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검지애-122화 (122/472)

<천검지애 122화>

122화. 신위(1)

“노선배님께서 주시는 술잔을 후배인 제가 어찌 안 받겠습니까!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악불군이 포권을 하며 승낙하자, 황추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매우 강한 힘으로 술잔을 악불군을 향해 던졌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날아갔지만 가득 담긴 술은 한 방울도 옆으로 새지 않았다. 그의 내공이 상당함을 보여 주는 방증이었다.

쏜살같이 날아오던 술잔은 악불군의 바로 앞에서 탁 멈췄다. 순간 모두의 입에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빠르게 날아오는 술잔을 흘리지 않고 받느냐 못 받느냐가 이번 시험의 관건이었다. 그런데 아예 공중에 딱 서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수법이었다.

악불군은 공중에 선 채 맹렬하게 회전을 하고 있는 술잔을 손으로 잡아 한 입에 털어놓고는, 다 마셨다는 것을 확인시키듯 술잔을 거꾸로 잡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그럼 후배가 노선배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한 잔 드리겠습니다.”

황충수에게 목례를 하며 말한 악불군은 술상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러자 술병이 공중으로 떠오르더니 술잔에 가득 술을 따르고는 다시 탁자에 내려앉았다.

그 다음 순간, 이번에는 술잔이 스르르 공중으로 떠올랐다.

‘허공섭물?’

술잔을 던진 것과 이렇게 내공을 이용해 물건을 움직이는 것은 난이도에서 차이는 있었지만 황추수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휙! 휙!

순간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악불군의 검이 술잔을 향해 움직이더니 어느새 다시 검집에 들어가 있었다.

‘대단한 쾌검이긴 한데, 뭘 한 거지?’

모두는 공중에 떠 있는 술잔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의 술잔은 황추수에게 천천히 날아갔다.

술잔이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자 황추수는 뭔가 있다는 느낌을 받는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술잔을 받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술잔은 아주 가볍게 그의 손에 잡혔다.

‘단지 허공섭물을 보여 준 것인가?’

황추수는 중얼거리며 술을 한 입에 탁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역시 다 먹었다는 듯 술잔을 거꾸로 드는 순간, 술잔이 정확하게 네 조각을 갈리며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황추수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이, 이런…….”

그리고 그것을 본 황운호가 놀란 듯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하하하! 이 황모가 경험은 많지 않아도 나름 절기들을 많이 봐 왔다고 자부했는데, 이런 신묘한 수법은 정말 처음이구려!”

문주가 일어서자 다른 간부들도 급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곧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황 파악을 끝내자 모두의 눈은 황추수만큼이나 커다래졌다.

술이 담긴 잔을 이미 검으로 잘랐음에도 술은 조금도 흐르지 않았고 그대로 황추수의 앞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술을 마시고 나서야 잔이 갈라졌다.

상황은 아주 간단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누구도 그런 수법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당연히 펼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순식간에 청안의 분위기는 진중해졌다. 약간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모두의 표정에는 악불군에 대한 경외의 빛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기실 이번 수법은 악불군도 상당히 어렵게 보인 신기였다.

하지만 담수련은 이런 상황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는 악불군에게 펼칠 수 있는 가장 신묘한 수법을 생각해 두라고 조언을 했던 것이다.

[잘했어.]

담수련의 전음을 받은 악불군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나타났다. 모두가 그를 경외의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그녀의 칭찬 한마디가 더 좋은 그였다.

* * *

식사가 끝나고 귀빈청에 방이 두 개가 준비됐다.

각기 하녀들이 한 명씩 배정이 됐지만 악불군은 거절했고 담수련은 승낙했다.

긴 여행으로 여러 가지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빨래와 목욕 등 여인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좀 있었다.

“아가씨!”

“응, 들어와.”

안으로 들어서자 깨끗이 씻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담수련의 머리를 하녀가 손봐주고 있었다.

“좀 쉬셨습니까?”

“오랜 만에 씻고 옷도 갈아입고 했더니 기분이 너무 상쾌하네. 잠시만 기다려.”

“예.”

악불군의 잘생긴 얼굴을 힐끔힐끔 보면서 하녀는 열심히 그녀의 머리를 손보더니 면사를 착용시켜 주는 것으로 일을 마쳤다.

“수고했어요. 이만 가서 쉬세요.”

“예, 아가씨.”

나가는 하녀의 얼굴은 완전 몽롱 그 자체였다.

악불군은 그녀가 살아온 동안 본 남자 중 가장 잘생긴 남자였다. 그런데 그녀가 더욱 놀란 외모는 담수련의 얼굴이었다.

면사를 벗은 그녀의 모습은 정말 하늘의 선녀가 내려온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둘의 모습을 보니 영웅전에 나오는 선남선녀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된 것이었다.

“남해영웅문에서 따로 전한 것은 없었어?”

식사가 끝난 후 남해영웅문의 간부들은 악불군과 한마디라도 하기 위해 줄을 설 정도였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그들의 질문이었다. 대부분이 무공에 대한 질문이었다.

중원의 다른 문파들은 타 문파 사람에게 무공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을 대단한 결례로 치부하는데,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아마도 섬에 고립된 생활을 하면서 해남검문이 계속 발전해 올 수 있었던 비결로 보였다.

실전 비무를 활성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금이라도 무공에 의문이 있으면 배분이나 나이를 따지지 않고 적극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풍토가 널리 퍼져 있었다.

“신시쯤에 연무장에서 모든 제자들과 얼굴을 익힐 겸 인사를 하고 술시에 만찬이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만찬? 그냥 저녁이면 되는데 굳이 만찬이라고 하는 걸 보면, 또 거하게 차릴 모양이네?”

“저녁 식사 때 해룡봉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하는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아까도 그 말하려고 했었지?”

“그것까지 눈치채셨습니까?”

“그런 것 같아서 내가 급히 끼어든 거야.”

“요즘 보면 아가씨께서는 혹시 독심술이라도 익히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딴사람 생각은 못 읽어. 소군이니깐 읽을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소군은 왜 해룡봉을 생각했어?”

“극양의 지대에 있는 극음의 장소. 해남도에서 도착해 본 장소 중 해룡봉이 가장 적합해 보였습니다.”

말을 들은 담수련은 갑자기 악불군은 유심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소군, 솔직히 말해.”

“뭘 말이십니까?”

“내가 계획이라고 말하는 거, 소군도 이미 생각하면서 모른 척 막 칭찬해 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제가요?”

“지금 해룡봉도 그렇고, 이따금 내가 이랬으면 좋겠다 하는 행동을 정확히 하거든. 자꾸 나 보고 머리가 좋네 천재네 칭찬하면서, 사실은 이미 소군도 다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냔 말이야?”

“아가씨의 머리는 저와 비교가 안 됩니다. 제가 칭찬한 것은 진심입니다.”

칭찬은 진심일지 몰라도 알면서도 모른 척했느냐에 대한 답은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담수련은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이 문제는 다음에 다시 얘기해.”

‘문제? 이게 다시 얘기할 문제인가……?’

악불군은 자꾸 다음에 얘기할 문제가 쌓이자 괜히 불안해졌다.

“그리고 해룡봉 문제는 내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지금 시간이 촉박한데 기다릴 여유가 있을까요?”

“이런 관계는 신뢰를 먼저 쌓는 게 아주 중요한 법이야. 모든 분들이 잘해 주고는 있지만, 우리가 만난 지 아직 하루도 안 지났어. 성스러운 산이라는데 말했다가 거절당하면 다시 또 말하기 껄끄러워져. 상황을 보다가 거절하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한 후에 그때 말을 꺼낼 거야.”

“역시! 아가씨의 심모원려는 누구도 따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나오는 아부성 칭찬.

하지만 담수련은 그러거나 말거나 악불군의 칭찬은 언제나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소군도 짐작하고 있겠지만 이따 연무장에 가면 비무 얘기가 나올 거야. 저들이 반드시 소군을 잡아야겠다는 마음이 확실하게 들도록 실력을 보여 줘.”

“최대한 노력하겠습니다.”

답하는 악불군을 담수련은 너무나도 든든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 * *

한편, 남해영웅문에는 한 소문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담수련을 도와 준 하녀가 나가자마자 담수련의 미모에 대해 침까지 튀기며 떠들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그 하녀는 입이 무거워서 일부러 담수련의 방에 배정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입을 다물고 있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잠깐 사이에 천상신녀는 어쩌면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으로 변하고 있었다.

원래 소문에는 살이 붙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너무 빨리 소문이 부풀어졌는데, 악불군 같은 고수가 호위를 한다는 사실이 그 소문을 부풀리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상태에서도 저절로 풍겨 나오는 고아함과 함께 분명 아름다울 거라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나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하녀의 말까지 퍼지면서, 연무장에 모인 젊은 무인들의 신경은 모두 담수련에게 향해 있었다.

“오늘 너희들은 대단히 중요한 분을 만나 평생에 한 번 가지기 힘든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중요한 공부를 놓치는 우를 범하지 말아라!”

담수련에 대한 말을 보고받은 오문각은, 젊은 제자들이 미녀에게 신경을 쓰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연무장에 모인 제자들에게 강하게 주의를 주었다.

“예!”

제자들이 커다랗게 대답하자 오문각이 다시 소리쳤다.

“집단 비무를 시작할 것이니 일 조와 이 조만 남고 나머지는 자리로 들어간다.”

명이 떨어지자 이미 훈련이 많이 돼 있는지 제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연무장 안에는 두 가지 색의 머리띠를 맨 이십 명만 남았다.

잠시 후, 악불군과 담수련을 안내하며 형운호를 비롯한 간부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연무장이 잘 보이도록 단상에 일렬로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귀하신 손님과 문주님 이하 어르신들이 모두 보는 자리이니 너희들의 기량을 확실하게 보이도록 하라.”

“예!”

“그럼 비무를 시작한다.”

오문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자들은 상대를 향해 돌진했다. 비록 목검을 가지고 하는 비무였지만, 주위에 일대 제자들 다섯 명이 유심히 살피며 검에 맞는 즉시 이름을 불러 밖으로 나오게 했다.

그러자 일각도 안 되어 연무장에는 두 명만 남았다.

“악 대협께서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많이 부족하지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모두들 실전에서 바로 적용 가능한 검로를 사용하니, 진짜 싸움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봐 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반 시진이 흐르는 동안 두 번의 집단전이 더 있었고 네 번의 일대일 비무가 이어졌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악 대협, 이미 들으셨겠지만 저희 해남검문은 손님이 오면 꼭 비무를 청하는 관례가 있습니다. 악 대협께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몇몇 제자가 배움을 청하는 모양인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문주님의 부탁을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악불군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끝낸 듯 몸을 일으키더니 연무장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런데 일대 제자가 나왔던 남해 보루문과는 달리 비무 상대로 나온 자는 장로인 윤우민이었다.

윤우민은 남해 삼십육검의 일인으로, 남해영웅문에서는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초절정 고수였다.

그는 상당히 긴 검을 들고 있었다.

“내가 비록 선배이긴 하지만 비무에는 선후배가 없는 법, 사정없이 대해 주시기를 바라겠네.”

윤우민은 포권을 하더니 기수식을 잡았다.

분명 검이었는데 그의 기수식은 마치 도를 사용하는 듯 양손으로 검을 잡고 위로 올린 형태였다.

해남도를 공격하는 해적 중 왜구는 가장 잔인하고 강력한 해적이었다. 그가 지금 펼치는 검법은 왜구들이 펼치는 도법에서 나타나는 강력함과 빠르기를 변화가 많은 검에 가미한 해남검문의 절기였다.

악불군이 들고 있는 짧은 검과는 대조적으로 보였다.

비무 내내 담수련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던 제자들도 이번만은 집중해서 연무장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해남검문의 검법은 대부분 쾌검이다. 그리고 천륭검보에도 쾌(快)가 있어. 어떤 차이일까?’

악불군은 윤우민의 검을 주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기기만 한다면 상황에 맞춰 그가 아는 최적의 수법으로 공격을 하면 되었다. 하지만 상대가 다쳐도 안 되고 죽으면 더욱 안 된다.

전의를 잃을 정도로 압도적인 무력을 보여 줘야 하지만, 상대가 적개심을 가질 정도로 창피를 주는 것도 안 되었다.

악불군의 머릿속에 수많은 그림이 지나갔다. 그리고 순간 그동안 시도하지 못했던 초식이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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