.

“쯧! 쯧! 죽었던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닌데 왜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추국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흐르자 종리화는 혀를 차며 물었다.

“단주님을 뵈니까 갑자기 서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서러워? 누가 감히 추국을 서럽게 한 것이냐?”

“특별히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세가를 나오자마자 사방 모두가 적이더라고요. 악 무사님이 없었으면 저희는 이미 죽어서 황천길에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아가씨나 소군이 올 줄 알았는데 어찌 너 혼자 온 것이냐?”

“저희도 그것 때문에 지금 악양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객잔에 죽치고 있어요. 오룡세가들이 본 가를 배신했는지 전부 우리를 노리고, 어찰단으로 보이는 수상한 자들이 계속 주위를 배회해서 불안하긴 한데, 다행히 개방과 장사성 장군의 장호대가 우리를 보호해 줘서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 아가씨와 소군은 어디로 갔고, 너희는 왜 개방과 장호대에서 보호를 해 준다는 건지 자세히 말해 봐라.”

“예, 그게…….”

추국은 잠룡세가에서 나온 후부터 악불군과 담수련이 사라질 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세세히 보고하기 시작했다.

“야~ 악불군이라는 애 정말 남자 중의 남자네. 언니 그 아이 오면 저 꼭 소개시켜 줘요.”

듣고 있던 천화궁주 예서령이 감탄하며 말했다.

“너 소개시켜 주면 뭐 하게?”

“제가 데리고 있는 게 예쁜 애들밖에 없잖아요? 그중에 참한 애 한 명 소개시켜 주려고 그러지요.”

추국은 천화궁주의 말에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악불군에게 여인을 소개시켜 준다는 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녀였다.

“쓸데없는 소리해서 대화 방해하지 말고 입 다물고 있어.”

“남녀 간에 일어나는 일이 세상 모든 사건의 반인데 왜 쓸데없는 소리예요?”

천화궁주의 반박에 종리화는 대꾸 없이 추국에게 다시 물었다.

“연화는 어떠냐?”

“다행히 아가씨의 의술이 뛰어나서 목숨은 건졌습니다. 다만 무공은 최소 반년은 지나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시성란은?”

“아가씨께서 죽이라고 명하셔서 죽였습니다.”

“……아가씨께서 진짜 죽이라고 명하셨다는 거냐?”

“예.”

“아가씨께서 그랬다고?”

종리화는 상당히 놀란 듯 다시 반문했다.

“세가를 나오시고 여러 사건을 겪으시면서 조금 변하셨어요. 예전에는 벌레 하나도 죽이지 못하시던 분이 악 무사께 모두 죽여! 이런 말도 하시고요. 어찌나 상황 파악을 잘하시는지, 강호 경험이 무지 많은 지자(智者) 같다니까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전혀 예상치 못한 담수련의 행동에, 종리화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강호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악불군이 진짜 소군이라는 말을 듣고서, 그녀는 터무니없는 발전에 대단히 놀랐다. 그런데 담수련까지 그녀가 알던 담수련이 아니라니……

“장호대는 그렇다 치고, 남개방에서 너희를 보호해 주는 이유가 뭔 것 같으냐?”

“거기까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아가씨와 악 무사님께서 외유를 나갔다 오셨는데, 그때 남개방과 뭔가 연계를 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찰단에서 하남의 개방 총단을 공격할 때 잠룡세가에서도 동원이 됐었다. 한마디로 개방과 잠룡세가는 원수지간이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개방과 연계라니……

“아무래도 소군과 아가씨께 직접 듣기 전에는 뭔가 뭔지 모르겠구나. 지금 둘은 어디에 있느냐?”

“정말 저희도 모릅니다. 저희에게 단주님께서 연락이 올지도 모르니 두 분이 돌아올 때까지 악양에서 버티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셨어요.”

“그럼 지금 강서와 광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악불군이 정말 소군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냐?”

광동의 천호무적검 소문을 들었을 때 그녀는 동명이인일 거라고 믿었다. 너무 나타난 시기와 퍼지는 소문이 한 사람임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악불군이 광동에 나타날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화와 헤어졌다면 동명이인이 아니라 진짜 악불군일 확률이 높았다.

“언니, 더 시간 끌면 안 돼요.”

천화궁주가 밖을 살피더니 말했다.

최대한 조심하며 추국을 옮겨 왔지만, 그녀들이 감지 못하는 고수가 따라왔을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추국아, 지금 나는 모습을 드러낼 수가 없다.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듣고 그대로 행하도록 해라.”

종리화는 추국에게 전음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 말, 명심할 수 있지?”

“걱정 마십시오.”

“그럼 너만 믿고 우린 가겠다. 연락망이 끊기지 않도록 조심하고, 약속 장소와 약속 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때까지 악 무사님과 아가씨께서 안 돌아오시면 어떻게 하지요?”

“그땐 다음 계획으로 가야겠지. 그때까지 돌아오셨으면 좋겠구나. 이만 가 보아라.”

“예.”

추국이 나가자 종리화가 천화궁주를 보며 물었다.

“서령아, 추국이 안전하게 돌아갈 수는 있겠지?”

“그것은 걱정 마세요. 그런데 저 애들을 그곳에 그냥 두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요?”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 위험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저애들까지 우리가 불러들이면 아가씨와 소군을 만날 접점을 잃어. 그리고 저애들은 어차피 아가씨를 보호하기 위해 키워진 아이들이야.”

말을 마친 종리화가 일어서자 천화궁주는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 내가 미쳤지. 이렇게 냉정한 언니를 뭐가 좋다고 의자매까지 맺고 이렇게 돌봐 주는지 몰라.”

“그래서 무르고 싶어?”

“미쳤어요. 언니 아니면 천한 기녀들의 대모인 나를 누가 좋아해 준다고.”

종리화는 피식 웃으며 벽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천화궁주가 기다렸다는 듯이 줄을 당기고는 그녀의 옆에 섰다.

끼이익!

그러자 벽의 한쪽이 서서히 열리더니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두 명의 여인이 나타났다.

“우린 갈 테니 조심해라.”

“예.”

종리화와 천화궁주가 사라지자 두 여인은 자리에 앉더니 비단 천들을 늘어놓고는 재단을 하기 시작했다.

* * *

남해영웅문은 총문주가 있는 곳 치고는 상당히 단출했다. 널찍한 연무장을 둘러싸고 제자들이 숙실할 방이 길게 지어져 있었고, 연무장 안쪽으로 이 층 전각 두 개가 세워져 있을 뿐이었다.

남해영웅문의 정문에 도착하니, 그곳엔 중년인이 제자 십여 명을 데리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금 사질이 직접 안내했구먼.”

“오 사숙님께 인사드립니다.”

해남검문은 서른여섯 문파로 나누어 있었지만 사적으로 만났을 때는 모두 한 문파처럼 허물없이 대했다.

오 사숙이라 불린 중년인은 악불군이 담수련을 말에서 내려주는 장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잠시 지었지만 곧 표정을 바꿨다.

천상신녀의 호위 무사를 자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초절정 고수가 말에서 내리는 여인을 보조까지 한다는 것이 의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둘의 진정한 관계를 모르는 상태에서 이상하다 하여 내색을 하는 것은 또 다른 결례였기에 표정 관리를 한 것이다.

“노부는 남해영웅문의 내당당주인 오문각이라고 합니다. 위명이 자자하신 천호무적검께서 이렇게 직접 내방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전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제가 모시는 천상신녀 여협이십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문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거라.”

“예.”

제자들이 악불군과 담수련을 안내하며 전각 쪽으로 향하자 오문각이 금사력을 보며 물었다.

“문주님께서 보내시는 서찰 같은 것은 있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금사력은 급히 품에서 서찰을 꺼내 건넸다.

“그래, 수고 많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그래 남해 보루문에 애통한 일이 벌어졌다는 얘기는 들었다. 빨리 가 보거라.”

보통 이렇게 오면 같은 또래들끼리 모여 술도 한잔 나누고 자신들의 구역에서 일어난 일들을 화제 삼아 대화를 나누다 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남해 보루문의 상황이 그러기는 너무 심각했다.

‘쯧! 쯧! 차 문주님 마음고생이 무척이나 심하겠군.’

오문각은 남의 일 같지 않은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중얼거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정청에 도착한 악불군과 담수련은 문주 휘하 모든 간부들이 기다리고 있자 깜짝 놀랐다.

이 정도 환대는, 말 그대로 대 문파의 장문인이 방문했을 때와 맞먹는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저는 악불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쪽은 천상신녀 여협이십니다. 말학 후배들을 초대해 주신 것만도 영광인데 이렇게 어르신들이 모두 나와 계시다니, 정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공손히 포권을 하며 진정 어린 인사를 하자 형운호의 표정이 환해졌다.

중원 출신의 무림인들은 우선 해남검문을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무공이 높을 경우 무시의 강도는 더 컸다. 그런데 아직 젊은 악불군이 너무 겸손하게 인사를 하니 점수를 따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해남검문의 총문주인 형운호일세. 우선 이리와 앉으시게나.”

“어르신들과 선배님께서 먼저 앉으셔야지요. 어린 저희들이 먼저 앉는 것은 송구스럽습니다.”

결국 모두가 다 앉고 나서야 악불군과 담수련이 자리에 앉았다.

“악 대협 덕에 남해 보루문이 큰 위기를 벗어났다는 말은 들었네.”

“약간의 도움을 드렸을 뿐, 제 덕분에 큰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너무 과장입니다.”

악불군의 말을 들으며 차운명이 보낸 서찰을 펼친 형운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는 장로들에게 서찰을 건넸다.

“차 문주께서 서찰에 적기를 악 대협과는 혈맹의 관계를 맺었다고 하는데, 사실이신가?”

“혈맹이라고 해도 되겠지만 아가씨께서는 혈우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피로 맺은 맹서와 피로 맺은 우정이라? 그래, 여러분들께서는 어떤 것이 더 나아 보이십니까?”

형운호는 미소를 지며 간부들을 보며 물었다.

“혈맹은 집단과 집단 간의 약속 같은 느낌이 드니, 혈우가 더 나은 것 같습니다.”

주호택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인 형운호는 악불군을 보며 다시 물었다.

“설마 남해 보루문하고만 혈우를 맺을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해남검문의 모든 문파는 한 형제와 같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히 해남검문 전체와 혈우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합니다.”

형운호는 흡족한 미소를 지며 주호택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노부는 남해영웅문의 장로직을 맡고 있는 주호택이라고 합니다. 악 대협과 천상신녀 여협께서 귀한 걸음을 해 주신 것에 대해 다시 감사드리겠습니다.”

악불군과 담수련은 급히 일어나 포권으로 받았다.

“빙설초를 구하고자 해남도에 왔다고 들었는데, 맞습니까?”

“예, 혹시 들은 적이 계신지요?”

“기록을 보니 빙설초가 해남도에서 나는 것은 맞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디서 누가 캤는지, 그리고 무엇에 사용을 했는지는 어떤 기록에도 남아 있지가 않았습니다.”

빙설초가 해남도에서 생산되는 것이 확인이 됐다는 사실은 분명 고무적이었지만, 어디서 누가 캤는지를 모른다는 말을 들으니 여전히 막연할 수밖에 없었다.

악불군과 담수련의 표정에서 실망을 읽은 주호택은 급히 부언했다.

“하지만 본 도의 약초꾼들과 화전민 그리고 의원들까지 모두를 조사하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며칠 이곳에서 편히 쉬시면서 소식을 기다려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혹시…….”

악불군이 뭔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담수련이 끼어들었다. 해룡봉에 대해 말하려는 것 같아서 다급히 막은 것이다.

“그래요,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해남도의 영웅호걸들과 친분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겠지요. 다만 저희는 오 일 이상 여기서 더 머물기가 힘듭니다.”

“해남검문의 모든 문파에 연락을 취했으니 늦어도 내일 저녁까지는 소식이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주호택은 슬쩍 오문각을 쳐다보았다.

“지금 시간도 딱 점심시간이니 우선 식사나 하면서 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오문각이 나서며 누군가를 향해 손짓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녀들과 하인들이 양손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대부분 해산물이었지만 오리고기와 양고기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재정이 어려운 해남검문으로서는 상당히 신경을 써서 장만한 진수성찬이었다.

식사가 어느 정도 진행이 되자, 황운호의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일어서더니 술잔에 술을 가득 담아 악불군을 향해 말했다.

“노부는 남해영웅문의 호법인 황추수라고 하오. 노부가 악 대협께 술 한 잔을 권하고 싶은데, 괜찮겠소?”

담수련은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전음을 보냈다

[소군, 내가 말한 대로. 알지?]

악불군은 담수련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짓고는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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